나는 너희들의 왕이니, 너희들은 나의 이야기이니,
나는 너희들을 펼쳐 먹고, 너희들을 씹어 읽으리라.
나는 너희들의 왕이니.
레드루, 『로바나 엔쥴로스』중에서
"후추를 건네주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뭔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들이 점점 더 분명하게 들려왔다. 천천히, 에밀리아는 눈을 떴다. 눈앞에 철로 된 기둥들이 몇 개 보였다. 에밀리아가 그것이 창살이며, 자신이 감옥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거기에 검은 없었다. 그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군요."
"기다리다 아사할 뻔했습니다, 정말로."
그리고 몇 개의 웃음소리가 겹쳐 들렸다. 에밀리아는 아직까지 머릿속에 남아있는 두통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통증이 떠난 자리에 기억이 조금씩 돌아와 자리잡았다.
그녀와 그녀의 동생은 여행 중에 만난 자의 조언에 따라 클리드 공작의 겨울별장을 찾았지만, 공작은 그녀들과의 만남을 거절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에밀리아는 동생인 티밀리아에게 '얌전히 여관에서 기다려라'라는 한 마디를 남긴 뒤, 밤을 틈타 별장에 잠입했다. 그러다 실수로 공작의 사병들에게 발각되어...
"어째서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이군요, 아가씨."
에밀리아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살폈다.
넓고 어두운 공간이었다. 유일하게 눈에 띄는 것은 촛불로 밝혀진 원형탁자와, 그것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있는 네 명의 남자들뿐이었다. 살찐 남자, 마른 남자, 늙은 남자, 가는 눈의 남자... 이렇게 네 명이었다. 그들 앞의 탁자 위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여러 음식들이 묘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조금 전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식기들이 부딪히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왼쪽 자리의 살찐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클리드 공작의 별장에 무단으로 침입하려했습니다. 그래서 공작의 사병들이 당신을 기절시키고, 별장의 지하감옥에 가둔 것이죠."
이어서 오른쪽 자리에 앉은 깡마른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놀랐습니다. 설마 여자의 몸으로 공작의 사병들을 그렇게까지 상대할 수 있을 줄은..."
"마치 옛날의 그녀를 보는 듯했죠, 안 그렇습니까?"
늙은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남자들은 일제히 큰 소리로 웃었다. 살찐 남자의 옆구리르 차지한 가는 눈의 남자가 얼마간의 웃음 뒤에 입을 열었다.
"이렇게 아가씨가 갇혀있는 것을 보니 마뇰 프랭크의 『늑대들의 수다』가 떠오르는군요. 수십 차례에 걸쳐 살인을 자행하는 미치광이 천재소녀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그녀도 결국에는 저 아가씨처럼 감옥에 갇혀 심문을 받게 되지요. 한 번쯤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물론입니다. 아직 문체는 정돈되지 않았지만 천재 특유의 재기가 넘치는 작품이었죠."
늙은 남자가 맞장구를 쳤다.
"그나저나 공작께서는 『늑대들의 수다』의 마지막 구절이 무슨 작품의 구절을 인용했는지 아십니까? '악마가 어디 씁쓸해서 악마인가? 설탕이 지나쳐서 악마일지니'였던 가요? 바로 레드루의 시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 마뇰 프랭크 또한 레드루의 신봉자 가운데 하나였답니다."
"오, 그랬습니까? 이거 송구스럽군요. 아직 읽은 서책의 양이 부족한 지라 전혀 몰랐답니다... 하긴 현대를 살아가는 작가들 중에 시의 별, 레드루의 맹신자가 아닌 자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이를테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작가인..."
"너희들은 누구냐?"
에밀리아는 간신히 목구멍에서 말을 토해냈다. 한창 늙은 남자와 대화에 열중하던 눈이 작은 남자는, 자신의 말이 끊긴 것이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을 잠시 지었지만 곧 다시 미소를 만들며 대답했다.
"그러고보니 소개하는 것을 잊고 있었군요. 저희들은 '로반트의 식도락가'들입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발소리에, 그는 눈을 떴다. 눈을 감았을 때와 다름 없는 어둠이 거기 펼쳐져 있었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어둠의 품안에서 시간을 살해해왔을까? 그는 잠시 날짜를 헤아려 봤지만, 이내 그만뒀다. 그에게 있어 날짜라든가, 시간이라든지 하는 것은 이미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글자를 조립해 빵을 만들어내는 자, 즉 작가였다. 그가 이 어둠이라는 괴물의 뱃속에 유폐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글줄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글을 미워할 수 없었다. 닳고 닳아 이제는 끊어질 듯한 생명의 끈을 그나마 지탱해주고 있는 것 또한 그의 글 덕분인 까닭이다. 시와 소설에 대한 추억 없이는, 이제 하루도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다가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를 이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곳에 가둔 자들, '로반트의 식도락가'라 스스로 칭하는 자들을 떠올렸다. 음식과 이야기를 무엇보다 사랑하는 미치광이들... 그들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 어둠에 갇히지 않아도 됐을 터였다. 어두운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는 빵 부스러기에 목숨을 기대지 않아도 됐을 터엿다.
그는 그 미식가들이 어째서 그를 지금껏 죽이지 않고 방치하고 있는지에 셀 수 없이 자문해왔다. 그리고 얼마 전에서야 그 질문의 대답을 찾아냈다. 그 두려운 결말에 이르는 단서를 준 것은, 최근에 들어서야 환각이 아니라 실재라는 것을 인식한 문 밖의 인기척이었다.
그 인기척이 처음 그를 방문한 것은, 그가 암흑의 방에 갇힌 지 몇 년이 흐른 뒤였다(고작 며칠이 흐른 뒤의 일지도 모른다. 그에게 이미 시간 관념이 사라졌다고 앞에서도 말했다). 그 정체불명의 인기척은 뚜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방문 앞까지 찾아왔다. 소리에 굶주려 있던 그는 반가움에 몸을 떨며 인기척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인기척은 한 마디의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다만 신경을 긁어대는 이상한 소리, '끼긱끼긱'거리는 소리만을 몇 시간동안 들려줄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발소리와 함께 저 멀리로 멀어져갔다.
인기척은 이후로도 가끔씩 그를 방문했다. 때로는 몇 일에 한 번, 때로는 몇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그 인기척은, 지금껏 그에게 단 한 마디도 말을 건네준 적이 없었다. 다만 끼긱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처음에 그는 그 소리가 환청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비록 환상일지라도, 완전한 침묵 속에 잠겨 있던 그에게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그것을 향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대부분은 그가 구상해왔던, 시와 소설들의 줄거리였다. 그리고 그 중에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로바나 에쥴로스』.
'[N]ovel소설 > 습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갑각나비 7. 로바나 엔쥴로스 -2 (0) | 2010.11.01 |
---|---|
갑각나비 6. 괄호 -4 (0) | 2010.10.30 |
갑각 나비 6. 괄호 -3 (0) | 2010.10.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