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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소설/습작

폴라리스 랩소디 1 pp 242~260

 파킨슨 신부가 율리아나와 오스발을 데려간 교회 안쪽의 수도원은 너저분한 예배당과는 달리 깨끗하고 단정했다. 파킨슨 신부는 화재가 이곳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오스발은 아무 말 없었지만 율리아나는 이상한 것을 느꼈다. 신부가 내놓은 찻잔을 들어올리며 율리아나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신부님? 복사Acolyte도 한 명 보이지 않는군요?"
 "하하, 여기 있잖습니까. 제가 바로 테리얼레이드 교회의 복사며 부제이고 사제며 골디란 교구의 주교인 셈이죠."
 율리아나는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어머. 혼자서 이 교회를 담당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저 혼자서도 공주님의 귀환을 충분히 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이 된다고요, 라는 말을 꺼내는 대신, 율리아나는 찻잔을 들어올려 우울한 얼굴을 감추었다.
 파킨슨 신부의 말은 사실 그 자체였다. 그는 테리얼레이드 교회의 하나뿐인 사제였으며 다른 신부를 만나보기 위해선 말을 타고 며칠을 달려가야 되는 상황에서는 주교나 다름없었다. 펠라론의 법황청은 무법 도시 테리얼레이드 주민들을 대상으로 포교 활동에 정진하는 파킨슨 신부의 노력을 높이 사서 테리얼레이드 교회를 정식으로 인정했지만 그 외의 다른 지원은 하지 않았다. 율리아나 공주와 오스발은 아연한 기분으로 서로를 바라보았고, 그들의 얼굴을 보며 파킨슨 신부는 히죽 웃었다.
 "저는 원래 선교사였지요. 이곳에 찾아든 것을 우연이라고 부르셔도 좋고 신의 섭리라고 하셔도 좋습니다만 어쨌든 전 이곳에 왔고 이 도시의 사람들이 성전보다는 단검을, 주님의 이름보다는 대마법사 하이낙스의 이름을 더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법황청에 문의해 보고서 테리얼레이드에 교회를 건설할 계획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스스로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죠."
 율리아나는 참으로 고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의 말을 대충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파킨슨 신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공주님. 죄송합니다. 제 이야기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군요. 공주님께서는 이 무법 도시의 하나뿐인 신부가 과연 어떻게 공주님을 도울 수 있을지 심히 걱정되시겠군요."
 "교회 안에서 거짓말은 못하겠군요. 솔직히 걱정됩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래 보여도 신의 사도입니다. 아, 그렇군요. 제가 재미있는 것 하나 보여드릴까요?"
 두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파킨슨 신부는 두 팔을 천천히 구부렸다. 잠시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을 바라보던 파킨슨 신부는 갑자기 흡!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손을 앞으로 뻗었고 조금 전까지 비어 있던 신부의 두 손에 육중하고 투박해 보이는 단검들이 들려 있는 것을 본 율리아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뒤로 홱 젖혔다. 하지만 파킨슨 시부는 미소 지으며 단검을 쥔 두 손을 옆으로 벌렸다.
 "제가 이 도시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운 기술입니다. 겨드랑이 부분에 틈을 내고 등에 찬 단검을 넣었다 뺐다 하는 이 기술은 이 도시에서는 어릴 때부터 배우는 기술이지만, 저는 성인이 되어 손이 이미 굳어버렸던지라 익히기 퍽 힘들었습니다. 어쨌든 신부의 손에 단검은 어울리지 않죠?"
 파킨슨 신부는 싱긋 웃으며 다시 팔짱을 꼈다. 다시 앞으로 나온 두 손은 조금 전처럼 비어 있었다. 율리아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칼날이 사라진 겨드랑이 쪽을 유심히 보았지만 아무런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따. 율리아나는 무의식중에 질문했다.
 "사람을 찌른 적도 있나요?"
 파킨슨 신부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그리고 질문을 꺼낸 다음에야 자신이 어떤 질문을 한 건지 알아차린 공주는 화들짝 놀라서는 파킨슨 신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파킨슨 신부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혼자말처럼 대답했다.
 "글쎄요. 주님 앞에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모호한 대답밖에 할 수 없군요."
 "아, 신부님. 저, 그러니까 제 말은, 아니, 전 단지 궁금해서 아무 생각 없이......"
 "괜찮습니다. 공주님. 누구나 할 수 있는 질문이지요. 어쨌든 저는 이 도시에서 10년 가까이 살아왔습니다. 신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무수한 삶의 테크닉들을 배워 익히면서요. 하지만 신학교에서 배운 정신은 아직 잃지 않았습니다. 고난에 빠진 자를 돕는 정신도 그 중 하나겠지요."
 무슨 말을 하려던 율리아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신부님을 믿겠습니다."


 "아깐 정말 놀랐어요. 신부님의 손에 그런 단검이라니. 카밀카르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만일 어떤 신부님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신도들에게 목격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글쎄요. 어쩌면 유황 냄새 풍기는 이야기가 오가게 될지도 모르지요." 
 율리아나와 오스발은 테리얼레이드 교회 내의 수도원 안에서 쉬고 있었다. 이 또한 다른 교회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파킨슨 신부는 아무 거리낌 없이 세속인인 그들을 수도원에서 쉬도록 했다. 물론 바깥의 무법 천지보다는 수도원 내에서 공주를 보호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긴 했지만. 율리아나의 말을 듣던 오스발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율리아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유황 냄새...... 악마 말씀이군요. 악마의 사역, 악마의 유혹."
 "물론 내가 그걸 말한 것은 맞아요. 하지만 당신은 너무 쉽게 그 참렬(차마 볼 수가 없을 만큼 비참하고 끔찍하다)한 이름을 입에 담는군요?"
 질린 얼굴로 말하는 율리아나를 보며 오스발은 빙긋 웃었다.
 "용서하시길. 천한 노예는 단지 천하다는 이유만으로도 대악마 나으리들의 관심거리는 되지 않겠지요."
 "그럴까요?"
 농담처럼 말하던 오스발은 율리아나 공주의 진지한 표정에 놀랐다.
 "예?"
 "그 사악한 존재가 사람이 정한 신분 차이를 인정할까요? 어쩄든 그가 사람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그가 사람이 정한 규칙을 따르고 싶어하지도 않을 것 같은데요."
 "글쎼요."
 "저는 정말이지 그 사악한 존재에 비교될 만한 사람을 봤어요.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 그자의 흉포(성질이 흉악하고 포악하다)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그가 나를 라오코네스에게 바치려고 했던 것 기억하죠? 그때 키는 나를 오로지 객체로만 대우했어요. 내 꿈, 내 희망, 하다못해 내 신분 등 나를 구성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정말 철저하게 무관심한 채 오로지 내 용모, 여성으로서의 내 용모에만 관심을 뒀어요. 게다가 그것은 남성으로서 여성에게 가질 수 있는 그런 관심도 아니었쬬. 그는 드래곤에게 바칠 제물로서만 나를 평가했던 거였어요. 그렇죠?
 오스발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나는 차근차근히 말했다.
 "그렇게 사람을 구성하는 모든 사람적인 것들을 싹 무시해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고 이용하는 모습은 오히려 사람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에요. 나는 언제든지 키 드레이번을 ㅡ주여, 용서하소서ㅡ악마라고 말하겠지만 그때 나는 사악하다거나 못됐다는 의미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럼 어떤 의미입니까?"
 "사람이 스스로 소중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소중하게 대하는, 그런 인간적인 것들에 완전히 무관심한, 인간 아닌 존재로서 악마라고 부를 거예요."
 무겁게 말하던 율리아나는 갑자기 자신의 볼을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심지어 그자는 나를 자신에게 제공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요. 요렇게 이쁜 나를. 악마!"
 오스발은 웃어야 되는 시점이라고 느꼈고, 동시에 뱃속으로부터 웃음이 치밀어올랐기에 시원하게 웃어버렸다.


 "법황이야."
 모닥불 옆에 앉아 있던 키는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모닥불을 감시하며 꾸벅꾸벅 졸고 있던 라이온은 갑자기 들어온 키의 목소리에 놀라 정신을 차렸다.
 "예? 무슨 말입니까? 법황이라니?"
 "그 애져버드 놈들의 의뢰인."
 라이온은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적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고 깨어 있는 것을 그들 둘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라이온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퓨아리스 4세가 애져버드를 사주해서 카밀카르의 전령들을 살해했다는 말씀입니까? 법황이 왜 율리아나 공주의 납치 사실을 은폐하려 든단 말이죠?"
 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은폐가 아냐. 이런 종류의 사건은 숨긴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종류의 사건은 아니니까."
 "그럼?"
 "생각해 봐. 라이온. 그리고 그런 종류의 추리라면 자네에겐 상당한 소질이 있을 텐데."
 라이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얼굴을 노려보던 키는 모닥불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좀더 조심하게. 아까 낮에는 위험했어."
 "주의하겠습니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가느다란 모닥불을 쳐다보며 고요히 앉아 있었다. 키는 장작 하나를 들어올려 부러뜨리며 말했다.
 "그래. 어쨌든 추리해 보세. 그 습격이 없었고 카밀카르의 전령들이 무사히 필마온에 도착했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까."
 라이온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키는 모닥불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카밀카르의 전령들이 무사히 필마온에 도착하게 되면, 카밀카르의 공식적인 협조 요청이 필마온에 도착하는 거야. 그러면 필마온이 취할 행동은 어떻게 되나?"
 "모르겠는데요. 신부를 빼앗겼다고 울음을 터뜨립니까?"
 "얼간이. 필마온의 갈가마귀들이 페리나스 해협 바깥으로 기어나오는 거야."
 라이온은 눈살을 크게 찌푸렸다. 키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라이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능합니다. 필마온 기사단은 페리나스 해협 바깥으로 1마일도 나올 수 없어요. 빼앗긴 신부의 수색이라는 명분은 다른 모든 이에겐 사용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필마온 기사단에게는 적용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페리나스 해협 바깥으로 진출할 수 있는 경우는 단 한 가지뿐이잖습니까. 법황과 교회의 적을 상대로 싸워야 할 때."
 "지금이 바로 그 경우야. 제길! 그걸 생각 못했군."
 라이온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키는 짓씹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 봐. 혼인은 성사야. 그렇지? 법황은 신앙의 수호자이며 성사의 수호자. 혼인 같은 성스러운 일은 말할 것도 없지. 그래서 모든 결혼식에서는 신부의 확인이 필요하지."
 이 당연한 이야기에 잠시 당혹해하던 라이온은 조금 늦게서야 키의 말을 이애할 수 있었다. 경악하는 라이언의 얼굴을 향해 키는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필마온 기사단은 자신의 신부를 빼앗긴 것 때문이 아니라 법황의 축복을 받아 마땅한 성스러운 혼례를 수호하기 위해 페리나스 해협 바깥으로 뛰쳐나올 수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 경우 법황은 그들을 제재하기는커녕 축복을 내려야 되는 입장이 되는 것이고."
 "이런, 젠장! 그렇다면?"
 "필마온 기사단은 카밀카르의 요청서를 명분 삼아 그들의 금제를 풀고 페리나스 해협 바깥으로 출동할 수 있게 된다. 신부를 빼앗긴 신랑으로서가 아니라 성사의 수호자인 교회 기사단의 자격으로. 법황은 바로 그걸 막고 싶었던 것이라고!"


 다음날 아침, 파킨슨 신부는 율리아나 공주와 오스발을 예배당으로 불러 한 사나이를 소개시켜 주었다. 민첩하게 생긴 그 사나이는 먼저 율리아나 공주의 얼굴을 향해 정면으로 휘파람을 불어젖힌 다음 씩 웃으며 말했다.
 "본인은 데스필드라고 하지. 이쁜이 당신."
 율리아나는 이 호칭에 대해서 뭐라고 말해 주려 했지만 그보다 앞서 파킨슨 신부가 무쇠 같은 주먹을 휘둘러 데스필드의 뒤통수를 응징했다.
 "이놈! 무엄이 하늘을 찌를 지경이다!"
 데스필드는 자신의 뒤통수를 움켜쥐고 끙끙거리다가 말했다.
 "으흑, 신부가 힘도 좋아. 제길, 아, 아닙니다. 눈꼬리 내리쇼. 본인이 자주 말하는 건데, 이 본인도 신부님 당신이 공경해야 할 신의 자녀라는 것 모르십니까?"
 "아하! 네놈이 우리 주님의 자녀라고? 악마의 사생아라면 혹 모르지."
 "어이구, 정말 신부 입 치곤 걸지기도 하다. 쳇. 어쨌든 이제 바쁜 본인을 부른 용건을 말하쇼."
 파킨슨 신부는 흉포한 눈으로 데스필드를 쏘아준 다음, 그를 싹 무시한 채 율리아나에게 말했다.
 "보시기에 우리 주님의 은혜보다는 악마의 은혜를 더 많이 받은 녀석으로 보이시겠지만, 그래도 우리 주님의 손길은 이 가련한 놈을 지나치지 않으셨찌요. 사악하고 교활하고 게으르고 우둔하지만, (데스필드가 점점 더 희희낙락하는 것을 보며 오스발은 고개를 갸웃했다.) 만약 맨몸으로 사무이다크의 고원에 던져졌을 때 살아나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 녀석일 겁니다. 패스파인더로는 최고급이죠. 이놈이 우리들을 다림까지 안내할 겁니다. 다림에는 카밀카르의 상관이 있으니 그곳에 가시면 될 겁니다."
 율리아나는 다시 말할 기회를 놓쳤다. 데스필드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라니? 신부님 당신도 다림으로 간다고? 테리얼레이드 교회를 비워놓고?"
 "그 정도 추리를 가지고 머리가 좋다고 말해 줄 수 는 없군, 그래."
 "신부님 당신 미쳤소? 신부님 당신이 여기를 비우면 교회가 어떻게 될지 짐작 못하슈? 당장 결딴날 거라고. 깡패와 도둑놈 당신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와서 집기와 성물을 다 들고 나갈 거란 말이야."
 "나도 우리 주님의 은혜로 어깨 위에 머리라는 부위를 얹고 다닌다, 이놈아."
 "원 참. 본인은 이해할 수가 없군. 저 이쁜이 당신이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가 보지? 어허! 또 끔찍한 눈짓 한다. 알았어요, 알았어. 안 묻지. 본인은 입 닫겠습니다. 언제 출발이오?"
 파킨슨 신부는 다시 데스필드를 무시한 다음 율리아나에게 말했다.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만, 괜찮습니까?"
 "하지만 신부님, 저분의 말대로라면 신부님께선 이곳에 계셔야......"
 율리아나의 머뭇거리는 질문에 대해 파킨슨 신부는 너무나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상관없습니다. 제가 어제까지 하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교회가 박살나면 다시 지으면 되죠."
 율리아나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파킨슨 신부를 보았지만 피칸슨 신부는 허허 웃을 뿐이었다. 율리아나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신부님.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배낭과 무기를 가져오겠습니다."
 예배당을 나서는 율리아나와 오스발의 등뒤로 데스필드의 낄낄거리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낄낄낄. 신부님 당신, 본인을 웃겼어. 아무리 미녀라지만 신분미 당신 나이의 반도 안 될 당신에게 그렇게 다정다감하게 말하다니, 엉큼하기 짝이 없는...... 꽥!"
 오스발은 누군가의 후두부가 퍽이나 아프게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사람이 각자의 짐을 들고 돌아오자, 파킨슨 신부와 데스필드 역시 배낭을 멘 채로 두 살마을 기다리고 있었다. 파킨슨 신부는 신부복 대신 여행에 편할 것 같은 평상복을 입고 있는 데다가 길고 튼튼해 보이는 지팡이들도 들고 있었다. 신부는 지팡이를 들어보였다.
 "여행길엔 소중한 물건이죠."
 "글쎄. 내일만 되면 당장 내팽개치고 싶을...... 어억!"
 이죽거리는 데스필드를 다시 한번 응징한 신부는 엄숙한 동작으로 율리아나와 오스발에게 지팡이를 건네어고, 그래서 두 사람 역시 경건한 기분을 느끼며 지팡이들을 받아야 했다.
 지팡이를 받아들던 오스발은 신부의 허리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오스발이 보기에 신부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것은 검대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스발은 곧 의아해해야 했는데, 파킨슨 신부가 착용한 검대엔 검집 대신 작은 가방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율리아나는 곧 환한 표정이 되었다.
 "신부님! 그건?"
 파킨슨 신부는 자신의 허리를 내려다보더니 껄껄 웃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면 제가 신의 사도임을, 그리고 공주님을 도울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놀랍습니다. 저희 고향에서도 카밀카르의 대주교님만이 그 성물을 소지하셨는데."
 "법황꼐선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테리얼레이드에서 포교중인 신부를 도우려면 뭐가 필요하신지 잘 판단하신 거죠."
 두 사람은 그렇게 고의적으로 목적어를 생략한 대화를 나누며 오스발을 흘끔거렸지만 원래 호기심을 표현하는 일이 별로 없는 오스발은 신부의 허리에 달린 물건이 뭔지 묻지 않음으로써 두 사람을 김빠지게 만들었다. 신부와 공주는 데스필드에게도 눈길을 보내었지만 데스필드는 눈을 껌뻑거리며 고함을 질렀을 뿐이었다.
 "신부님 당신, 유리 당신,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요. 빨리 출발 안할 거요?"


 같은 시각, 멀리 테리얼레이드의 전경이 보이는 산허리에서 키 드레이번의 해적들은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바위 위에 서서 테리얼레이드를 바라보던 키는 고개를 돌려 하리야 선장을 보았다.
 "하리야 선장. 테리얼레이드에 교회가 있나?"
 하리야 선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열성적인 선교사가 테리얼레이드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10년째 노력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은 있습니다. 교단에서는 제법 유명한 소문입니다."
 "아직 살아 있나?"
 "예. 살아 있으며 아직까지 노력중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펠라론의 법황청은 테리얼레이드를 포기한 셈치고 있지만 선교의 포기를 인정할 수는 없는 만큼 그 선교사의 요청을 거부하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선교사들의 놀라운 열정을 은유하는 가공의 전설인지, 아니면 사실에 입각한 이야기인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키 드레이번은 다시 고개를 도려 산 아래로 아스라이 보이는 테리얼레이드를 보며 말했다.
 "자네가 공주라면 저 지옥 같은 도시에서 누구에게 조력을 구하겠나."
 "그렇군요. 당연히 교회겠지요."
 하리야 선장의 대답에 라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다른 도시라도 그건 마찬가지겠죠. 교회는 대륙 곳곳에 발이 닿아 있는, 초, 초, 초...... 슈마허?"
 "초국가적 단체."
 "아, 그래. 그거. 대륙 곳곳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교회의 연락망을 이용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키 드레이번은 라이온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얼마 전 그와 싸웠던 사내들, 애져버드에 대해 생각했다.
 애져버드의 출현은 이 사건에 대한 교회의 개입을 의미할 것이다. 교회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필마온 기사단에게 페리나스 해협을 나설 빌미를 주고 싶지는 않을 테니. 아이로니컬한 일. 교회와 법황을 수호하는 필마온 기사단을 교회와 법황 스스로가 억누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키는 쓰게 웃으며 혼자말처럼 말했다.
 "교회를 도와야 되나."
 하리야 선장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어젯밤 키의 말을 들었던 라이온은 키의 말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지만 다른 선장들과 해적들은 키의 말에 크게 놀랐다. 킬리 선장의 경우에는 아예 더듬거리며 말했다.
 "무, 무슨 말씀입니까, 서, 선장님?"
 "말 그대로야. 성하께서는 애져버드 놈들까지 동원해서 필마온과 카밀카르의 결합을 막으려들고 있잖아."
 "좀 빠른데요. 천천히 가면 안 되겠습니까?"라는 항의는 트로포스에게서 나왔다. 키는 무거운 표정으로 트로포스를 돌아보았고 짜증스럽게 말하던 트로포스는 흠칫했다. 하지만 키의 입에선 불벼락 대신 차분한 설명이 흘러나왔다.
 "애져버드 놈들은 카밀카르의 전령을 살해했다. 만일 그 전령이 살아서 도착했다면? 필마온은 카밀카르의 협조 요청을 받아들여 페리나스 해협을 나서게 된다. 성사 중의 성사인 결혼이 방해받은 사실에 대해 분노하며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법황은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아예 연락이 가지 않도록 한 거지. 그 애져버드 놈들의 배후에 있던 것은 다름아닌 법황 퓨리아스 4세야."
 하리야 선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성하께선 살인 청부를 의뢰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모든 정황이 설명하고 있다."
 키는 말을 조금 끊었다가 자신의 추리를 차분히 설명했다.
 이 모든 사태는 애져버드의 몰락에서 시작되었다. 애져버드의 몰락으로 법황은 충성스러운 교회 기사단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제국 내에서 국가를 초월하여 교회를 수호하는 교회 기사단이 없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제2의 애져버드를 원하지 않았던 제국이 찾아낸 것이 바로 필마온의 해적들이다. 필마온의 해적들을 교회 기사단으로 임명하라는 제국의 권유를 받은 것은 <폭우의 법황> 라우스 5세였다. 펠라론에 3일 동안이나 계속된 폭우를 내렸던 전대미문의 기적을 보였던 라우스 5세였건만 제국의 권유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법황청이 이끌어낸 최대의 타협은 필마온 기사단은 오로지 법황과 교회를 위해서만 움직일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필마온 해적들은 필마온 기사단으로 개칭하고 <모든 국가를 초월하여 교회와 법황을 수호하는> 교회 기사단이 되었다.
 하지만 필마온 기사단은 곧 제국조차도 상상할 수 없었던 발전을 이룩했다. 해적이었을 때부터 그들이 자리잡고 있었던 페리나스 해협은 무수한 배들이 오가는 바다의 관문이었고 이제 교회 기사단이 된 피람온 기사단은 아무 거리낌 없이 지나가는 배들을 공격해 대었다. 각국이 보내는 격렬한 항의에 대한 필마온의 해명은 오로지 한 가지분이었다. <그들은 이단의 혐의를 가지고 있었소.>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해명이다. 미신 한두 가지쯤 믿지 않는 선원은 없으므로 필마온 기사단이 노략한 배에서 이단의 증거를 찾아내느 것은 극히 용이한 일이었다. 조그마한 부적, 우스꽝스러운 우상, 선원들이 기념품 삼아 주워모은 야만인들의 토산품들.
 그래서 바야흐로 바다의 왕자로 군림하게 된 필마온 기사단은 이제 그들을 묶고 있던 족쇄, 즉 <필마온 기사단은 페리나스 해협을 나설 수 없다>라는 조건을 벗어던지려 하고 있는 것이다.
 키 드레이번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해했나. 만일 필마온과 카밀카르, 이 강력한 해양 세력들이 결합하면 제국 최대의 군사 세력이 탄생하게 되지. 대마법사 하이낙스가 제국을 유린한 이후 현재 육상에는 강국이라는 것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강국들은 하이낙스의 공격을 가장 심하게 받았다. 따라서 육상은 무력 부재의 상태지. 그들은 바다로부터 제국을 치고 들어갈 수 있다. 간단한 일은 아니겠지만, 야심가에겐 매력적인 계획이겠지. 그리고 카밀카르의 라힘턴 3세는 모르겠지만 필마온의 발도 로네스는......"
 라이온이 키의 말을 받았다.
 "확실한 야심가 타입이죠. 게다가 메르데린 공작과는 달리 능력도 겸비한 야심가죠."
 돌탄 선장은 입을 벌린 채 놀라워했고, 오닉스 선장 역시 말은 하지 않은 채 몸으로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돌탄 선장이 키의 추리에 대해 놀라워한 것에 비해 볼 때 오닉스 선장은 필마온 기사단장 발도 로네스의 야심에 대해 놀라워하며 분노하고 있었다. 비록 말은 없었지만 페리나스 해협이 있는 방향을 향해 점잖지 못한 손짓을 해대는 오닉스를 보며 다른 해적들은 그의 마음을 쉽게 짐작했다. 하리야 선장은 우울하게 말했다.
 "말씀 이해됩니다. 주여, 피치 못할 선택을 해야 했던 법황을 용서하소서. 그럼 키 선장님의 말이 맞군요. 우리들은 교회를 도와서라도 율리아나 공주가 안전하게 카밀카르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겠군요."
 키는 싱긋 웃었다. 그 미소를 보며 하리야 선장은 갑자기 불안을 느꼈다. 그리고 곧이어 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의 불안을 공포로 바꿨다.
 "싫어."
 "키 선장님!"
 하리야는 비명처럼 외쳤다. 하지만 키 드레이번은 가볍게 고개 저었다.
 "나는 교회의 속셈이 어떻든 필마온의 갈가마귀 놈들의 계획이 어쟸든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단 하나, 감히 내 손에서 도망친 놈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성격이라는 것뿐이야."
 "하지만 안 됩니다! 필마온이 카밀카르와 결합한다면......"
 "닥쳐! 어차피 율리아나 공주가 필마온으로 시집가게 되었을 때부터 그 결속은 시작되게 되었다! 율리아나 공주가 카밀카르로 안전하게 돌아간다고 해서 필마온이 포기할 것 같나? 다시 결혼식이 시작되고, 교활한 제휴는 반복될 것이다! 바뀌는 것은 없어!"
 하리야 선장은 욱하는 얼굴로 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잠시 후 그의 입에선 엉뚱한 질문이 나왔다.
 "그럼 그 때문에 율리아나 공주를 라오코네스에게 던져주려 하신 겁니까?"
 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리야 선장은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키 선장님께서도 법황 성하와 같은 생각으로 카밀카르와 필마온의 제휴를 막기 위해 공주를 대드래곤에게 넘겨쥐려 하신 것이군요."
 입을 꽉 다문 채 하리야를 노려보던 키는 잠시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는 모든 문젯거리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괜찮은 생각이라고 믿었지. 공주가 확실히 없어지면 필마온과 카밀카르의 결속이 불가능할 테니. 라오코네스의 먹이가 되는 것만큼 확실히 없어지는 방식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공주는 실종되었다. 그래서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다."
 키의 눈빛이 갑자기 험악해졌다. 그는 눈앞에 있지 않는 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빌어먹을 노예놈......"
 예상치 못한 채 키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게 된 하리야 선장은 침을 삼킨 다음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스발 말씀이십니까."
 키는 하리야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키는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고는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 힘껏 깨물었다. 선장들과 해적들은 뭐라 말할지 몰라 입을 다문 채 키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키는 잇자국이 선명하게 난 주먹을 주머니 속에 꽂아넣으며 낮고 강하게 말했다.
 "모두 일어나. 테리얼레이드로 전진."
 해적들은 주섬주섬 일어났다. 그들이 일어나며 낸 소음 때문에 키의 다음 말은 가장 가까이 있던 라이온에게만 들렸다.
 "아니, 테리얼레이드까지가 아냐. 오스발 놈이 있는 곳이라면 지옥까지라도."
 라이온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율리아나 공주가 아닌가? 하지만 키는 이미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고 그를 불러세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라이온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자신이 뭘 잘못 들었거나 아니면 키가 뭘 잘못 말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칼집을 고쳐매던 라이온은 슈마허를 흘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이봐, 그만 웃어. 슈마허."
 슈마허는 날카롭게 미소 지었다.
 "웃고 싶은데, 라이온 선장? 공주님은 잘 달아나고 계시고, 교회도 공주님을 도우러 하고 있어. 지금 내 기분을 물어온다면 최고로 행복하다고 대답하겠어."
 라이온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글쎄. 언제까지 행복할 수 있을지 두고보지. 한 가지만 명심해 두시지. 슈마허. 키 선장님이 제국의 공적 1호라 불린다는 것은, 그를 상대하기 위해선 제국 전체가 덤벼야 된다는 듯이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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