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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소설/습작

갑각나비 6. 괄호 -1


 "친애하는 재판장님. 다시 한 번 말씀드리거니와 본인은 엘로 씨의 시집, 『이름』이 명백한 이단 젖가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여기 이 시, '메레'의 이 구절에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하늘은 (날개 빛 젖꿀이 흐르며 땅은) 추악한 피오줌으로 넘쳐나누나'라는 구절입니다. 만일 엘로 씨가 진정 저 하늘의 완전함과 땅의 미완을 표현하려한 것이라면 어째서 이 부분에 괄호를 썼겠습니까. 한 번 괄호 안의 글들을 생략해서 읽어보십시오. '하늘은 추악한 피오줌으로 넘쳐나는구나'라고 됩니다. 이 추악한 시의 진의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다른 구절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얼핏 신을 찬미하는 듯 보이지만, 괄호 안의 글자들을 생략하면 정반대로 신과 하늘을 모독하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엘로 씨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저작을 통해 신을 기만하고, 하늘을 우롱했습니다. 마땅히 성스러운 심판의 칼날로 그 죄를 물어야할 것입니다. 엘로 씨. 당신은 여기에 대해 어떻게 변명하시겠습니까?"

 나는 대답했다.

 "그건 그저 장난이었을 뿐입니다."

                                                                          엘로 세기아, 『집행 전날 쓰는 자서전』중에서



 #0.
 도르첼 마을은 대륙의 중앙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마을 사람들 사이에 유대도 깊고 거리에 활기도 넘치는 마을이었다. 날씨는 그리 사납지 않아 먹고사는데 큰 붎편도 없었는데, 특히 보리 농사가 잘 이뤄져 이 마을에서 나는 맥주는 대륙에서 손꼽히는 맛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처럼 평화로운 도르첼 마을에 잿빛 암운이 드리워진 것은 그 사람, 엘로 세기아가 마을에 돌아온 다음부터였다. 엘로는 본래 이 마을 출신이었지만 문학에 뜻을 두고 당시 최고의 언어학자라 불리던 로반트 대학의 교수 잉갈로드 마이어의 제자로 들어가기 위해 황도 로반트로 가게된다. 하지만 잉갈로드와 여러면에서 맞지 않았던 엘로는 급기야 대학을 그만두고 로반트에 머물며 저급의 시와 소설을 써내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갔다. 그런 와중에 심각할 정도의 자기혐오에 빠진 그는 결국, 그의 표현을 빌려 표현하자면, 20년에 걸쳐 가슴에 뭉쳐있던 것을 토해내게 된다. 그 토사물이 바로 시집 『이름』이었다. 그의 시집 『이름』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게 되고 급기야 종교 재판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재판정에서까지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던 엘로는 결국 유죄로 인정되어 벌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참혹한 형벌로 인해 작가 생명을 잃어버린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고향에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3년이 흘렀다. 도르첼 마을은 여전히 평화로웠고, 엘로도 자신의 최후를 영접하듯 초췌해진 모습으로 매일같이 흔들의자에 앉아 흔들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허름한 집 한 채와 착한 아내뿐이었다. 그러던 그에게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서 잃어버렸던 것을 돌려 받은 엘로는, 다시 펜을 잡았다. 그리고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휘갈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쓰여진 것이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책, 『괄호』이다.
 이 책은 자신의 예술과 빛을 이해해주지 않은 세상에 대한 엘로가 남기는 최후의 복수이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현명한 독자들이여, 여러분들이 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그 복수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를 필자는 간절히 기원하는 바이다. 가엾은 도르첼 마을 사람들처럼 되(지 않)기를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려는 그대 독자들을 위해 최후의 충고를 하겠다.
 괄호 안에 쓰여진 것들을 생략하라. 그리고 마지막 괄호 안을 채워 넣어라. 그렇지 ㅇ낳으면 그대로 그대들이 생략되리라.

 (#1로 가시오)



 #1.
 새벽 안개가 짙게 깔린 늦가을의 길이었다. 대지를 흐린 빛으로 지배하고 있긴 했지만 이윽고 태양이 뜨면 사라질 것이기에 그런지 허공에 몸을 풀고있는 안개의 모습은 어딘지 애처로웠다. 하지만 이런 감상도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나 할 법한 것이었다. 에밀리아와 티밀리아 자매처럼 걸음을 재촉해야하는 여행자들에게 안개는 반길 수 없는 손님이었다. 둘도 이미 밤을 샌 강행군에 몸도 마음도 피곤에 깊이 담겨 있었다. 거기에 시야를 가리면서 체온까지 낮추는 안개의 존재는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다. 서둘러 몸을 누일만한 곳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둘 중 앞장을 서서 걷는 것은 역시 언니인 에밀리아였다. 그녀 역시 여행 경험이 풍부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끊임없는 불평과 투정으로 시종 여행을 방해하는 동생 티밀리아보다는 훨씬 더 여행에 적극적이었다. 에밀리아는 눈을 가늘게 집중해 안개 너머의 것들을 가늠해가며 걷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에 반해 뒤따라오는 티밀리아는 상당히 시끄러웠다.

 "아직 멀었어, 언니이?"

 티밀리아의 늘어지는 말에 에밀리아는 들리지 않는 한숨을 쉬었다. 동생이 저렇게 늘어지는 말투를 쓸데면 언제나 불평 불만이 시작된다는 것을 언니인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입을 다물기만 하면 더 골치 아픈 투덜거림이 돌아올 게 뻔했다.

 "이제 곧 도착할 거다."

 "몇 시간 전부터 그 소리만 하고 있잖아... 난 졸려어... 밤새 걸었더니 몸도 쑤시고. 거기다 안개는 왜이리 짙어? 그러게 그냥 노숙이라도 하지 왜 강행군을 해서 이 고생이야아아...."

 에밀리아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늦으면 안 된다고 밤새 걷자던 건 너였잖아."

 티밀리아가 대꾸했다.

 "더 이상 늦으면 안 된다고 겁을 줬던 건 언니잖아."

 입을 비죽거리는 동생의 모습에 언니는 눈살을 찌푸렸다. 티밀리아는 언니와 눈을 맞추지 않으려는 듯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는 하늘을 향해 시선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불평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발에 물집이 생겼다느니 다리가 휘어졌다느니 하는 말로 시작해서, 온몸이 딱딱해진 여자를 남자는 좋아하지 않으니 쉬고 가자는 말로 이어졌다. 에밀리아가 대답하지 않자 티밀리아는 비꼬듯 말했다.

 "하긴 언니는 이미 온몸이 근육질이니 더 딱딱해질 걱정은 없겠지만."

 에밀리아의 걸음이 멈었다.

 "티밀리아."

 그 말에 티밀리아는 정신을 바짝 조이고 조심스레 언니를 바라봤다. 언니가 자신의 이름을 저런 어조로 부를 때면 언제나 무서운 질타와 지루한 설교가 이어진다는 것을 동생인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에밀리아의 입술 사이로 날카롭게 새어 나오는 것은 동생을 향한 통렬한 질책과 설교였다. 에밀리아는 누구 때문에 밤을 새면서까지 겆지 않으면 안되었는지를 논리 정연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서 설교를 하는 와중에도 그녀의 걸음만큼은 계속 앞을 향해 가고 있었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지만 그렇다고 멍하니 쳐다볼 수만은 없었기에 티밀리아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었다. 에밀리아의 말은 이어졌다.

 "...더해볼까? 따지고 들면 그 늦음의 8할 이상이 티밀리아 네 덕분이었어. 지도를 수 차례나 잘못 봐서 빈번히 길을 잃는 것은 악의가 없었으니(한 두 번 정도는 일부러 한 것 같지만) 넘어간다 해도 여관의 음식 맛이 좋다는 이유로 꾀병을 부려서 삼일이나 지체하게 만든 것이나 마을 뒷산의 일출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루 더 묵자고 때를 쓴 일들은 정말이지..."

 "하, 하지만 그때는!"

 뭔가 변명을 하려고 고개를 든 티밀리아의 눈이 커졌다.

 "...마을이다."

 동생의 말에 에밀리아는 고개를 다시 원위치 시켰다. 희뿌연 안개 뒤로 마을의 그림자가 희멀겋게 드리워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티밀리아는 좀 전까지의 풀죽은 기세는 어디 갔는지 깡충대는 걸음으로 마을을 향했다. 에밀리아는 속도의 변화를 주지 않은 채 그 뒤를 따랐다. 그녀가 마을 입구에 닿자 마을의 이름이 적혀있는 푯말이 땅에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기에 에밀리아는 눈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때맞춰 들려온 동생의 부름에 다시 허리를 펴 동생이 부르는 곳을 향했다. 그러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안개가 엷게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푯말에 적힌 마을의 이름도 보이기 시작했다.

 '도르첼'

 (#2로 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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