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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소설/습작

갑각나비 7. 로바나 엔쥴로스 -2


 "로반트의... 식도락가?"

 가는 눈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지요."

 그리고 과장된 몸짓으로 에밀리아에게 인사를 해 보였다.

 "저는 이 모임의 회장직을 맡고있는 로저 클리드 공작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당신이 클리드 공작인가? 당신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이 별장에 루..."

 에밀리아가 다급히 말했지만, 공작은 창살 앞으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아가씨의 용건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소개가 끝날 때까지 잠시만 말미를 주십시오.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는 다른 남자들을 흘긋 바라봤다. 기다렸다는 듯 남자들은 자신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말라서 눈이 움푹 들어가 보이는 남자가 먼저 인사를 해왔다.

 "반갑습니다. 저는 페즌 알바린이라고 합니다. 추기경의 직함을 가지고 있지요."

 너무 살이 쪄서 몸을 가누기도 불편해 보이는 남자가 이어서 말했다.

 "카이츠 바슈랭이라고 합니다. 조그마한 영지를 가지고 있는 후작입니다."

 마치 수 천년은 된 고목처럼 주름살이 잡혀있는 늙은 남자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저는 피터 덴버즈라고 합니다. 로반트 대학의 교수직을 역임하고 있지요."

 "이제 잘나가신 분들의 인사는 다 끝난 모양이군."

 에밀리아가 쏘아붙이듯 말하자,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유감스럽게도, 아직 한 분이 남아있습니다."

 공작은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추기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둠 저편으로 걸어나갔다. 얼마 후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깡마른 추기경이 뭔가를 앞세우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퀴가 달린 의자를 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자에 앉아있는 것은... 여자아이 였다.
 갓 열 살을 넘었을 듯한 앳된 모습의 아이였다. 인형처럼 아름답지만, 인형처럼 생기가 없는 얼굴을 가진 여자였다. 공작은 미소를 지으며 더욱 과장된 몸짓으로 그녀를 소개했다.

 "소개하겠습니다. 이 분이야말로 우리, '로반트의 식도락가'들의 주인이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왕이신... 로바나 엔쥴로스 님입니다!"



 로바나 엔쥴로스.
 시의 별이라 불리는 레드루의 연작시집, 『49마리』에 등장하는 49마리의 괴물들. 그들 중 마지막 49번째를 차지하고 있는 괴물이자,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왕을 일컫는 이름, 로바나 엔쥴로스.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이야기를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몸을 가진 그 거대한 괴물은, 세계라고 하는 길고 긴 이야기를 창조해냈다. 그가 보고 들으며 '먹을' 수 있는 가장 두꺼운 책을...
 그는 '방문 앞의 인기척'에게 들려준 이야기의 제목으로, 그 위대한 존재의 이름을 썼다. 물론 기분 탓이었을 테지만, 그 정체불명의 인기척도 제목을 들은 순간 가볍게 박수를 쳐준 듯 했다. 그는 들뜬 마음에 그 저주스러운 소설, 『로바나 엔쥴로스』를 장황하게 말해나갔다. 인기척이 사라졌을 때면, 언제나 소설의 다음 부분을 구상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처음 이야기를 시작한지 2년이 지난 뒤에야 그 소설은 끝을 맺었다.
 그는 『로바나 엔쥴로스』를 완성시킨 후, 성취감 가득한 목소리로 인기척에게 물었다. 내 이야기가 재미있었느냐, 재미없었느냐. 재미있었다면 어느 부분이 좋았느냐, 재미없었다면 어느 부분을 고쳐야 하겠느냐. 하지만 끼긱거리는 소리만이 계속 귀를 자극했다. 그가 거듭해서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문 건너편을 향해 외쳤다.
 뭐라고 말 좀 해봐, 이 빌어먹을 놈아! '끼긱끼긱.'
 염병할 소리 그만 내고 어서 말을 하라고! '끼긱끼긱.'
 제기랄! 지옥에나 가버려라, 개 같은 놈! '끼긱끼긱...'
 결국 인기척은 저주받을 소리만을 되풀이하다 사라졌고, 그는 머리를 땅바닥에 찧으며 흐느꼈다.
 그랬다. 차라리 그 때, 『로바나 엔쥴로스』의 결말을 인기척에게 들려준 직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아무 미련도 없이 행복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겁쟁이였던 그는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동안 어둠과 공포를, 그리고 환상일지도 모를 인기척을 벗삼은 채 떨고만 있었다.



 로바나 엔쥴로스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는, 입을 다문 채 초점이 흐린 눈빛으로 에밀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밀리아는 침을 한 번 삼킨 뒤 그녀를 유심히 살펴봤다. 그러다 문득 뭔가를 깨닫고 낮은 신음을 냈다. 소녀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자, 그럼 소개도 끝났고."

 공작이 침묵을 깼다.

 "이제 밤도 어지간히 무르익었으니, 슬슬 만찬을 시작해볼까요?"

 남자들의 얼굴에 기쁜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공작은 로바나 엔쥴로스를 노려보고 있는 에밀리아에게 말했다.

 "아가씨. 저희 로반트의 식도락가들은 매 년 겨울마다 회합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회합기간 동안 저녁마다 저희에게 위협을 가하려는 자나, 이야기를 꾸며내는 데 비상한 재주를 가진 자들을 만찬에 초대하지요. 하루에 두 명씩 말입니다."

 공작은 후작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뚱뚱한 후작은 기다렸다는 듯 공작의 말을 받아이었다.

 "초대받은 두 명은 이 지하식탁의 정면에 설치된 특수한 감옥 안에 감금됩니다. 아가씨와 아가씨의 옆 감옥에 갇혀 있는 그 아이처럼 말입니다."

 에밀리아는 급히 고개를 돌려 옆을 살펴봤다. 하지만 정면을 제외한 부분은 벽으로 막혀있었다. 벽 너머에 또 다른 누군가가 갇혀있는 것인가? 그녀가 좌우를 살피는 동안에도 후작의 말은 계속되었다.

 "수감된 두 손님들은 만찬이 진행되는 동안, 저희들을 위해 이야기를 각자 세 개씩 들려줘야 합니다. 만일 이를 거부하면 벌칙을 받게 되지요... 양 쪽 감옥에서 울려 퍼지는 여섯 개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저희는, 투표를 통해 두 손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줬는지를 가립니다. 이른바 이야기대결이라고 할 수 있죠. 여기서 패배한 자는 역시 벌칙을 받게 됩니다. 그 벌칙이라 함은..."

 "헛소리는 그만해라."

 에밀리아는 성난 표정으로 네 명의 남자들을 번갈아 노려봤다.

 "너희들의 한가로운 장난에 장단을 맞출 시간 따위는 없다. 당장 이 감옥 문을 열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라. 그렇지 않으면..."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공작의 입에서 갑자기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함성이라고 할 수도, 비명이라고 할 수도 없는 기괴한 음성이었다. 공작이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자 주위에 있던 나머지 식도락가들도 차례로 비슷한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다만 로바나 엔쥴로스만은 그 고함 속에서도 한 조각의 표정변화도 보이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공작은 소리를 멈추고, 당황한 표정의 에밀리아에게 말했다.

 "후작의 발언을 방해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아가씨. 아셨습니까? 조금 정도는 자신이 처한 입장을 이해하시란 말입니다."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지만, 에밀리아는 공작의 미소 뒤에 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공작은 후작을 향해 계속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벌칙에 관한 이야기를 할 차례였군요. 식사예절을 지키지 않은 자와, 이야기대결에 패배한 자에게, 우리 식도락가들은 벌칙을 내립니다. 그 벌칙은 다음 날 만찬의 식탁 위에 올라가는 것이지요."

 에밀리아의 반응이 곧바로 돌아오지 않자, 잠자코 있던 늙은 교수가 나섰다. 교수는 설명이 지나치게 추상적이라고 후작에게 핀잔을 준 뒤 주름살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이해가 안 되시나보군요, 아가씨. 그럼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음식들을 보십시오. 이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어제 이야기대결에서 패배한 자를 재료로, 저희가 요리를 만든 것입니다... 즉 지금 여기서 아가씨가 저희에게 이야기를 읊는 것을 거부하시거나, 이야기 대결에서 질 경우, 아가씨는 내일 저녁에 저희에게 잡아먹힌다는 것이죠."

 "뭐?"

 에밀리아는 신음인지 말인지 구분이 안 가는 음성을 내뱉고 말았다. 그렇다면 저 식탁 위의 낯선 음식들이...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깡마른 추기경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야기대결에서 승리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내일 만찬 때까지 목숨을 유지할 수 있어요. 물론 승리한 자는 다음 날 이야기대결에 참여해 새로운 도전자를 물리쳐야합니다. 다음날 승리하면 그 다음날도, 또 승리하면 그 다음 날도... 계속 새로운 이야기를 짜내어 상대방을 물리쳐야 합니다. 하지만 이기면 되는 겁니다. 온르 이 대결도, 그리고 내일 대결도, 그 다음날의 대결도 계속 이겨나가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에밀리아는 말문을 잃어버렸다. 대체 이 녀석들은 뭐지? 그녀의 가슴 속의 뭔가가 그 물음의 정답을 들려줬다. 그들은 미치광이들이었다.
 어서 여기서 탈출해야한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역시 검이 없었다. 검뿐만 아니라 그녀가 지니고 있떤 도구 일체가 손에 만져지지 않았다. 정신나간 미식가들은 그녀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킬킬대고 있었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공작은, 꾸민 듯한 몸짓과 어투로 에밀리아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아가씨와 싸울 상대는, 아직 잠의 요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듯 합니다. 자 그러니, 아가씨께서 먼저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그 탐스러운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입니다."

 "웃기지 마라. 누가 너희 같은 미치광이들 따위한테!"

 "거절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아가씨에게는 일단 벌칙을 내리고, 다음 이야기대결의 출전자로 아가씨의 동행 분을 모셔와야겠군요... 아가씨와 함께 이 별장에 찾아왔다는 그 귀여운 분 말씀입니다... 아아, 그 분도 아가씨만큼이나 먹음직스러웠지요... 아가씨가 저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지 않겠다면, 그 동행 분께 부탁하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그렇겠지요?"

 공작은 이를 드러내며 웃음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는 얼굴을 지었다. 에밀리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 사이에 피가 배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 주먹으로 벽을 한 번 후려쳤다. 수 만가지 욕지기가 입술 밖으로 튀어나갈 것을 열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욕설 대신,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한 마디를 내보냈다.

 "들려주지."

 로반트의 식도락가들은 박수와 환호성으로 그들의 이야기꾼을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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