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바나 엔쥴로스』 사건 이후, 그는 변해갔다. 눈빛은 날이 갈수록 방안의 어둠과 비슷한 빛깔로 탁해졌고, 그 대신에 청력이 무서우리 만치 예민해졌다. 그의 귀에는 이제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작은 소리들이 들려왔다. 쥐들이 그가 먹다 남긴 빵 부스러기를 갉아먹는 소리, 다리가 수천 개는 달렸을 법한 벌레들이 기어가는 소리, 그리고 자신의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는 소리... 모든 소리가 그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소리들 중에서도 특히, 이름 없는 인기척이 내뿜는, 그 '끼긱끼긱'대는 소리가 가장 참을 수 없었다. 그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그는 살점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기분을 맛봤다. 고함을 질러 소리가 귓전에 맴도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도 해봤다. 하지만 그의 목만 부어 터질 따름이었다.
그는 이제 인기척에게 말을 건네면서도, 무슨 말을 건네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어려서 부모님께 꾸중을 들었을 때의 이야기를 하는가 싶으면, 어느 새 처음 여자를 안았을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시인 누구누구가 위대하다는 말을 하다가도, 갑자기 북쪽 지방의 희귀한 약초들에 대한 것들을 두서없이 지껄였다. 그리고 언제나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벙어리 인기척을 향한 저주와 욕설이 따라왔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이번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2음절 단어들을 주문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후기, 태엽, 사전, 금속, 식물, 괄호 같은 것들을 말이다. 그가 어째서 그런 단어들을 말했는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에밀리아는 살점을 씹고, 뼛조각을 오물거리고 있는 식도락가들에게 세 개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미식가들은 만찬 도중에 무릎을 치거나, 한숨을 내쉬어 가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에밀리아의 이야기는 여행 도중 그녀가 만난 기괴하고 불행한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태엽을 감는 소년의 이야기였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일그러진 기대를 두려워한 소년은, 결국 마음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운명을 지워버린다.
두 번째 이야기는 달이 금속으로 되어있다고 믿는 수도사와, 얼음으로 되어있다고 주장하는 이단 심문관의 싸움에 관한 이야기였다. 둘은 오랜 논쟁 끝에 서로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
마지막 세 번째 이야기는 양팔을 잃고 절망에 빠진 한 작가의 이야기였다. 작가는 자신의 아내를 제물로 바쳐 커다란 괄호를 만들어내고, 모든 사람들을 그 안에 가두려했지만 결국 실패한다...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식도락가들은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박수를 쳤다. 그리고 에밀리아의 이야기들을 각자 품평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였습니다, 아가씨."
후작이 열렬한 박수와 함께 말했다. 하지만 퀭한 눈의 추기경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길거리의 술주정뱅이들이나 허풍선이들이 지껄여대는 이야기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세계의 진실이나,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담겨진 이야기가 아니라, 단순히 청중들의 눈과 귀를 현혹할 뿐인 질 낮은 이야기들의 모음이 아닙니까?"
늙은 교수는 그런 추기경에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추기경. 이야기의 본질은 재미가 아니겠습니까? 듣는 이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 이야기이지, 그 이외에 더 무엇이 필요하단 말씀입니까?
"하지만 저 아가씨의 이야기에는 그 재미라는 측면도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첫 번째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자, 토론은 그쯤 하도록 하죠."
공작이 가볍게 박수를 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어차피 대결의 승자를 가리기 직전에 토론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토론은 또 다른 손님 분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에 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마침 그 두 번째 분도 잠에서 깨어나신 듯 하군요."
미식가들의 시선이 에밀리아의 옆으로 쏠렸다. 에밀리아도 그들을 따라 시선을 돌렸지만 벽만 보였다.
공작이 에밀리아의 옆방에 있는 자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저희를 위해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작은 신사 분?"
역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식도락가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것을 보니, 옆방의 손님은 그 말도 안 되는 요구에 고개를 끋거인 모양이었다.
"그럼 계속 이야기대결을 진행하겠습니다, 여러분."
공작이 양팔을 벌리고 선언했다.
"그나저나... 이번 음유시인 분은 정말로 귀엽군요."
"특히 저 녹색 눈동자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가 없어지는군요. 과연 어떤 맛일까요?"
네 명의 남자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에밀리아는 천천히 그들을 살펴봤다. 뭔가 이상했다. 단순히 아름다운 것을 접했을 때의 흥분만으로는, 인간의 눈빛이 저렇게 변할 수는 없었다. 저렇게 선명한 녹색으로 변할리가 없었다.
옆방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부드러운 음성은 에밀리아가 잘 알고 있는 자의 것이었다.
쿠드.
그렇게 그의 정신이 망가져 가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인기척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고, 끼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 날은 뭔가 틀렸다. 그 지옥의 소음 이외의, 또 다른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소리가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들려왔지만, 너무나 작아서 귀에 담을 수 없던 소리였다. 악마처럼 예민해진 그의 귀가 그 소리를 잡아낸 것이다.
'사락사락사락...'
그것은 그의 기억 속에도 분명히 있는 소리였다. 그는 흩어져버린 기억을 가다듬으며 그 소리에 집중했다.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끼기긱 사락 끼기기기기긱 사락.'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른 뒤였다.
'찌익.'
귀가 멍해질 정도로 큰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단 한 번밖에 들리지 않았찌만, 그는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글을 쓰던 시절 수도 없이 들었던, 종이를 찢어발기는 소리였다. 그는 드디어 수수꼐끼의 인기척과 소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사락거리는 소리는 바로 종이를 넘길 때 나는 소리였다.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그의 뇌를 갉아먹어 온 끼긱대는 그 소리는, 아아, 펜이 종이 위에서 춤을 출때 나는 그 불협화음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제야 '로반트의 식도락가'들이, 이야기와 음식을 미친듯이 좋아하는 그들이,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서서히 광기로 치닫는 그의 정신상태를 관찰해보고 싶어한 것이다. 인간을 오래도록 어둠안에 가둬놓으면 어떤 행동을 보일 것인가, 작가를 오래도록 침묵 속에 처박아 놓으면 무슨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것인가가 궁금해진 것이다. 그래서 말수가 적은 서기(書記)를 보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계속 기록해온 것이다. 그의 고독, 그의 절규, 그의 작품, 그의 『로바나 엔쥴로스』... 그의 모든 것을 서서히 읽어내고, 잡아먹어 왔던 것이다. 마치 이야기를 잡아먹는 괴물 로바나 엔쥴로스처럼...
인기척이 떠나가고, 더 이상 끼긱거리는 소리느 들려오지 않았다. 그 대신 네 명의 남자들이 그의 알몸을 바라보며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자살을 결심했다. 며칠 후 인기척이 다시 찾아오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쿠드는 남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줬다. 로반트의 식도락가들은 식사를 즐기는 것도 잊은 채 녹색 눈을 반짝이며 쿠드의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에밀리아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반대쪽으로 시선을 옮겼찌만, 귀까지 옮길 수는 없었다. 지하에 울려 퍼지는 쿠드의 이야기는, 한 마리의 괴물에 관한 것이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한 도서고나 사서가 주인공이었다.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사서에게, 어느 날 한 마리의 괴물이 찾아온다. 괴물은 사서의 왼팔과, 도서관의 사전 한 권을 훔쳐 달아난다. 사서는 공포와 쾌감에 빠져 기억을 잃고 미쳐버린다.
두 번째 이야기는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였다.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던 남자는, 불길한 숲에 정착한 뒤, 그곳에서 사랑하는 그녀를 닮은 이상한 식물을 재배한다. 하지만 그 식물은 여자가 아닌, 남자 자신의 모습으로 자라났다. 남자는 결국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의 뱃속에 스스로 들어간다. 기르던 식물의 씨앗을 손에 쥔 채로.
두 번째 이야기가 끝나자 얼마간 쿠드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식도락가들이 어서 다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재촉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한 시간 가량이나 지나서야, 쿠드의 세 번째 이야기가 들려왔다.
어둠과 절망 속에 갇혀 있는 한 작가가, 사람을 잡아 먹는 괴물과 조우한다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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