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호의 선상에서 노잡이 오스발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모습으로 뛰어다녔다. 그가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해적들의 멍한 얼굴은 바뀌지 않았다. 해적들은 오스발이 부르면 고개를 돌리기도 했고, 쳐다보면 마주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오스발이 어떤 행동을 보이든지 간에 해적들의 반응은 그 행동으로 끝났다. 오스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선교 위로 뛰어올랐다.
"1등 항해사님! 1등 항해사님!"
식스는 멍하니 오스발을 바라보았고, 오스발은 그의 어깨를 붙잡으려다가 실수로 식스를 밀고 말았다. 그러자 식스는 주저 앉았고, 그리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스발이 기막힌 심정으로 식스를 일으켜세우자 식스는 멀거니 서 있었다. 오스발은 공포스러워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주승강구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스발은 고개를 돌렸다.
주승강구에서는 키 드레이번이 검을 뽑아든 채 맹렬한 동작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오스발은 키 드레이번이 그의 검 <복수>를 뽑아든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에 감탄했다. 복수는 검신 전체로부터 파르스름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반사광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검 내부로부터 뿜어져나오는 빛이었다.
키는 복수를 단단히 쥔 채, 조금 전 오스발이 그러했던 것처럼, 선원들의 모습을 살폈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선교 쪽을 향했을 때 키와 오스발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키는 미심쩍은 얼굴로 노예 차림의 오스발을 보다가 그가 누군지 기억해 내었다.
"오스발? 너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냐?"
오스발은 순식간에 무릎을 꿇었다. 몸에 배인 습관이다.
"아, 저, 선장님. 미노 만을 볼까 해서 갑판에 올라왔습니다. 선장님꼐서 쇠사슬을 풀어주셔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선원들이 갑자기 이렇게......"
"잠깐. 넌 괜찮은 건가?"
오스발은 의아한 얼굴로 키를 마주보았고, 그래서 키는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키는 납득할 수 없었다. 키는 선교를 올라오며 오스발을 노려보았다.
"마법의 힘이 선단 전체를 덮친 것 같군. 노래가 들려왔다면 사이렌Siren 년들의 장난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아무런 노래도 없으니 그건 아니군. 그런데 넌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저, 선장님꼐서도 괜찮으시지 않습니까?"
키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복수를 들어올렸다. 가까이에서 복수를 보게 된 오스발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두꺼운 복수의 검신에는 무슨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지만 솟아오르는 빛 때문에 오스발은 그 글씨를 볼 수 없었다. 키는 나직하게 말했다.
"이 검이 나를 지키고 있다. 그렇잖았다면 나 역시 당했을지 모르지. 그런데 넌 왜?"
"모르겠습니다."
키는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오스발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가 씰룩거렸지만, 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오스발의 정수리를 쏘아보았다. 잠시 후 키는 조금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타(배의 키를 조종함) 경험이 있나? 아니, 됐어. 어차피 너뿐이니. 가서 타륜을 잡아라."
"타,, 타륜을 잡으라고 하셨습니까?"
오스발은 기겁한 얼굴로 키를 바라보았다. 돛과 노가 배의 손발이라면 타륜은 배의 머리에 해당한다. 선원들의 농담이긴 하지만, 선상에서 선장이 고주망태가 되어 난동을 부릴 때, 1등 항해사는 선장에게 두들겨 맞으며 그를 달래고 조타수는 선장을 두들겨 팬 다음 침대에 던진다고 한다. 조타수의 막강한 권한을 잘 나타내는 농담으로서, 어쩄든 조타수의 이 막강한 권한은 지금 키 드레이번이 그러는 것처럼 갈매기에게 고기 대가리를 던져 주는 것만큼이나 간단히 노잡이 노예에게 수여할 수 있는 성질의 그런 권한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키는 그렇게 했다.
"선장님......?"
오스발은 일개 노예인 자신은 도저히 그런 폭거를 감행(과감하게 실행함)할 수 없다는 내용의 눈빛을 담아 키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키는 강철 같은 시선으로 마주볼 뿐이었다. 오스발은 도리없다는 몸짓을 하고는 천천히 일어나서 자유호의 타륜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오스발은 다시 고개를 심하게 가로저었다.
자유호의 조타수 칸나는 타륜에 손을 얹은 채 멍한 얼굴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칸나의 얼굴이 순진해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감동을 받으며, 오스발은 칸나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조심스럽게 그를 밀어냈다. 만약 제정신의 칸나에게 오스발이 이런 짓을 했다면 아피르 족의 용맹한 전사 출신인 칸나는 오스발을 글자 그대로 씹어먹으려 들었을 것이다. 아피르 족은 식인종이니까. 하지만 칸나는 오스발이 미는 대로 순순히 옆으로 비켜섰다. 칸나를 밀어낸 오스발은 타륜에 손을 얹고는 비참한 표정으로 키를 바라보았다.
키는 고개를 조금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은 그대로 잡고 있어."
그리고 키는 몸을 돌려 선교를 내려갔다. 갑판에 내려선 키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주의 깊게 다른 배들을 관찰했다. 아홉 척의 배는 유령 같은 선원들을 태운 채 나란히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키는 옆을 지나가고 있는 배들의 갑판원들을 향해 고함을 질러보았지만, 선원들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볼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본 키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오닉스! 돌탄! 킬리! 제기랄, 다들 어떻게 된 건가. 트로포스! 하리야! 두캉가!"
키는 선장들의 백치 같은 얼굴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선장들은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해초처럼 흐느적거렸다. 선단의 좌우를 둘러싼 하얀 안개는 커튼처럼 무겁게 내려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시 선교로 돌아온 키는 오스발을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치 저 강력한 사나이들도 제정신이 아닌데 넌 왜 까딱없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었고, 그래서 오스발은 목을 움츠렸다. 키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잘 들어라. 모두들 제정신이 아닌 이상, 너와 나 둘이서 아홉 척의 배와 사천여 명의 인원들을 구해야 한다. 알았나, 오스발? 노예라는 핑계는 통하지 않아. 서툰 행동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아, 알겠습니다. 선장님."
"좋아. 타륜을 좀더 넓게 쥐어라. 내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가 명령이 내려지면 즉각 움직이도록."
오스발은 고개를 끄덕였고 키는 한심스러운 기분을 애써 누르며 지휘할 수 있는 선원이 노잡이 노예 한 명뿐이라는 이 황당한 사태에 적응하려 애썼다.
키 드레이번은 선단 전체를 세밀하게 관찰하며 동시에 이 불가사의한 현상의 원인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그가 관찰할 수 있는 내용은 모조리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원들은 모두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흐느적거렸고, 배는 돛을 늘어뜨리고 노마저 정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떠내려가고 있었다. 키는 안개를 바라보았다. 희고 액체적인 질량감으로 꿈틀거리는 안개를 바라보던 키는 갑자기 목 뒤가 축축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키는 급히 목 뒤를 만져보았지만 건조한 살갗만이 만져졌다. 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검 복수가 파르스름한 빛을 내고 있는 것을 보지 않더라도 이것이 어떤 종류의 강력한 마법과 관련된 현상이라는 것은 자명했다. 키는 오른손에 쥔 복수를 더욱 단단히 쥐며 외손 식지(집게손가락)를 세워 미간을 문질렀다. 어떻게 하면 이 덫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노예 한 명의 도움을 받아, 아홉 척의 배와 사천여명의 인원을 구출해 낼 수 있을까.
그때 오스발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의 갈피를 비집고 들어왔다.
"선장님."
키는 사나운 표정으로 오스발을 돌아보았다. 오스발은 찔끔하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뭔가, 오스발."
"저, 별것 아닙니다. 떨려 죽겠거든요. 그래서 그러는데, 기도 좀 올려도 되겠습니까? 생각하시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기도라고? 그렇군!"
키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하지만 오스발은 그것이 승락의 뜻인걸로 착각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곧 그의 정수리를 향해 키의 노성이 내리꽂혔다.
"그 따위 집어치우고 입 다물어! 정신 바짝 차려라. 네가 드디어 6천만 데리우스짜리 배를 움직이게 되었단 말이다!"
오스발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키를 바라보았지만, 키는 그가 반문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키는 그대로 갑판을 향해 뛰어내려가며 외쳤다.
"타륜 꽉 잡아라. 좋아, 그대로 간다...... 지금이다! 타륜 좌로 3분의 2회전!"
키는 오스발을 위해 쉽게 명령을 내렸고, 명령을 받자마자 오스발은 조건반사적으로 힘껏 타륜을 꺾었다. 타륜을 꺾자마자 느껴지는 배의 움직임에 오스발은 감탄해 버렸다. 그 작은 동작으로 산더미만한 배가 움직이는 것은 누구에게나 놀라운 경험이었고, 타륜이라고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오스발에겐 더욱 놀라웠다. 그래서 오스발은 자신이 저지른 행동의 결과에 대해 조금 늦게 경악했다.
선수를 기우뚱하며 거체를 옆으로 튼 자유호는 페가서스호의 우현을 향해 분명한 충돌 궤도를 그리며 다가가고 있었다. 오스발은 기겁하며 타륜을 바로잡으려 했지만, 키는 벌써 그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호통 소리가 벽력처럼 터져나왔다.
"움직이지 마!"
오스발은 벌벌 떨면서 타륜을 움켜쥐었고 키는 다시 전방을 바라보았다. 자유호는 페가서스호의 우현을 향해 곧장 나아가고 있었고, 페가서스호의 갑판 위로 선원들의 얼굴은 시시각각 커지고 있었다. 자유호와 페가서스호의 선원들 중 아무도 곧 일어날 파국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스발은 그들 모두의 몫만큼 긴장해야 했다.
키는 복수를 쥔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서서히 올라가던 검이 갑자기 떨어졌다.
"지금이다! 타륜 우로 한 바퀴!"
오스발은 타륜에 몸 전체로 매달리다시피 하며 우측으로 꺾었다. 배는 커다란 피치와 롤링을 동시에 일으켰다. 하지만 남해를 오가는 배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자유호는 초보 조타수의 과격한 운전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중심을 회복했다. 키는 오스발을 향해 고함 지르며 달려갔다.
"타륜 정위치! 꼼짝도 하지 마라!"
오스발은 타륜을 몇 번 놓쳐가면서도 간신히 정위치로 돌려놓았다. 키 드레이번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뱃전을 넘어 아래로 뛰어내렸다.
"선장님?"
멍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오스발은 키가 자살이라도 하려는 건가 하는 망상을 떠올렸다. 하지만 자살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오스발은 눈을 껌뻑거리며 자신이 본 것을 의심했다.
"물 위를...... 달리고 있어?"
키 드레이번은 자유호의 측면에서 튀어나와 있는 노를 밟으며 바다 위를 달리고 있었다.
노련한 뱃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상대편 배로 뛰어들어야 되는 해적들과 수병들은 대개 이 묘기를 부릴 줄 알지만, 키 드레이번이 펼쳐보이는 솜씨는 대단한 것이었다. 한손에 빛을 뿜어대는 장검을 든 채 외투 자락이 뒤로 흩날릴 정도의 속도로 달리고 있는 키의 발 아래로 물방울들이 무수히 튀어올랐다. 높은 위치에 있던 오스발이 보기에도 마치 물 위를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오스발은 순수한 감탄으로 탄성을 질렀다.
키 드레이번은 순식간에 페가서스호의 노 위를 지나 페가서스호의 뱃전을 향해 뛰어올랐다. 뱃전을 움켜쥔 키는 발을 굴러 가볍게 갑판에 뛰어올랐다. 박수라도 쳐주면 좋으련만, 페가서스호의 선원들은 시체 같은 얼굴을 한 채 멍하니 딴 곳을 바라볼 뿐 그들의 갑판에 뛰어오른 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보내지 않았다. 키 드레이번 역시 박수를 바라는 곡예사의 취향은 없었기에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선교에 서 있는 하리야 선장을 향해 달려갔다.
하리야 선장은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듯 두 손을 가슴 앞에 깍지 낀 채 시선을 내리갈고 있었다. 하리야 선장의 무표정한 얼굴을 본 키는 잠시 주춤했지만 곧 이를 악문 채 그의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하리야 선장의 겉옷 속을 더듬던 키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시 밖으로 나온 키의 왼손에는 작고 두툼한 책이 들려져 있었다. 송아지 가죽으로 만들어진 표지에 금속으로 테두리를 보강한 견곤해 보이는 그 책의 정체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던 오스발도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스발은 키의 담대함에 혀를 내둘렀다.
키 드레이번이 꺼내든 것은 제국에서 단 한 장소, 법황청이 소재한 신성 펠라론의 축복받은 출판사만이 펴내어 제국 곳곳에 배포하는 책이었다. 여러 나라의 왕과 총통과 대통령들이 그 출판권을 탐내어 왔지만 언제나 성직자들의 목숨을 건 반대에 부딪혀 포기하고 마는 책, 해적들이라면 날벼락을 맞을까 두려워 건드리지도 못하지만 하리야 선장이라면 목숨 대신이라도 가지고 다닐 책이었다.
한 손에 칼을 들고 있어서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지만, 키는 가까스로 신성한 신의 말씀이 담겨 있는 성전의 책장을 넘겼다. 찾던 부분을 펴든 키는 안개더미를 힐끗 바라본 당므 엄숙하게 성전을 읽기 시작했다.
"잊혀져 기억되고, 사라져 나타나며, 시작되지 않은 끝이고, 끝나지 않을 시작이신 내 주여......"
"쿠오오오오!"
키 드레이번이 성전을 읽기 시작하자, 곧 안개 속에서 야수의 울부짖음 같은 것이 터져나왔다. 오스발은 무릎이 휘청거리는 것을 느꼈지만 타륜에 매달려 간신히 쓰러지지 않았다.
안개의 포효는 사이를 두지 않고 계속 터져나왔다. 까마귀의 외침 같기도 하고 맹수의 울부짖음 같기도 한 그 소리는 어찌들으면 상처입은 인간의 비명철머 들려서 더욱 음산했다. 오스발은 턱을 덜그럭거리며 눈을 감았지만 곧 눈을 부릅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자 더욱 무서웠다. 천둥 소리 같은 포효가 선단을 뒤흔들고 있었지만, 키의 성전 봉독(남의 글을 받들어 읽음)은 흔들림 없이 오히려 더욱 높아졌다.
"어둠으로써 어둠을 가리시고, 빛으로 빛을 드러내시는 내 주여. 무위로 창세하신 세상에 무언으로 지혜를 설파하시는 내 주여. 나의 원수 중에 원수이신 주여. 나의 고난에 고난을 선사하시는 주여......"
번쩍! 오스발은 안개 사이로 언뜻 비친 빛에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는 일개 노예인 자신에게 이런 광경을 볼 권리가 있는 것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안개더미 곳곳에서 포효와 함께 번개가 치고 있었다. 희게 꿈틀거리던 안개는 천천히 검붉은 색깔로 변해 가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순백색의 빛발이 치달리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불어닥친 광포한 발마은 돛을 두드려대었고 바람을 타고 일어난 돛줄에서는 뼛속까지 파고들 듯한 퓽퓽거리는(총알 따위가 조금 멀리서 날아가는 날카로운 소리가 잇따라 난다) 소리가 울려퍼졌다. 알 수 없는 그림자들이 검붉은 안개 속을 쏜살같이 날아가며 괴성을 질러대었다. 수면으로 시선을 돌린 오스발은 더욱 어이없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바닷물은 들끓는 수프처럼 변해 진득하게 부글거렸고 거품이 터지면서 질척한 바닷물이 뱃전에 달라붙어 흘러내렸다.
그리고 바다 곳곳에서 천천히 물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바닷물은 철벅거리고 뒤엉키며 나무처럼 솟아올랐다. 금속성 광채를 띤 물기둥들은 안개의 검붉은 색깔을 반사하며 번들거렸다. 오스발은 그 모습을 보며 구토감을 느꼈다. 하지만 키는 성전에만 눈을 고정시킨 채 글자 하나하나를 파낼 듯이 읽어내렸다.
"내 영혼의 고삐를 쥐신 아버지 주님보다 더한 원수 있을 수 없음이니, 주여 나는 이제 원수를 잊나이다!"
모든 것이 일순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안개는 고요히 흐르고 있었고 바닷물은 조용히 찰박거렸다(찰바닥거리다의 준말. 얕은 물이나 진창을 거칠게 밟거나 치는 소리가 자꾸 나다 또는 내다). 선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오스발의 경우,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은 어깨로부터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움켜쥐는 조타수 칸나의 손길에서 안도감을 느껴야 될지 공포를 느껴야 될지 종잡을 수 없었다. 오스발은 잘 안 되는 미소를 억지로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칸나의 얼굴을 본 순간 그 미약한 미소마저 싹 달아났다.
최고로 열받은 아피르 족의 표정을 정확하게 구사하며 칸나는 더듬거리는 제국 표준어로 말했다.
"너, 조타수 아니다. 너, 타륜 잡았다. 나, 너 먹는다!"
"우아아아!"
오스발은 언젠가 그러했던 것처럼 갑판 위를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했고, 칸나는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으며 그 뒤를 추적했다. 하지만 모조리 아피르 족의 욕설인지라 선원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자유호에서 일어나는 이 일대 소동을 보던 키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선 하리야 선장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키를 보고 있었다. 키는 정중한 동작으로 그에게 성전을 건네며 말했다.
"자네라면 가지고 있을 줄 알았지. 고마웠네, 하리야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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