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마법책인가 봐, 이거."
뭐가 재미있는지 티밀리아는 싱글거리고 있었다.
"하긴 보통 사람이 쓴 게 아니니 보통 책이 아닌 게 당연하지. 그러고 보면 엘로의 소설 중에도 마법책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어. 한 정신나간 마녀가 자신의 몸을 책으로 바꿨는데, 그 책에 놀라운 힘이 실려있어서..."
"레이즈 녀석...!"
티밀리아와 달리 에밀리아의 표정은 일그러짐에 가까웠다. 그녀는 거칠어진 숨결을 가다듬으며 상황을 정리해봤다. 분명 이 책에 적혀있는 것은 사라진 마을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지금 책의 마짐가 구절에는 자신과 티밀리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엘로는 그녀들이 이 마을에 오기 전에 이미 죽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책 자신이 스스로의 몸에서 잉크를 짜내 에밀리아와 티밀리아의 이름을 적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가능한 것은 물론 레이즈의 그 저주받을 쓰다듬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이다.
"너무 걱정하지마 언니. 아직 우리는 사라지지 않았잖아?"
에밀리아를 안심시키려는 듯 티밀리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에밀리아도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확실히 그랬다. 이름이 적혀 있는데도 그녀들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어째서? 에밀리아는 다시 책의 마지막 장을 봤다.
( 에밀리아)
( 티밀리아)
( )
차이점을 발견하기는 쉬웠다. 다른 이름들과는 달리 그녀들을 옭아매는 괄호 안에는 아직 성(姓)이 들어갈 여유가 남아 있었다. 왜 이름은 써있는데 성은 쓰여지지 않은 것일까? 어쩌면, 책이 혼자서 자신의 하얀 몸에 글을 새겨낼 수 있다면, 인간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게 납득이 갔다.
"이 책은 아직 우리의 성을 듣지 못 했어..."
"응? 뭐라고, 언니?"
"티밀리아."
"왜?"
에밀리아는 강한 어조로 티밀리아에게 말했다.
"이 시간 이후로 절대로 우리 성을 입에 담아선 안 돼. 알아들었어?"
"에? 왜?"
에밀리아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자신이 세운 가정을 티밀리아에게 들려줬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말하는 중간 중간에 책으로 눈이 가는 것은 그녀도 막을 수 없었다. 이야기를 들은 티밀리아는 알겠다고 말했다.
"끄리고 어서 여관으로 돌아가 떠날 준비를 하는 거다. '이 녀석'이 우리 성을 알아차리기 전에 말이야."
"아니, 그건 안 돼."
티밀리아가 단호히 말했다.
"이대로 가면 어떻게 해. 저 책을 저대로 놔두면 계속 피해자가 생겨날 거야."
"우리가 언제부터 남의 일 신경 쓸 정도로 한가해졌지, 티밀리아?"
"왜? 간단한 일이잖아? 이 책을 없애기만 하면..."
티밀리아는 언니에게서 책을 뺏어들어 마지막 페이지를 찢으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책장은 뜯어지지 않았다. 다른 페이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번에는 들고 있던 램프에 책장을 대봤다. 하지만 불은 붙지 않았다.
"마법책이군."
에밀리아가 내뱉듯 말했다.
"이제 알겠지? 그건 네 말대로 보통 책이 아냐. 우리 힘으로 없앨 수 없어."
"아, 아냐. 아직 방법이 있어. 여길 봐!"
티밀리아는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여기 써있잖아. '괄호 안에 쓰여진 것들을 생략하라. 그리고 마짐가 괄호 안을 채워 넣어라'라고 말이야. 이건 분명 마지막 괄호를 채워 넣으면 저주가 풀린다는 뜻일 거야. 봐? 여기 마지막 페이지도 우리 이름 밑에 빈 괄호가 있잖아? 여기에 해답을 적어 넣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래? 그럼 그 해답이 뭔데?"
"우... 그건... 이제부터 찾아봐야..."
"우리한테 그런 시간은 없어."
"금방 찾을 거야! 그리고 난 엘로가 쓴 책들은 거의 다 읽어봤으니까 금방 생각해낼 거라고... 응? 부탁이야, 언니이."
에밀리아는 혀를 찼다.
(티밀리아의 말대로 한다: #8로 가시오.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간다: #10으로 가시오)
#8.
에밀리아는 엘로의 시체를 방구석의 어둠 속으로 치워놓은 후 바닥에 주저앉았다. 티밀리아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런 언니를 껴안았다. 에밀리아는 그녀를 떨어트리며 빨리 생각이나 하라고 쏘아붙였다. 티밀리아도 언니처럼 땅에 앉아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얼마간을 생각하던 티밀리아가 입을 열었다.
"의외로 단순하지 않을까? 작가 본인의 이름을 적어 넣으면 된다든지?"
에밀리아는 유치한 발상이라고 생각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티밀리아는 엘로의 책상 위에서 펜을 하나 가져왔다. 그리고 '괄호'의 마지막 장을 펼쳐, 비어있는 괄호 안을 채웠다.
(엘로 세기아)
하지만 괄호가 채워지는 순간 에밀리아가 외쳤다.
"이런 바보! 성이 앞으로 나와야하는 거 잊었어?"
"아... 깜빡했다."
티밀리아는 배시시 웃었다. 동생의 멍청한 얼굴에 에밀리아는 천장을 우러르며 탄식했다.
"지우고 다시 쓰면 될 거야, 아마... 어라? 언니 이것 좀 봐."
동생의 부름에 에밀리아는 책을 봤다.
( )
분명 채워져 있어야할 괄호가 다시금 공백으로 변해 있었다.
"답이 아니면 저절로 지워지나봐. 편리한걸."
에밀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운이 좋았군. 이번엔 실수하지마."
"헤헷. 알았습니다."
티밀리아는 다시 한 번 또박또박 괄호 안에 글씨를 써넣었다.
(세기아 엘로)
둘은 긴장된 시선으로 괄호 안을 바라봤다. 한참을 그렇게 기다렸지만 이름과 괄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티밀리아는 깊은 숨을 몰아쉬며 시선을 책에서 떨어트렸다.
"맞은 걸까?"
티밀리아의 말에 에밀리아는 잠시 동생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책을 바라봤을 때 그녀는 경악했다. 괄호 안이 다시 공백으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티밀리아도 곧 그 빈 괄호를 보고 아쉬운 눈을 지었다.
"부끄럼이 많아서 우리가 보고 있으면 글을 지울 수 없나봐."
둘은 다시 팔짱을 끼고 여러 이름들을 궁리해봤다. 하지만 쉽사리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에밀리아가 괄호에 이름이 쓰여진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에 착안해 책이름인 '괄호'를 직접 적어 넣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다시 둘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티밀리아가 입을 뗐다.
"참, 그게 있었지!"
티밀리아는 방 바깥의 책 무더기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이윽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 티밀리아의 손에는 한 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뭐지?"
"헤헤헤."
티밀리아는 책을 에밀리아에게 보여줬다. 엘로의 시집, '이름'이었다.
"아까 말했잖아. 이 시집에 있는 시들은 전부 제목이 사람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고. 어쩌면 이 안에 답이 있을지도 몰라."
티밀리아는 언니에게 책을 건네고 이름을 하나씩 불러달라고 했다. 에밀리아는 시의 제목들을 훑어가며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줬다. 시의 제목으로 선택된 이름들은 다양했다. 과거의 영웅이나 황제들에서부터 예술가, 종교인, 심지어 소설 속 주인공들도 있었다. 물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름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수분에 걸쳐 시 제목 49개(이 안에 사람이 아닌 자, 메레도 포함되어 있었다)를 전부 적어봤지만 역시 책은 아무 대답 없이 자신의 몸을 새하얗게 닦아낼 뿐이었다. 둘은 완전히 지쳐 바닥에 누워 버렸다 .잠시 숨을 돌린 후 에밀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시 제목들 가운데 '엘로 세기아'란 이름은 없었군."
티밀리아는 누운 자세 그대로 힘없이 대답했다.
"응..."
"꽤나 자기 책에 자기 이름이 넣기 싫은가 보군... 분명 그 '활고' 책에도 세기아는 없었다고 했지?"
"응... 그랬어..."
둘 사이에 나른한 침묵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에밀리아가 몸을 짓누르는 적막을 떨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티밀리아는 깜짝 놀란 눈으로 언니를 바라봤다.
"왜 그래?"
"세기아... 없었다고?"
"응. 그게 왜?"
에밀리아는 '괄호' 책을 펼쳤다. 그리고 첫 페이지를 다시 읽어 '그 부분'을 거듭 확인했다. 틀림없었다. 그녀는 동생을 불렀다.
"티밀리아."
"왜?"
"다시 한 번 물어보자. 분명 세기아라는 성이 없었나?"
"그렇다니까 왜 자꾸 물어봐?"
약간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티밀리아가 대꾸했다.
"그럼 티밀리아..."
에밀리아가 복잡해진 머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엘로 세기아의 착한 아내는 지금 어디 있지?"
(#9로 가시오)
#9.
"아내?"
반문하는 티밀리아의 목소리는 약간 얼이 빠진 것처럼 들렸다.
"그래. 아내라면 분명 '세기아'란 성을 쓸텐데, 사라진 마을 사람들 명단에 그 성이 없다면 지금 그녀는 대체 어디 있다는 거지?"
"음... 글쎄? 벌써 죽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어째서 이 『괄호』책에 그 아내의 죽음에 대한 언급은 없지? 아내가 있다고는 써놓고 말야."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러네. 엘로의 아내는 어디 간걸까?"
에밀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괄호'의 첫 장을 읽었다. 흐린 램프의 불빛 때문에 눈이 침침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그 구절들을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뾰족한 실마리는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옆에서 티밀리아가 여러 가설들을 내는 것 같았지만 그녀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반응하지 않자 티밀리아는 푸념 섞인 말을 한숨처럼 늘어놨다.
"뭐야. 아까는 시간이 없다느니 어쨋느니 하더니 이젠 언니가 나보다 더 열심이네. 뚫어져라 그 마법책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말이야."
그 말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 중 한 단어만은 에밀리아의 귓구멍에 강렬히 박혔다.
마법책.
왜 그 단어에 그녀가 반응했는지는 그녀 자신도 몰랐다 .전혀 생소한 단어가 아니었다. 아까부터 티밀리아가 계속 입에 담았으며 에밀리아도 몇 번인가 입에 올린 기억이 있었다. 그런 것이 왜 지금 갑자기... 잠깐. 티밀리아가 마법책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했지? 에밀리아는 무심결에 티밀리아를 봤다.
"왜? 언니?"
멀뚱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티밀리아였다. 에밀리아는 동생의 얼굴을 보며 동생이 언급했던 '마법책'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긴 보통 사람이 쓴 게 아니니 보통 책이 아닌 게 당연하지. 그러고 보면 엘로의 소설 중에도 마법책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어. 한 정신나간 마녀가 자신의 몸을 책으로 바꿨는데, 그 책에 놀라운 힘이 실려있어서...'
에밀리아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떨리는 눈으로 '괄호'란 이름의 살아있는 마법책을 봤다. 참으로 기가 막힌 가설이었지만 그것 외에는 다른 답이 없었다. 에밀리아는 흔들리는 목소리로 동생에게 물었다.
"아내의 이름은 뭐지?"
티밀리아는 의아해했다. 엘로 세기아의 아내라면 시집 '이름'에 있었다며 적어봤자 소용없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거기에 세기아란 성은 없었지 않느냐고 에밀리아가 묻자 그녀는 성이 바뀌기 전의 이름으로 적혀 있어서 그럴 거라고 말했다. 에밀리아는 재차 물었다.
"성은 됐으니까, 그녀의 이름은 뭐지?"
티밀리아는 '이름'을 펼쳐 제목들 사이로 눈을 굴렸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그 이름을 찾아냈다.
로잔느.
에밀리아는 '괄호'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여전히 속을 비워놓은 괄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녀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그 하얀 살결 위에 글씨를 써나갔다. 마치 검은 피가 배어 나오듯 글씨가 책장 위에 새겨졌다.
(세기아 로잔느)
에밀리아는 숨을 죽이며 책장을 펼칠 채 책상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아까부터 힐끔힐끔 책을 바라보는 티밀리아에게 눈을 치우라고 말한 후 자신도 책에서 눈을 뗐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다시 책을, 괄호 안을 봤다.
(세기아 로잔느)
그대로였다. 긴장이 탁 풀어지는 느낌에 에밀리아는 다리가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티밀리아는 놀란 눈으로 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봐! 글씨가 사라지지 않았어!"
"알고있어..."
하지만 글씨가 사라지지 않는 것 이외의 어떤 변화도 책은 보여주지 않았다. 뭔가를 기대하던 티밀리아는 실망한 듯 보였다. 그녀는 이번엔 언니 쪽을 보며 대체 어떻게 답을 알았냐고 물었다. 에밀리아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말했다.
책 『괄호』는 엘로의 아내, 로잔느 세기아라고.
(#11로 가시오)
#10.
"여보, 식사예요."
로잔느가 말했지만 그녀의 남편인 엘로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계속 흔들의자에 앉아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에게서 왼팔을 치료받은 이후부터 계속 저런 상태였다. 밤이고 낮이고 엘로는 의자에만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여보, 이제 일어나요. 뭐라도 좀 드셔야 해요."
로잔느는 엘로의 부활한 손을 잡았다. 그러자 엘로가 고개를 돌렸다.
"로잔느..."
"왜 그러세요?"
"기억하고... 있소? 내가 예전에 썼던 소설, '야수의 책'을."
"물론이죠. 당신이 쓴 책은 모두 수십 번씩 읽었으니까. 분명 마녀가 나와서 자신의 몸에 저주를 거는 내용이었죠? 그리고 그 마녀의 몸이 책으로 변해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는..."
"기억해 주었군...."
엘로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뭔가 이상한 웃음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엘로는 말했다.
"나는 이제 곧 죽는다오."
"...네?"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죽기 전에 뭔가를 남기지 않으면 안 돼. 뭔가를. 그래서 말인데... 부탁이 있어. 할 수만 있다면 내가 하고 싶지만, 나에겐 무리야. 마'녀'가 아니면 안되거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여보?"
"로잔느, 내 사랑스런 아내여... 날 위해 괄호가 되어 줘. 이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을 모두 집어삼킬 만큼 커다란 괄호가..."
로잔느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곧 엘로의 왼손에 의해 가려졌다. 그녀의 귓전에 뼈가 꺾이고 피가 역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녀는.
(#0으로 가시오)
#11.
말을 마친 에밀리아는 옆으로 눈길을 줬다. 어둠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엘로의 모습을 어렴풋하게나마 윤곽 잡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에밀리아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곳은 왼쪽이었다.
에밀리아는 『괄호』책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는 잠시 괄호 안의 '세기아 로잔느'를 바라본 후 책을 덮었다. 그 때 무슨 소리가 들렸다. 에밀리아는 티밀리아를 향해 물었다.
"무슨 소리 못 들었어? 마치."
여자 비명 소리 같은.
티밀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에밀리아는 알 수 없는 야릇한 기분에 잠겼다. 그녀는 다시 책을 펼쳤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은 이름과 괄호로 빼곡하던 책장들에는 이제 공백만이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책장을 넘겼지만 어디에도 글씨는 존재하지 않았다. '괄호' 안에 쓰여진 것들은 생략되어졌다.
"어쨌든 끝난 것 같은데?"
뒤에서 티밀리아가 말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돌아가자, 언니."
에밀리아는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그리고 동생과 함꼐 엘로의 집에서 나왔다.
(#14로 가시오)
#12.
에밀리아와 티밀리아는 다시 거리로 나섰다. 거리에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위에 안개가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안개에 그녀들은 앞을 조심하며 걸어 나갔다.
"왠지 이상한 안개네."
티밀리아가 말했다. 확실히 이상한 안개라고 에밀리아도 생각했다. 뭔가 어긋나 있는 안개였다.
"아, 언니. 저기 누가 오고 있어!"
티밀리아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에밀리아가 보자 티밀리아의 말대로 안개 너머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 그림자는 흐느적거리면서도 놀랄 정도의 속력을 내며 그녀들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그 그림자의 모습이 그녀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둘의 눈이 커졌다.
앞에 서있는 사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남성이었다. 부드러운 금발과 녹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티밀리아였다.
"쿠...드?"
에밀리아도 순간 그 녀석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눈앞의 남자는 그녀석과 꼭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신장이나 체격이 그 녀석에 비해 더욱 발달되어 있었다. 그리고 눈매와 입가에도 가느다랗게나마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 녀석이 아니라면 남는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 그 녀석과 같은 이름과 얼굴의 남자.
"아버지냐!"
에밀리아는 이를 들어냈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있음에도, 눈앞의 그것이 환각임을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중에 그녀의 손이 칼자루로 향했다. 눈앞의 마버지는 그런 딸의 모습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아...버지?"
에밀리아의 뒤에서 티밀리아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밀리아는 외쳤다.
"환각이다! 속지마, 티밀리아!"
그녀답지 않은 고함이었지만 티밀리아의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티밀리아는 기쁨이 가득 담긴 얼굴을 하며 아버지를 향해 달려나갔다.
"멈춰, 티밀리아!"
에밀리아가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마치 뭔가가 발목을 잡는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온 힘을 다해봐도 소용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아버지와 티밀리아를 봤다. 아버지는 양팔을 벌려 달려오는 티밀리아를 맞이했다. 티밀리아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사랑스러운 티밀리아..."
목소리는 너무나도 달콤했다. 진짜 아버지의 그것처럼.
"우리 가문의 성이 뭔지 말해보지 않으련?"
에밀리아는 외쳤다.
"그 녀석에게 말하지 마, 티밀리아!"
에밀리아가 있는 힘을 다해 외쳤찌만 티밀리아에게 닿지 않았다. 티밀리아는 황홀한 얼굴로 아름다운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루비온."
아버지의 웃음이 깊어지고 에밀리아의 찡그림도 깊어졌다.
"고맙구나. 티밀리아 루비온, 그리고 에밀리아 루비온."
아버지는 품에 안고 있던 티밀리아를 밀어냈다. 그리고 희뿌연 안개와 함께 어디론가 번져나가 버렸다. 덕분에 티밀리아는 땅으로 팽개쳐졌다.
"티밀리아!"
에밀리아는 발을 뗐다. 이제서야 움직이 수 있게 된 모양이다. 그녀는 티밀리아에게 다가갔다. 티밀리아는 웃고 있었다.
"헤헷, 언니 이것 봐라."
그녀는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하반신을 가리켰다. 에밀리아의 심장이 콱하는 비명을 질렀다. 티밀리아의 다리가 연기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우릴 데려가려고 왔나봐."
에밀리아는 쓰디쓴 신음을 내며 동생을 안아줬다. 동생을 안는 그녀의 팔에서도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뭐라고 입을 벙긋거렸지만 성대가 사라져서 뭐라고 말하는지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티밀리아는 에밀리아의 품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다음은 에밀리아의 차례였다. 에밀리아는 지친 얼굴에서 몇 줄기의 연기가 뻗어 나왔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분명 아무 것도 없는데도 그녀는 마치 누군가가 있는 양 그곳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이 열리고 마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제 어디로 가야되지?"
어쩐지 오른뺨이 아파 오는 그녀였다.
( )
#13.
에밀리아는 신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봤다. 어제의 그 여관방이었다. 옆 침대에서 티밀리아가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에밀리아는 자신의 오른뺨에 손을 댔다.
"꿈이었나."
그녀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 내렸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생생한 꿈이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문 커튼을 걷었다 .엷은 안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잠시 안개에 가려진 마을을 바라보다 티밀리아의 침대로 다가갔다. 그녀의 이불을 걷으며 에밀리아는 말했다.
"일어나, 티밀리아."
"으응.... 졸려..."
"장난치지 말고 말로 할 때 일어나는 게 좋아, 티밀리아."
"...네."
티밀리아는 눈을 반짝거리며 웃어 보였다.
"나 잠깨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언니?"
"보면 알아."
"어디를 보면 아는데?"
"아무튼 보면 알아. 빨리 나갈 준비나 해. 빨리 장을 본 다음 떠나야하니까."
"알았어, 알았어."
티밀리아는 기지개를 크게 키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12로 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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