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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소설/습작

폴라리스 랩소디 1 pp 120~133

 라이온의 호기심의 대상인 키는 그때 선장실에서 식스 1등 항해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식스는 탐탁찮은(모양이나 태도, 또는 어떤 일 따위가 마음에 들어 만족하다)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추측에 대한 확인을 받고 싶습니다. 정말 미노 만으로 가는 겁니까?"
 키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스는 그 대답에 당황하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무엇 때문입니까. 그곳에 괜찮은 기항지(배가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잠시 들르는 항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레보스호와 그 화물을 빨리 처분해야 될 텐데요. 레보스호의 선원들과 포로들의 동태는 아무리 낙관적으로 말하려 해도 온순하다고는 할 수 없는 편입니다. 조속히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식스는 절대 미노 만에는 드래곤이 있다던데요? 하는 식의 말은 꺼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런 너무나도 창피스러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키는 잔인무도한 해적이었다.
 "게다가, 미노 만에는 대드래곤이 있으니까?"
 식스는 불편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몇 번 한 다음 말했다.
 "선원들은 두려워할 겁니다. 그들은 제가 시트 한 장 뒤집어 쓰고 나타나도 그림 리퍼Grim reaper(죽음의 신)가 나타났다고 떠들어댈 겁니다."
 "설령 그림 리퍼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놈들은 크게 신경 쓰진 않을 거야."
 "그렇긴 할 겁니다만, 어쨌든 어수선한 분위기가 되는 건 달갑잖습니다.(거리낌이나 불만이 없어 마음이 흡족하다)달갑지않습니다=>달갑잖습니다."
 "누가 자네에게 그걸 가르쳐주던가."
 "예?"
 "아니, 대답할 필요 없네. 라이온이겠지. 우리 선단에서 그런걸 고민할 정도로 앞날에 관심 있어하는 건 그 친구뿐이니. 그 똑똑한 친구에게 찾아가서 미노 만 북쪽에 뭐가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전하게."
 식스는 의아한 얼굴로 키를 쳐다보았다. 미노 만 북쪽이라니. 해변 위쪽에 뭐가 있단 말인가. 땅 이외엔 아무것도...... 순간 식스는 아차하는 표정이 되었다. 키는 그런 식스의 표정을 보며 엄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도 마찬가지군. 수부들은 다 비슷하지. 하긴, 땅개들도 마찬가지일 테지. 대륙의 사람들에게 남쪽에 뭐가 있느냐고 물어보면 지금 자네 같은 표정을 지으며 거긴 물밖에 없잖냐고 말하겠지. 그러나 우리에겐 그냥 물이 아니지. 일항사. 가끔 육지에도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 좋을 걸세."
 식스는 미노 만 북쪽에 뭐가 있는지 키에게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이미 충분한 망신을 겪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스는 키에게 인사를 보내고는 선장실을 나왔다.
 식스가 나가자 선장실은 고요해졌다. 물론 바람을 가득 안고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는 배 안인지라 소음들은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키 드레이번이 인식할 수 있는 소음은 아니었다. 익숙해진 소리들이었기에. 그래서 키는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은 채 고요함 속으로 들려오는 킬리의 류트 소리를 들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식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멈춰 있었다. 키는 고개를 돌렸다. 선장실 뒤쪽으로 난 창 문턱에 놓인 싱잉 플로라의 화분이 보였다. 선장실에서 유일하게 햇빛이 들어오는 장소에서 싱잉 플로라는 배의 움직임에 따라 그 가는 줄기를 조금씩 기웃대고 있었다.
 "어떤가, 킬리의 연주는."
 싱잉 플로라의 줄기가 왼편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키에겐 고개를 가로젓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녀석이 연주하는 것은 그저 소리일 뿐이지. 노래가 아냐. 하지만 우습군. 너는 꽃이다. 어떻게 사람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지?"
 싱잉 플로라의 줄기가 이번엔 반대로 움직였다. 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햇살이 들어오는 유일한 창문에 있는 싱잉 플로라는 검은 그림자로 보였다. 싱잉 플로라는 검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가느다란 줄기를 힘없이 흔들고 있었다. 방 안의 사물들이 색깔을 잃어감과 동시에 방 안의 공기는 검은색을 띠는 듯했다. 키는 문득 고개를 떨어뜨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붉게 물든 손은 피에 젖은 것 같았다. 배는 천천히 좌우로 흔들리며 한시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키는 멈춰진 사물들과 어두운 공기를 바라보았다. 키는 메마른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붉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늘은 이미 검푸른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키의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노래해."
 싱잉 플로라의 줄기가 멈췄다. 아니, 멈춘 것이 아니다. 배의 흔들림과 반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싱잉 플로라는 배가 어떤 각도로 있든 항상 그 봉오리는 하늘을 향하도록 자신을 고정시켰다. 이미 선장실을 가득 메운 채 침침(눈이 어두워 물건이 똑똑히 보이지 아니하고 흐릿하다)하게 가라 앉던 검은 공기들이 주춤거리며 내키지 않는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일몰을 향하는 선단에서 밤의 문을 열듯,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율리아나 공주는 차분히 천정을 바라보며 유사(인류 문명의 역사가 시작됨) 이래의 어떤 죄수들에게도 항상 보장되었던 자유를 향유하고 있었다. 공상의 자유는 감옥에 가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공상은 주로 이 선실에서의 탈출과 해적들과의 사투, 자유호의 점거, 슈마허와 라스의 해방, 위대한 승리 등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 일련의 드라마틱한 공상의 클라이맥스는 비명을 지르며 바다에 떨어지는 키 드레이번의 모습이었다. 공상 속으로 정수리까지 빠져 있던 율리아나 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히죽 웃었다.
 낄낄낄.
 하지만 그런 공상들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사실은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이 감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녀는 이미 식사에 따라나오는 생선 가시와 그녀의 속치마에서 뽑아낸 실을 잘 조합한 다음 낚시처럼 사용하여 문의 빗장을 연다는 계획까지 세워보았고, 그 계획을 위해 가시에 손가락을 찔려가면서까지 탈출 도구를 만들어보았다. 하지만 그 <대탈주의 열쇠>의 제작이 끝났을 때, 공주는 그것을 침대 밑에 던져버리고는 침대 위에 벌렁 쓰러졌다.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엔? 안타깝게도 이곳은 바다 위였고 따라서 공주는 어디로도 달아날 수 없었다. 해적들과의 사투? 공주는 검을 다룰 줄 모르며 그에 준하는 어떠한 살인 도구에 관한 교육도 받은 적이 없다. 물론 머릿속의 지식과 우수한 변론술조차도 때론 살인 도구로 사용될 수 있으며, 그 두 가지에 한해서라면 공주 또한 상당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거친 해적들을 상대로 그들의 존재론적 약점을 자극하여 필연적 자살로 이끈다는 것은 변론의 황제 린타가 부활한다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자유호의 점거는 말이 안 되며, 레보스호에 있는 슈마허와 라스를 해방시켜 그녀를 돕게 한다는 것은 더욱 어불성설이며, 위대한 승리는 논할 가치조차 없다. 따라서 키 드레이번은 품위 저조한 비명을 지르며 바다에 떨어지는 난처한 지경에 빠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속상해.
 침대에 드러누운 채 속상해하던 공주는 싱잉 플로라의 고운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멍한 얼굴로 그 노래를 듣던 공주는 무의식중에 가시에 찔려 화끈거리는 손가락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잠시 후 공주는 흠칫하며 손가락을 뺐지만 이곳이 카밀카르의 왕궁이 아니라는 사실, 즉 공주가 품위 없는 행동을 취할 경우 바람처럼 나타나 끝없이 잔소리로 그녀를 제지할 궁인들이 득시글거리는(사람이나 동물따위가 떼로 모여 자꾸 어우선하게 들끓다)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율리아나 공주는 고운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은 다음 마음 내키는 대로 빨아대며 다시 공상에 빠져들었다.
 자유호의 승객이면서도 자유롭지 못한 공주가 자신의 자유를 쟁취할 방법들에 대해 공상하는 동안, 자유호의 또다른 노예는 자유호에서 가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자유에 대해 난감해하고 있었다. 오스발은 멋쩍은 표정으로 노예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노예장님. 불편하시다면 쇠사슬을 채우세요. 저는 상관 없습니다. 어디로 갈 것도 아니고."
 "약올리는 거냐? 선장님께서 채우지 말라고 하셨는데 내가 널 묶는다고?"
 "아,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저, 그럼 마음 편하게 주무세요."
 노예장은 끙! 하는 소리를 내었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잠들 준비를 취하지도 않았다. 노예장은 벽에 등을 기대어 앉은 채 번쩍이는 눈으로 오스발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노예장의 얼굴이나, 간혹 옆에 놓아둔 칼자루를 발작적으로 움켜쥐는 그의 손은 수십 마디의 말들을 외치고 있었다. 왜 안 자고 있는지 안다. 내가 잠들면 넌 내 목을 딸 거지? 그리고 노예들을 모두 풀어준 다음 반란을 일으킬 거지? 그래서 잠들지 않고 있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어림 반푼 어치 없다. 네녀석이 잠들 때까지 나는 절대로 잠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한 노예장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그의 추리의 시작, 즉 <왜 안 자고 있는지 안다> 부분에서부터 그의 추리는 완전히 어긋나고 있었다. 오스발이 잠들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뚫어지게 쏘아보고 있는 노예장의 시선이 거북스러웠기(보기에 거북한 데가 있다) 때문이다. 오스발은 몸을 옆으로 돌려보았지만 곧 노예장의 삼엄한 고함에 질겁하며 똑바로 누워야 했다.
 "똑바로 누워! 두 손 모두 내 눈에 보이는 곳에 놓고 얼굴도 보이게 하란 말이다!"
 오스발은 할 수 없이 쇠사슬에서 풀려난 이후로 매일 밤 그래왔던 것처럼 눈을 꼭 감은 채 잘 들리지 않는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를 들어보려 애쓰면서 잠을 청했다. 자유의 이불은 그에게 결코 편친 않았다.


 "이건...... 기발한데......"
 라스는 홀린 표정으로 서류와 책더미에 코를 박은 모습이었다. 침대에 다리를 올린 채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던 슈마허는 힐끗 고개를 들어 라스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라이온과 싸움에서 입은 상처는 이제 아물고 있었다. 아직 정상적으로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슈마허는 고통을 참아내며 빨리 제 몸을 만들기 위해 무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동안 그를 충실히 간호하던 그의 감방 동료 라스는 갑자기 라이온으로부터 이상한 부탁을 받고는 저렇게 책더미만 뒤지고 있는 것이다. 슈마허는 침대에 도로 앉아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로드 라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응? 어, 그래. 말해 보시오. 서 슈마허."
 슈마허는 못마땅한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라스의 정수리를 향해 말했다. 라스는 고개도 들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로드 라스. 로드께서는 그 미친 놈으로부터ㅡ슈마허는 라이온을 이렇게 불렀다.ㅡ그놈이 생각해 낼 법한 이상한 조사 임무를 받으셨기에 함내를 자유로이 오가실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뭔가 떠오르시는 바가 없습니까?"
 "아, 미안해요. 내가 서 슈마허 생각도 하지 않고 너무 흥겨워하는 것처럼 보인 모양이군. 하지만 나도 이 상황을 즐거워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슈마허는 신음을 내뱉고 싶었지만 다시 한번 꾹 참았다.
 "아뇨. 로드 라스. 저는 지금 로드를 부러워하거나 질투하는 것이 아닙니다. 포로들의 동태나 노잡이들의 분위기를 여쭙고 싶은 것입니다."
  라스는 그제서야 머리를 들어 슈마허를 쳐다보았다. 슈마허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라스를 바라보았다.
 "어떻습니까. 이 배의 선원들의 동향은? 혹 엘리엇 선장을 만나보셨습니까? 해적들의 경계 태세는 어떻습니까?"
 라스는 한숨을 내쉬며 책장을 덮었다. 솔직히 책을 덮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라스는 차분하게 말했다.
 "서 슈마허. 탈출을 생각하는가 본데, 여긴 바다 한가운데이고 우리는 적수공권(맨손과 맨주먹이란 뜻,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의 지경이오. 해적들의 경계? 대단치 않소. 왜냐하면 그들도 우리가 어디로 달아나지는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밤이면 저 노래에 취해 잠들고 낮이면 하품을 생산하는 것이 전부요. 내게 이렇게 쉽게 배 안에서의 거동의 자유를 준 것을 보면 모르겠소? 혹여, 만에 하나 이 레보스호를 점거할 수 있을지도 모르오. 하지만 자유호에 계신 공주님은 쉽게 인질이 될 것이오. 혹 다른 수단이라도 떠오르시오?"
 슈마허는 이를 갈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이 선단은 지금 북서쪽을 향하는 것 같은데, 정확히 해상의 어느 지점인지 알 수 없겠습니까?"
 "아, 그거라면 도와줄 수 있겠군요. 내일 저녁이나 모레 아침 정도면 우린 미노 만에 다다를 것 같소."
 슈마허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미노 만? 해안가라는 말이겠군요?"
 라스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해안가요. 그런데 당신은 미노 만이라는 이름에서 다른 건 전혀 생각나지 않는 거요?"
 "다른 것? 유명한 장소입니까?"
 "하긴 당신은 선원이 아니지. 그렇다 하더라도 대륙의 아홉 불가사의 중 하나이기도 한 미노 만을 어떻게 모를 수 있는 거요?"
 "저는 그런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약간 딱딱하게 대답하는 슈마허를 보며 라스는 순간적으로 카밀카르 기사단의 <모범생>이었던 서 슈마허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라스는 빙긋 웃었다.
 "혹시 다섯 수레와 한 권이시오?"
 "예? 무슨 말씀인지?"
 슈마허의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을 보며 라스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다시 한번 미소 지었다. 라스가 한 말은 <다섯 수레에 달하는 무기를 배워 익혔고, 소지한 책은 그 무기 목록 한 권>이라는 길다란 뜻의 농담이다. 라스는 선선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신경 쓰실 말은 아니오. 그래, 미노 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흐음. 선원들은 미노 만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오."
 "어떻게 부릅니까?"
 "그들은 그곳을 대드래곤의 성지라고 부르지. 그리고 내가 조사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것에 관련된 것들이고."
 1024년 전, 대륙은 한 불요불굴(한번 먹은 마음이 흔들리거나 굽힘이 없음)의 사내에 의해 무릎을 꿇고 마침내 제국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기실 몇십 년전부터 열국의 왕은 한 사내의 강권 아래 사고 전환을 강요당하고 있었고, 마침내 그들과 동격인 왕이 아닌 그들 위의 황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인 1055년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대륙의 정신적 지배자인 법황이 자신과 동격의 권한을 가진 한 명의 인간을 인정하기까지는 31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오랫동안 인내한 황제는 마침내 기회를 포착했다. 황제에게 가벼운 조롱을 보낸 사내가 법황 직할령인 펠라론으로 도망친 것이다. 이 이름도 남지 않은 역사적인 사내는 황제의 행진을 구경하다가 황제의 마차를 향해 그다지 품위 있지 않은, 그러나 역사적인 손짓을 했다고 한다. 이 사내가 황제의 충복이라는 주장은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전해져 내려온다.
 <신의 대행인인 법황의 권위를 인정하여 펠라론에는 절대로 발을 들여놓지 않겠으나, 중대 범죄자가 펠라론 이외의 다른 지역으로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잠정 조처>라는 이름으로 취해진 황제의 조처는 70만 제국 군대를 동원하여 법황의 직할령인 신성 펠라론의 국경을 완전히 둘러싸는 것이었다. 이 인상적인 시위에 대하여 법황 역시 품위 있는 항복을 보내었다. <그의 허물이 비록 많으나 우리 모두의 아버지인 신 아래 그 또한 당신의 형제인즉, 제국의 황제에게 아우의 허물을 용서하는 형의 관용을 바라겠소.>라는 내용의 법황이 보낸 5매짜리 서신에서, 기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쩨국의 황제>라는 호칭 하나뿐이었다. 법황이 공식 서한에서 이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제국과 황제는 동시에 법황으로 부터 인정받았고, 황제는 즉각 제국 군대를 후퇴시켰다. 그래서 시니컬한 역사학자들은 농담 삼아 제국을 <편지 한 장으로 성립된 유사 이래 최대의 정치 집단>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농담은 사실 농담도 되지 못한다. 비록 황가 제국이나 법황은 인정하지 않지만, 제국이 성립된 정확한 시기를 추적하려면 법황의 서신이 황제에게 도달한 날로부터 238년을 더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제국력 238년, 대드래곤 라오코네스는 제국을 상대로 미노 만은 자신의 영토라는 주장을 피력했다.(생각하는 것을 털어놓고 말함) 한 야사는 당시 황제가 라오코네스의 전갈을 가져온 전령을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어대었다고 전한다.
 라스의 설명을 듣던 슈마허는 이 대목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어째서 선황제께선 그렇게 기뻐한 거지요? 황제의 제국 일부를 드래곤에게 뺏기는 것인데?"
 라스는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봐요, 서 슈마허. 한 청개구리가 세상을 상대로 이건 나의 제국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뭐라고 하겠소? 그 청개구리를 찾아가서는 <죄송합니다. 다른 곳은 당신의 제국일지 모르겠지만 저곳만은 제 집으로 인정해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부탁하겠소? 아마도 밟아버릴 기분도 들지 않아 그냥 코웃음을 칠 거 아니오. 여기서 청개구리와 당신을 선황제와 라오코네스로 바꿔보시오. 제국의 일부를 잃는 것은 중요치 않소. 대드래곤, 위대한 라오코네스가 제국으로부터 자신의 영토를 인정받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오. 대드래곤이 황제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그가 황제를 자신과 동격으로 봐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오."
 슈마허의 얼굴에 떠오른 경악은 노대신을 즐겁게 만들었다. 라스는 마치 자신이 대드래곤 라오코네스라도 된 것처럼 으스대며 말했다.
 "그래서 황제는 즉각적으로 라오코네스의 주장을 수용했소. 물론 미노 만은 라오코네스에게 하사한다는 식은 불가능했지. 하사라는 표현을 섣불리 사용함으로써 라오코네스의 비위를 건드릴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제국과 라오코네스 사이에서 오간 협정 문서는 상당히 모호한, 정치 문건에는 잘 쓰이지 않는 용어들로 점철된 문서가 되었소. 하지만 그 내용을 요약해보면 이렇소. 미노 만은 라오코네스의 것. 그 외에는 전부 황제의 것. 양자는 이에 동의함."
 "아하. 그렇습니까."
 슈마허는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법무대신이자 법학자이기도 했던 라스는 신이 나서 말했다.
 "물론 당시의 법학자들은 라오코네스와의 협정의 많은 부분에서 골머리를 아파해야 했던 모양이오. 이것은 동등한 지위를 가진 두 개의 정치 집단의 탄생이라고는 볼 수 없거든. 라오코네스의 영토는 전혀 정치적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니까. 그건 차라리 생물학적인 영토였소. 따라서 비록 당시 법학자들의 지배적인 견해는 그러했지만, 그것을 라오코네스 하나의 법인체를 유일한 구성원으로 하는 정치 집단으로 보는 것은 사실 무리가 많......"
 "죄송합니다만 어려운 이야기는 좀 넘어갔으면 합니다. 제 관심 분야가 아닙니다."
 "아, 좋소. 어쨌든 이 이상한 협정의 결과로 제국의 신민은 라오코네스의 영토인 미노 만에 출입할 수 없게 되었소. 그리고 800년이 흘렀고, 결국 아무도 갈 수 없기에 거꾸로 갈 필요가 없는 땅, 전혀 유명하지 않은 땅인 미노 만이라는 것이 우리 시대에 남게 된 거요. 서 슈마허가 미노 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역시 당연하지."
 슈마허는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떠오른 생각에 슈마허는 계면쩍음(쑥스럽거나 미안하며 어색하다의 변한말)도 잊은 채 달려들듯 말했다.
 "아니, 그럼 이 선단은 법적으로 출입 불가인 지역에 들어간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설마 해적들이 준법 정신에 투철할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실 텐데?"
 "그게 아닙니다! 미노 만이 법적으로 출입 불가인 지역이라면, 거기에서 탈출하더라도 어떤 조력을 구하기가 어렵잖습니까. 아무도 없는 땅일 테니까요."
 라스는 다시 한번 실소(어처구니가 없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툭 터져 나옴)했다. <역시 다섯 수레와 한 권이군. 이토록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떠올린 것이 고작 그것인가>에 해당하는 표정을 잠깐 지어보인 라스는 곧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렇진 않아요. 미노 만 안쪽 깊숙이 들어가면 골디란 강을 만나게 됩니다. 그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테리얼레이드가 나오지요."
 "예? 그 무법 지대 말입니까? 이런! 그럼 키 드레이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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