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ovel소설/습작

폴라리스 랩소디 1 pp 13~21

 "이것 좀 보시겠어요?"
 율리아나 공주는 <하나뿐인 신으로부터 인정받은 법황의 가호가 함께하는 카밀카르의 율법 수호 책임자>(간단히 말해서 법무대신)에게 몇 장의 종이로 된 리포트를 건네었다. 라스 카밀카르 법무대신은 점잖은 동작으로 리포트를 받아들었고, 다른 손으로 기품 있는 동작으로 외눈 안경을 착용했다.

 자유:1) 타인에게 구속되거나 얽매이지 않은 채 마음대로 하는 것. 2) 극악무도한 해적이자 제국의 공적 제1호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의 불측한 해적 함대의 사악한 기함의 함명. 전장 250피트, 3단 갤리어스, 승선원 450명, 대포 50문 탑재. 이 사악에 물든 배의 피겨헤드에는 필마온 기사단, 사트로니아 공화국 해양청, 레갈루스 왕국 선주연합이 각자 2천만 데리우스씩의 자금을 출자하여 공탁한 6천만 데리우스의 현상금이 걸려 있다. 이 현상금은 제국 수도 란셀의 제국 공탁소에 보관중이며 제국인과 비제국인을 구분하지 않고 자유호의 피겨헤드를 가져오는 자에게 지급되도록 되어 있다. 이 사악에 물든 배의 건조는...... (『제국백과사전』7권 220쪽에서 발췌)

 복수:1) 해를 입은 본인이나 그 친척, 혹은 친구들이 똑같은 방법으로 가해자에게 해를 돌려주는 행위. 2) 극악무도한 해적이자 제국의 공적 제1호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이 소지한 명검의 이름. 크기는 대략 4피트로 추정. 무게는 알 수 없음. 일설에 의하면 타락한 엘핀 장인에 의해 벼려졌다고 하나 확인된 바 없다. 놀라운 세공과 믿을 수 없는 강도, 예리함을 자랑한다. 다케온 백작 네그리파 다케온이 다케온 지방 전체의 다이아몬드 채굴권을 대가로 구입을 희망하였으나 키 드레이번이 <그렇게 싼 가격으로는 팔지 않는다>고 대답한 일화는 유명하다. 수많은 선장과 제독의 피를 마셔온 이 명검 <복수>는...... (『제국백과사전』2권 105쪽에서 발췌)

 해류 : 바닷물의 흐름. 다종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야기되는 해수의 운동 중 비교적 긴 주기에 걸쳐 대규모로 일어나는 해수의 운동을 가리켜 해류라고 부른다. 극악무도한 해적이자 제국의 공적 제1호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이 저술한 『해양학입문』을 보면 해류란...... (『제국백과사전』14권 329쪽에서 발췌)

 라스 법무대신은 그만 킬킬거리고 말았다. 덕분에 외눈 안경이 떨어졌지만, 다행히도 그것은 대신의 무릎 위에 걸쳐졌다. 라스 법무대신은 키들거리며 외눈 안경을 주워 올렸고, 그런 법무대신을 보던 율리아나 공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건 편집증이에요. 그렇죠?"
 "하하하. 편집증이라. 예.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요. 공주님. 그런데 이런 리포트는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이 배에 『제국백과사전』이 실려 있지도 않을 텐데."
 "『제국백과사전』이라면 저의ㅡ짐에 있어요."
 율리아나 공주는 하마터면 혼수품이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늙은 대신은 무심하게 말함으로써 젊은 공주의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공주님의 혼수품에요? 아니, 궁인들이 백과사전을 포함시켰을 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제가 포함시키라고 말했어요."
 "공주님께서요?"
 "예. 아무래도 검독수리의 성채에 서책 같은 것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요. 그 외진 곳에서 책 구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고. 그래서 즐겨 보는 책 몇 권을 골라서 싣게 했어요."
 "몇 권이나?"
 "얼마 되지 않아요. 한ㅡ" 그리고 공주가 천역덕스럽게 말한 숫자는 법무대신을 질겁하게 만들었다. "1,200권 정도?"
 라스 법무대신은 잠시 신음을 토했다. 1,200권이라고? 법무대신은 고개를 돌려 배가 가라앉는 징후가 없는지 살펴보고는 입을 열었다.
 "엘리엇 선장에게는 말씀하셨죠?"
 율리아나 공주는 다시 어깨를 으쓱였고 라스 법무대신을 정신적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좋지 않은데. 뱃사람들에게 이상한 버릇을 배운 것 같군.
 "아무리 선장님이라고 해도 레이디의 소지품에 대해 궁금해하실 권한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라스 법무대신은 이번에는 실제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독수리의 성채에 도달할 때까지 배가 가라안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그리고 라스 법무대신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들어올렸다.
 제국력 1024년, 남해가 청자색으로 물드는 화창한 봄날이었다.
 세 척의 카밀카르 갤리어스로 이루어진 카밀카르의 선단은 청자색 바다 위로 유유히 흰 선을 그리고 있었다. 기함 레보스의 뱃머리에 부딪히는 파도는 희디흰 찬미로 바뀌어 남청색의 바다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율리아나 공주와 라스 카밀카르 법무대신은 레보스의 선상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은 채 한가로운 오후와, 바다와, 차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셋 중 어느 것에도 특별히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한가로운 티 타임이다. 이 항해에 있어야 할 엄숙함을 생각해 본다면 좀 지나친 한가로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햇살이 노곤한 봄날의 바다 위에서 이 항해의 목적을 되풀이 상기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항해의 목적은 제국의 정치 관계, 혹은 제국의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율리아나 카밀카르 공주는 필마온 기사단의 기사단장 발도 로네스와 결혼하기 위해 필마온 섬에 소재한 검독수리의 성채로 향하고 있었다. 율리아나 공주는 시니컬한 농담 삼아 이 항해를 <불가사리와 갈매기를 하객 삼아 이루어지는 가장 긴 신부 입장> 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시리어스한 농담을 하고 싶을 때는 율리아나 공주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다. 해운국인 카밀카르는 남해를 주름잡는 필마온 기사단에 막대한 뇌물을 줄 필요가 있다고 결정했고, 따라서 뇌물을 보내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그녀가 필마온으로 가는 것이다. 신부는 따라가면 뇌물도 혼수품으로 둔갑하는 법이니까.
 "그건 너무 비참한 해석이군요. 공주님."
 신부측 입회인이자 보호자로서 배 위에 동승했던 라스 카밀카르 법무대신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율리아나 공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럼 이 배에 가득한 선물들은 다 뭔가요? 그건 누가 보더라도 혼수품이라기보다는 뇌물이라고 할 거예요. 함대 돛으로 써도 될 만큼 실려 있는 자마쉬 비단, 배의 바닥짐으로 써도 될만큼 실려 있는 다케온 다이아몬드, 아, 그래요, 특별 화물실에는 싱잉 플로라도 실려 있더군요. 그건 도스 계곡에서만 나는 거 아니었어요? 아주, 아주, 아주, 한번만 더 할게요, 아주 비싼 꽃."
 "아니, 특별 화물실에 어떻게 들어가셨습니까?"
 "들어간 적 없는데요."
 "그럼?"
 "예? 당연히 노래를 들었죠. 슬픈 노래였어요. 싱잉 플로라는 무서워하고 있는 거 같더군요. 하긴 제가 꽃이라고 해도 이런 바다에 나오게 되면 무서울 거예요. 아무리 멋진 화분에 심겨있다 해도 꽃은 땅에서 자라야 되는 것 아닐까요."
 "노래요?"
 "그럼요. 싱잉 플로라가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뭐가...... 이상한 건가요?"
 율리아나 공주는 고개를 갸웃하며 법무대신을 바라보았다. 법무대신은 눈살을 잔뜩 일그러트리고 있었던 것이다.
 "공주님. 정말 들으셨습니까?"
 "그럼요."
 "싱잉 플로라가 노래 부른다는 것이야 이상할 것이 없지만, 공주님께서 싱잉 플로라의 노래를 들었다는 것은 퍽 이상하군요.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는 남자에게만 들립니다. 그래서 그 곷의 다른 이름이 템프테이셔너입니다."
 "네?"
 율리아나 공주는 동그래진 눈으로 라스 법무대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하지만 제게는 들렸어요. 이런 노래였어요."
 율리아나 공주는 눈을 감고 허밍을 시작했다.
 낮고 부드러운 허밍이었다. 늙은 법무대신은 순간 등골을 스치고 지나가는 전율을 느꼈다. 공주가 부르는 허밍은 깊은 밤이면 특별 화물실에서 새어나오는 싱잉 플로라의 낮은 노랫소리와 똑같았다.
 배에 오른 이후 법무대신은 자주 잠을 설쳤다. 그 자신은 익숙하지 못한 배의 흔들림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익숙지 못한 배의 침대에 누워 뒤척일 때마다 귓가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는 법무대신에게 애잔한 슬픔과 에로틱한 환상을 보내주었다.
 대륙 9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도스 계곡에서만 자라나는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가 법무대신의 늙은 몸에 일으키는 반응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마법사 하이낙스는 평생 동안 어떤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고 오로지 한 떨기 싱잉 플로라만을 사랑했다고 한다. 라스도 이제는 그 전설을 믿을 수 있었다.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에 침대 속을 뒤척이면서 법무대신은 자신의 주책없음에 어쩔 줄 몰라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노랫소리가 여자에게는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했다. 어쨋든 어린 신부에게 권할 만한 노래는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 안도감이 무너지고 있었다. 공주의 허밍을 듣던 법무대신은 자신의 얼굴이 지나치게 붉어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말했다.
 "아, 예. 알겠습니다. 그만하셔도 됩니다. 그런 허밍은 천한 광대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예? 하지만 예브고 슬픈 노래였어요. 천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걸요."
 "그렇더라도 일국의 공주께서 허밍 같은 것에 관심을 두실 필요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성스러운 결혼식을 앞둔 신부시라면 몸가짐이 좀더 단정해야 할 겝니다."
  "네......"
 율리아나 공주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어쨌든 허밍을 중단했다. 라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싶었지만 그런 행동은 적절치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라스는 차게 식은 찻잔을 들어올렸다. 공주는 다시 아까의 화제를 들먹였다.
 "어쨌든, 그렇게 비싼 꽃까지 실려 있다는 것은 제 주장의 좋은 증거가 될 거예요. 저는 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책은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율리아나 공주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라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명석한 율리아나 공주는 곧 라스의 말 속에 숨은 의미를 찾아내었다.
 "법무대신님! 저는 책의 내용을 좋아하는 것이지, 책갈피에 꽃을 끼우기 위해 책을 들고 다니는 것은 아니에요."
 "하하. 농담이었습니다."
 꽃보관첩으로 이용하기 위해 비싼 책을 구매하곤 하는 귀족가의 영애들에 견주어 공주를 놀렸던 라스는 웃으며 사과했다. 율리아나 공주는 턱을 조금 들어올렸다가 다시 내리며 말했다.
 "그리고 발도 로네스 기사단장이 화훼 애호가라는 말은 듣지 못했어요. 그 꽃을 실은 것은 그것이 비싸기 때문이겠죠. 저는 뇌물에 혼수품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기 위해 따라가는 거라고요."
 "공주님. 정말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공주님은 대륙에서 손꼽히는......"
 율리아나 공주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훗! 손꼽히는 미인이라고요? 제가 공주가 아니라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말을 마친 율리아나 공주는 놀라버렸다. 라스 법무대신은 그야말로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물론입니다. 필마온 기사단 따위의 해적 녀석들에게는 너무도 아까운 미인이십니다."
 바다 위이기 때문이다. 라스 법무대신은 자신의 말에 스스로 놀라며 황급히 그런 변명거리를 찾았다. 육지와 단절된 바다 위이기 때문에 이렇게 주책없는 말도 꺼낼 수 있는 것이겠지. 게다가 밤마다 들어온 싱잉 플로라의 그 고약한 노래도  원인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조카이기도 한 공주 앞에서 이 무슨 망발일까. 아아, 라스여. 너는 나이를 헛 먹었나 보구나.
 율리아나 공주 역시 삼촌인 법무대신에게서 이토록 원색적인 칭찬을 듣고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말았다. 잠시 대화는 무거운 정적에게 자리를 내줬고, 두 사람은 찻잔을 테이블에 올렸다 내려놓았다 하는 일에 열중했다. 한참 후 율리아나 공주는 다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싱잉 플로라도 필마온 기사단에게는 아까워요."
 "하긴, 그렇습니다."
 "정말...... 혼수품이 너무 많고 너무 비싸요. 저를 혼수품에 끼워 팔려 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당연해요. 라스 님? 제가 방금 무슨 생각 했는지 아세요?"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율리아나 공주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그라면  이런 배는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을 거예요."
 "그라니오?"
 "사전을 바꾼 사나이.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
 라스 법무대신은 공주의 말에 맞장구를 쳐줄 수 없었다. 바로 그 때 세 개의 마스트 위에서 길게 꼬리를 끄는 독특한 고함 소리가 동시다발로 들려왔던 것이다.
 "세일호ㅡ!"
 "세일호ㅡ!"
 마스트 위의 감시대에 있던 선원들이었다. 라스 법무대신이 고개를 돌리자, 멀리 이물 쪽에 있던 갑판장이 두 손을 입에 모으고 고함 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어디? 종류가 뭐야?"
 "이물, 바람 불어가는 쪽 1마일! 종류는......"
 까마득한 감시대 위에서 들려오던 선원들의 목소리가 느닷없이 침묵했다. 라스 법무대신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올렸지만 마스트 위의 선원들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갑판장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재촉했다.
 "감시대! 이봐, 감시원! 뭐야?"
 갑판을 오가던 선원들도 발걸음을 멈추고는 의아한 얼굴로 마스트 위를 올려다보았다. 갑판장의 재촉이 있고서도 한참 지난 후, 마스트 위에서 숨막히는 비명이 들려왔다.
 "오, 신이여! 자유, 자유호! 노스윈드다앗!"
 라스 법무대신은 경악으로 부릅뜬 눈으로 마스트 위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곳에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채 하얗게 질려 있는 율리아나 공주의 얼굴이 있었다.

 

'[N]ovel소설 > 습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의 경계 上 pp 1~24.  (0) 2010.02.26
마술사 -가제- 2  (0) 2010.01.28
마술사 1  (4) 2009.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