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마을에 들어서서 얼마간을 걷자 티밀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며 서있었다.
"무슨 일이야?"
티밀리아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본 후 말했다.
"없어."
"뭐가 없다는 거지?"
에밀리아도 고개를 좌우로 돌려봤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마을의 전모가 드러나고 있었다. 크진 않았지만 아담하게 지어진 벽돌집들이 보였다. 마구간 안에서 말들의 여물 보채는 힝힝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어디선가 개가 짓는 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여느 마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한 가지만 제외하고는.
"사람이 없군..."
그제야 에밀리아도 눈치를 챘다. 아무리 이른 아침에 안개가 자욱하다해도 사람 한 두 명정도는 눈에 띄어야할 것이다. 하지만 둘러봐도 사람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단지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들만이 여기에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평소때 같았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려 했겠지만 시간이 없었다. 에밀리아는 일단 여관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여관의 프론트에도 허공만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아침식사를 드는 손님들로 차 있어야할 식탁들도 하나같이 비어있었다. 에밀리아가 몇 번 소리를 질러 봤지만 아무 대꾸도 없었다.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에밀리아는 뒤따라온 티밀리아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말한 후 여관의 주방으로 들어갔다. 일단 상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아직 칼로 다듬어지지 않은 야채들은 신선하기까지는 아니었지만 아직 먹을만한 수준이었다. 바구니에 담겨진 밀빵들도 아직 구워질 때의 그 흰 속내를 간직한 채였다. 그녀는 빵에 코를 대고 킁킁대봤다. 구워낸 지 하루나 이틀 정도 지난 듯 했다. 그녀는 빵 바구니와 치즈, 포도주 한 병을 들고 티밀리아가 있는 곳으로 가져갔다. 식사는 순식간에 이뤄졌다. 배가 어느 정도 부른 후에야 티밀리아가 입을 열었다.
"근데 이 마을 어떻게 된 거지, 언니?"
빨리도 질문하는군. 그렇게 생각하며 에밀리아는 빵을 한 입 물었다.
"글쎄."
언니의 관심 없다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지 티밀리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무슨 대답이 그래? 보통 이런 상황이 되면 놀라고 당황하는 게 보통 사람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너도 별로 놀라고 당황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은데?"
"우... 지금 놀라고 있잖아."
에밀리아는 콧소리를 한 번 내고 빵을 입으로 우겨 넣었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쓸 필요 없어. 분명 무슨 축제나 의식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전부 어디론가 간 거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마을을 텅 비워 놓는 건 이상하지 않아? 혹시 이건 우리를 꾀어내려는 함정이 아닐까? 사실 이 빵들에는 전부 수면제가 들어있어서, 우리가 잠든 다음에 숨어있던 마을 사람들이 나타나 우릴 밧줄로 묶는 거야. 그리고 미모의 나는 농락하고, 근육질의 언니는 마을의 일꾼으로 평생부리는..."
"젖비린내 나는 너를 농락하려고 여자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 전체가 매복한다고?"
"누가 젖비린내야!"
"누가 근육질이지, 티밀리아?"
묘하게 날카로운 언니의 말에 티밀리아는 입을 다물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다 먹었으면 빨리 위에 올라가서 자둬. 며칠간 제대로 못 쉬었으니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거다."
"자, 잠깐? 언니 제정신이야? 이런 상황에 잠을 자라니."
"내가 옆에 있을 거니까 안심하고 자."
하지만 티밀리아는 막무가내였다.
"난 안 잘 거야.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기 전에는 한숨도 안 잘 거니까."
티밀리아가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에밀리아는 머리를 긁적였다.
(처음 생각한대로 지금은 자둔다: #3으로 가시오.
티밀리아의 말에 따라 마을을 조사해본다: #5로 가시오)
#3.
침대 위에 누워서까지도 티밀리아의 볼은 불러질 대로 불러져 있었다. 옆 침대에 앉아 칼날을 손질하던 에밀리아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서 자라. 내일 또 피곤하다고 말하지 말고."
"하지만!"
"눈감아, 티밀리아."
티밀리아는 뭐라고 꿍얼대긴 했지만 언니의 말대로 눈은 감았다. 에밀리아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본 후 다시 칼날을 살폈다. 다음으로 그녀는 짐을 살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식료품과 길므은 보충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필요한 것들을 머리 속으로 정리한 그녀는 그제서야 침대에 누웠다. 그녀의 곁에는 장검이 놓여져 있었다.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문이 열리면 큰 소리가 나게 장치를 해두긴 했지만 그래도 최악의 사태는 대비해야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말하긴 했지만 식사 때 티밀리아가 한 말이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럴 때 루자라면 어떻게 했을까.
에밀리아는 낮게 혀를 찼다. 그녀는 검을 거칠게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얼마간을 그렇게 있는데 티밀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자?"
에밀리아는 눈을 뜨지 않고 대답했다.
"또 무슨 일이야?"
"언니... 우리 정말 따라잡을 수 있을까?"
평소와는 틀린 티밀리아의 목소리였다.
"나 때문에 며칠이나 허비해버렸고... 언니 혼자였다면 가볍게 따라 잡았을 텐데... 미안해, 언니."
쓸데 없는 소릴. 에밀리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만 자. 그들은 반드시 따라잡고 말 테니까. 지금 자두면 꼭 따라잡을 수 있어."
마치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말투였지만 이게 동생에게 가장 잘 통한다는 것을 언니는 알고 있었다. 역시 티밀리아의 밝아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알았어... 헤헤, 나 언니 너무 좋아. 첫번째는 아니지만..."
"티밀리아."
"헤헷, 알았어. 자면 되지? 잘 자, 언니."
티밀리아의 말이 멎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에밀리아는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그녀는 천장을 바라보며 동생이 한 말을 되뇌었다.
첫번째는 아니지만...
에밀리아는 자신 앞에 누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난 건 해가 저물어 가는 저녁 때였다. 그녀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그녀에게 달라붙은 마지막 피곤을 떨궈냈다. 고개를 돌리니 옆 침대의 티밀리아는 아직도 세상 모르게 잠에 취해 있었다. 에밀리아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잠든 사이에 문이 열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 그녀가 호기심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해도 이 상황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고 있는 티밀리아를 놓고 밖으로 나갈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티밀리아를 깨워서 함께 마을을 돌아본다: #4로 가시오.
그냥 계속 잠을 잔다: #13으로 가시오)
#4.
"티밀리아."
에밀리아는 누워있는 동생을 흔들어 깨웠다. 티밀리아는 몇 번 몸부림 친 후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게슴츠레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 언니? 잘 잤어?"
"난 지금부터 이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러 간다."
"후암... 뭐? 나도 같이가!"
정말 예측하기 쉬운 성격이라고 생각하며 에밀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티밀리아는 빠른 움직임으로 옷매무새와 머리칼을 가다듬고 나갈 준비를 완료했다. 아래층은 램프가 켜져 있지 않아 어둑어둑했다. 에밀리아는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티밀리아의 손을 잡아줬다. 그러자 동생이 어둠 속에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밀리아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바깥 거리는 아침과 마찬가지로 한산했다. 단지 바람 소리와 마구간 말들의 배고픔에 겨운 울음소리만 들릴 따름이었다. 그녀들은 먼저 맞은 편에 있는 '제레스의 잡화점'에 들렀다. 그곳에도 사람의 모습은 없었다. 에밀리아는 여관에서 가져온 램프에 불을 밝혔다. 여관에서도 그랬지만 이곳의 식료품들 상태는 아직까지 양호했다. 아무래도 마을 사람들이 사라진 것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티밀리아는 생각에 잠겨있는 언니에게 잡화들을 챙겨가자고 제안했고 에밀리아는 건조한 시선으로 그 제안을 묵살했다. 이윽고 에밀리아는 시무룩해진 티밀리아를 잡아끌며 마을 곳곳을 돌아봤지만 어디에도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티밀리아가 말했다.
"거 봐. 아무도 없잖아. 그냥 가져 와도 된다니까 그래... 언닌 정말 겁쟁이라니깐!"
에밀리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5로 가시오)
#5.
에밀리아와 티밀리아는 여관에서 나온 이후 줄곧 여러 가게들, 심지어 가정집들까지 찾아가 봤지만 어디에도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무슨 단서가 될만한 것들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이상 걸어서 체력을 줄이는 것은 낭비라고 판단한 에밀리아는 티밀리아에게 돌아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티밀리아는 말했다.
"으응. 아직 저 위에 가보지 않았잖아."
티밀리아의 가는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은 마을에서 조금 외진 곳에 있는 언ㄷ거이었다. 그리고 그 언덕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집 한 채가 쓸쓸히 서잇었다.
"저기만 가보고 돌아가자, 응? 제발."
이상할 정도로 간곡한 부탁이었다. 아까 이 마을의 이름이 '도르첼'이라는 것을 확인한 이후부터 티밀리아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동생의 박력에 에밀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티밀리아는 웃으며 그 집을 향해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에밀리아도 그 뒤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어느 정도 가늠은 했지만 역시나 그다지 크지 않은 집이었다. 하지만 약간 허름하다는 점만 빼면 보통 집들과 다를 바가 없는 집이었다. 어째서 티밀리아가 그렇게 이 집을 둘러보고 싶어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아, 역시 그랬어!"
집안에서 티밀리아의 기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밀리아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 집에는 온통 책들뿐이었다. 마치 도서관을 연상시킬 정도로 많은 책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티밀리아는 그 책드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다가 웃으며 말했다.
"언니! 역시 내 짐작이 맞았어. 여기는 엘로 세기아의 집이야!"
에밀리아는 한 조각의 표정변화도 없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이름이군. 그게 누군데?"
티밀리아가 한 대 맞은 얼굴로 언니를 바라봤다.
"아니 엘로 세기아를 모라? 형식 파괴의 시인 엘로 세기아를? 그 사람의 시집 『이름』이 얼마나 멋진 책인데... 물론 그 전 것들도 재밌긴 했지만 『이름』에 미치진 못해. 그 시집에는 49개의 시들이 있는데, 그 49라는 숫자와 형식 파괴적 운율 등으로 미뤄 볼 때 레드루의 『49마리』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거라 생각되는 작품이지. 49개의 시제목이 전부 살마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게 특징이야. 단 하나 예외가 '메레'인데 바로 이 시 때문에 그가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거든. 종교 재판 이후 고향인 도르첼에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설마 직접 보게 되다니..."
"티밀리아."
에밀리아가 나지막한 소리를 냈다. 티밀리아는 고개를 들어 언니를 바라봤다. 에밀리아는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티밀리아가 입을 다물자 정적이 밀려왔다. 그 정적 뒤로 작지만 분명한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에밀리아는 소리를 죽이며 삐걱거림의 근원을 찾아 몸을 움직였다. 소리가 나는 곳은 어느 방문 뒤였다. 그녀는 칼자루를 잡았다. 문이 열리자 흔들의자 하나가 보였다. 어두운데다 뒤로 향해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의자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의자는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봐."
에밀리아가 말을 걸어봤지만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허리춤에 검을 끌렀다. 그리고 칼집에 담아 놓은 채로 멀리서 등을 쿡쿡 찔러봤다. 몇 번인가 찌르자 갑자기 의자에 앉아있는 자의 몸이 흔들렸다. 그러더니 아무 힘도 없는 모양으로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피골이 상접해 있는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마치 무서운 것이라도 본 양 커다랗게 부릅떠져 있는 눈과 부서질 정도로 굳게 다물어져 있는 입. 거기에는 일말의 움직임도 없었다. 에밀리아는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가 손가락을 목줄기에 대봤다. 고동은 없었다.
"죽었군."
뒤에서 티밀리아의 목소리가 다가왔다.
"서... 설마 엘로 세기아야?"
"글쎄."
"잠깐 비켜봐."
티밀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사체를 찬찬히 살피고는 긴소매에 덮여 있는 양팔에 손을 대었다. 왼쪽에는 내용물이 들어있었지만 오른쪽은 아니었다. 티밀리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휴, 아닌가봐."
"어떻게 알지?"
"엘로는 시집 『이름』때문에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거든. 그는 거기서 유죄 판결을 받고 '잔누베의 형'을 당했단 말이야."
"이상한 이름이군. 그건 또 뭔데?"
"아이 참, 언니는 그것도 몰라? 잔누베는 날개의 서에 나오는 사악한 이단의 마법사야. 요사스러운 손재주로 살마들을 현혹하다 메레의 노여움을 사서 양팔을 잃게 되지. 거기서 따온 이단처벌 중 하나야. 손으로 인한 불경죄를 범한 이단자의 양팔을 자르는 거지. 그래서 내가 만져본 거야. 그런데 이 사람은 양 팔 중에 오른쪽 팔만 없잖아? 그러니까 엘로 세기아가 아닌 거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에밀리아는 웃지 않았다.
"티밀리아."
"응? 왜?"
"우리가 지금 누구를 쫓고 있는지 잊었나?"
"무슨 소리야? 내가 그걸 잊을 리가 없잖아? 집사인 루자 언니랑, 귀여운 쿠드랑, 그리고..."
말을 잇는 티밀리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부활의 왼손 레이즈 님..."
(#6으로 가시오)
#6.
에밀리아는 손을 뻗어 부릅뜬 사내의 눈을 감겨줬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남자의 배 아래에 뭔가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다시 허리를 숙여 시체를 뒤로 넘겼다. 그러자 한 권의 얇은 책이 나타났다. 에밀리아는 손을 가져갔지만 티밀리아의 손놀미이 더 빨랐다. 에밀리아가 살짝 얼굴을 일그러트렸지만 티밀리아의 모든 정신은 책에 쏠려 있었다.
"분명 이건 엘로 세기아의 유작일 거야."
그녀는 램프를 책상 위에 올려 놓고 그 곁에서 책의 겉표지를 읽었다.
"그러니까... 괄... 호. 이 책의 이름은 『괄호』인가 봐, 언니."
들뜬 얼굴로 티밀리아는 첫 페이지를 펼쳐 읽었다. 그런데 책을 쭉 읽어 내려가던 티밀리아의 표정이 조금씩 이상해졌다.
"언니 이것 좀 봐봐."
책에 눈을 고정시킨 채로 티밀리아가 말했다. 에밀리아는 동생의 곁으로 다가가 책을 봤다. 거기에는 휘갈겨진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도르첼 마을은 대륙의 중앙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망르 사람들 사이에 유대도 깊고 거리에 활기도 넘치는 마을이었다. 날씨는 그리 사납지 않아 먹고사는데 큰 불편도 없었는데, 특히 보리 농사가 잘 이뤄져 이 마을에서 나는 맥주는 대륙에서 손꼽히는 맛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처럼 평화로운 도르첼 마을에 잿빛 암운이 드리워진 것은 그 사람, 엘로 세기아가 마을에 돌아온 다음부터였다. 엘로는 본래 이 마을 출신이었지만 문학에 뜻을 두고 당시 최고의 언어학자라 불리던 로반트 대학의 교수 잉갈로드 마이어의 제자로 들어가기 위해 황도 로반트로 가게 된다. 하지만 잉갈로드와 여러면에서 맞지 않았던 엘로는 급기야 대학을 그만두고 로반트에 머물며 저급의 시와 소설을 써내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갔다. 그런 와중에 심각할 정도의 자기혐오에 빠진 그는 결국, 그의 표현을 빌려 표현하자면, 20년에 걸쳐 가슴에 뭉쳐있던 것을 토해내게 된다. 그 토사물이 바로 시집 『이름』이었다. 그의 시집 『이름』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게 되고 급기야 종교 재판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재판정에서 까지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던 엘로는 결국 유죄로 인정되어 벌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참혹한 형벌로 인해 작가 생명을 잃어버린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고향에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3년이 흘렀다. 도르첼 마을은 여전히 평화로웠고, 엘로도 자신의 최후를 영접하듯 초췌해진 모습으로 매일같이 흔들의자에 앉아 흔들거리만 하고 있었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허름한 집 한 채와 착한 아내뿐이었다. 그러던 그에게 한 남자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서 잃어버렸던 것을 돌려 받은 엘로는, 다시 펜을 잡았다. 그리고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휘갈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쓰여진 것이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책, 『괄호』이다.
이 책은 자신의 예술과 빛을 이해해주지 않은 세상에 대한 엘로가 남기는 최후의 복수이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현명한 독자들이여, 여러분들이 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그 복수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를 필자는 간절히 기원하는 바이다. 가엾은 도르첼 마을 사람들처럼 되(지 않)기를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려는 그대 독자들을 위해 최후의 충고를 하겠다.
괄호 안에 쓰여진 것들을 생략하라. 그리고 마지막 괄호 안을 채워 넣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들이 생략되리라."
"...레이즈로군."
'한 남자'라는 구절에 눈을 겨누며 에밀리아가 중얼거렸다. 티밀리아도 책장을 둟어져라 보며 말했다.
"정말 이상한 책이야... 엘로가 쓴 것 같기는 한데 마치 자기 일이 아닌 남의 일처럼 썼잖아. 거기다 '도르첼 마을 사람들처럼'이라느니 '최후의 복수'라느니... 아무래도 이 책이 마을 사람들이 없어진 거랑 관계가 있는 것 같지 않아? 분명 세상에 원한이 많았던 엘로가 레이즈 씨한테 힘을 받아서 마을 사람들을 사라지게 한 걸 거야. 그게 아니고서야 마을 사람들이 이렇게 전부 사라져 버릴 수는 없잖아?"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확실히 마을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이런 글을 남기고, 또 유일하게(비록 시체이긴 하지만) 육신이 보존되어 있다는 점을 볼 때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엘로였다. 거기다 그는 레이즈에게 잃어버린 왼팔을 돌려 받지 않았는가. 무슨 정신나간 짓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에밀리아 언니."
에밀리아의 상념을 티밀리아가 불러 깼다. 그녀는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언니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에밀리아는 다시 책을 봤다. 티밀리아가 다음 장을 넘긴 듯 거기에는 좀 전과 다른 것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 적혀 있는 것은 괄호였다. 수많은 괄호들이 한 줄에 하나씩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괄호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은 두 덩이의 고유 명사들이었다.
(겔포드 제피)
(갈론 게르메)
(네밀카르 로만)
.
.
.
"이름...?"
에밀리아는 티밀리아에게 책을 건네 받은 뒤 넘겨봤다. 다음 장, 그 다음장에도 있는 것은 '이름'뿐이었다. 그 이름들은 특이하게도 이름이 아니라 성이 먼저 쓰여져 있는 것 같았다. 그것과, 맨 첫 페이지의 저주 섞인 글귀만 제외한다면, 여관의 숙박부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그러다 문득 한 이름이 에밀리아의 눈에 띄었다.
(제레스 조이)
(제레스 레나)
어디선가 접한 기억이 있는 이름이었다. 분명 마을 안을 조사할 때 들렸던 잡화점의 이름이 "제레스의 잡화점"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마도 잡화점 주인과 아내의 이름일 것이다. 그에 미루어 에밀리아는 어렵지 않게 나머지 이름들의 출처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이름이군..."
티밀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 이유를 물었다. 에밀리아가 설명해 주자 티밀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어 책을 달라는 시늉을 했다. 에밀리아는 책을 건넸다. 티밀리아는 진지한 얼굴로 책장을 넘겼다. 엄라간을 넘겨본 후에 그녀는 말했다.
"마을 사람들 중에서도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것 같아. 아무리 찾아봐도 '세기아'란 성(姓)은 보이질 않거든."
동생의 말에 에밀리아는 발치에 쓰러져 있던 엘로의 시체를 봤다. 확실히 엘로는 죽긴 했지만 적어도 사라지진 않았다. 티밀리아의 날카로움에 에밀리아는 내심 감탄했다.
그때 파락거리며 책장을 넘기던 티밀리아의 손이 갑자기 멎었다. 그녀는 책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언니. 큰일 났어."
"왜?"
티밀리아가 책을 펼친 채로 에밀리아에게 건넸다. 펼쳐진 곳은 책의 마지막 장이었다. 거기에는 앞장들과 다를 게 없이 처음 듣는 이름들만 쭉 적혀있었다. 에밀리아는 별 생각 없이 그것들을 읽어나갔다. 그러다가 그녀는 봤다. 책의 마짐가 세 줄을.
( 에밀리아)
( 티밀리아)
( )
그녀에게서 끊어질 듯 가는 신음이 스며 나왔다.
(#7로 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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