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소설/습작
갑각나비 9. 연애 -6
하얀s
2010. 11. 23. 09:25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할지 모르겠군요."
라는 말과 함께 공작은 그 '동전 수프'에 얽힌 이야기를 퀴에르에게 들려줬다.
공작은 예전에 한 지방영주가 벌인 연회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남자는 바로 지금 만찬을 함께 나누고 있는 카이츠 바슈랭 후작이었다. 사무적인 대화를 나누던 공작과 후작은, 우연한 기회에 서로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너무나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의기투합한 둘은 일부러 시간을 내가며 만났고, 그 때마다 고금의 진미와 양서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가진 재력과 직책을 이용해 다양한 음식과 이야기를 얻어나갔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도 구할 수 없는 책들이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붉은 책, 즉 금서라고 낙인찍혀버린 책들이었다.
금지란 권유와 마찬가지라는 옛말처럼, 공작과 후작은 금서들에 대한 호기심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여기서 등장하게 된 것이 페즌 알바린 추기경이었다.
"메레 교단의 금서보관소를 아십니까, 백작? 교단은 후세에 경계를 남기기 위한 목적으로 이단서적들을 모처의 창고에 보관하고 있답니다... 저희는 그 보관소를 관리하는 책임자가 누구일지에 대해 추리해봤습니다. 그리고 결국 여기 계시는 알바린 추기경께서 그 직위를 맡고 계실 거라는 데에 결론이 모아졌죠."
공작의 추리는 정확했다. 추기경 겸 이단서적보관소의 책임자인 알바린 추기경은, 사실 공작이나 후작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금서보관소를 들락거리며 붉은 책들을 탐독해왔다. 거기에 적혀있는 금단의 지식들은 하나 같이 매혹적인 것들뿐이었다.
공작은 직접 추기경을 만나 자신들의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추기경은 그 요망에 바로 고개를 끄덕여주지는 않았다. 결국 공작과 후작의 일년에 가까운 끈질긴 요청이 있은 후에야, 추기경은 마지못해 금서를 몇 권 내줬다. 처음에는 무척 신중하고 조심스럽던 추기경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담해져갔다. 그는 공작과 후작이 금서를 읽고 감탄하는 모습에 희열을 느꼈고, 같이 금지된 책에 관한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에 충만함을 느꼈다. 그렇게 몇 번이고 이야기와 음식을 나눠 가는 사이에 추기경도 두 남자와 한 무리가 되어있었다. 여기서 세 사람은 자신들의 회합에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그래서 지은 이름이 '로반트의 식도락가'였다.
피터 덴버즈 교수가 이 로반트의 식도락가에 들어오게 된 것은 이로부터 한달 뒤의 일이었다.
"당시 저희들은 단순히 감각적으로 이야기와 음식을 좋아했을 뿐, 그것을 능숙하게 평가하는 능력이 서툴렀지요."
공작은 순순히 자신의 미숙함을 고백했다.
"그리하여 명교수로 소문이 자자하던 피터 덴버즈 교수를 모임에 초빙했던 겁니다. 교수는 저희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해주셨습니다. 덕분에 저희의 안목과 미각도 한층 더 발전하게 되었지요."
그 말에 덴버즈 교수는 흰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아무튼 그로써 네 명의 귀족들의 연합, 로반트의 식도락가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들은 매년 겨울마다 공작의 별장에서 만남을 가지며 서로의 취미를 나눴다. 각자의 업무에 바쁜 그들이었지만, 회합이 있는 겨울의 몇 주간만큼은 반드시 일정을 비워놨다. 부득이 참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에 대한 사과의 뜻으로 실력있는 요리사와 이야기꾼을 별장에 보내곤 했다.
"작년 겨울에는 다들 바쁘셔서 저만이 모임에 출석했습니다. 덕분에 그 해는 제 별장에 음유시인들과 요리사들이 가득 했지요. 하지만 아무리 신기한 장난감이 많아도 같이 놀 사람이 없어서야 금새 질리는 법입니다."
공작이 불만이라는 어투로 말하자, 후작이 끼여들었다.
"다 지난 일을 가지고 뭘 그리 섭섭해하십니까, 공작? 올해 다행스럽게도 이렇게 식도락가 분들이 모두 모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에 공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다른 세 명의 식도락가들도 마주보며 웃었다.
"그러면 이제 슬슬 본론인, 이 수프의 정체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죠."
공작은 빈 접시를 수저로 가볍게 두드리며 이야기를 재개했다.
"이번 겨울 모임을 위해, 저는 하인들에게 희귀한 서적들을 구해오도록 명했습니다. 하인들이 가져온 책들은 하나 같이 귀한 책들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던 책이 있었지요... 그게 바로 지금부터 이야기할 『49개의 요리특선』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49개의 요리특선』은 제목만 가지고 보자면 그저 평범한 요리책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내용이었다. 표지의 제목은 분명 제국어로 쓰여져 있었는데, 그 내용은 생전 처음 보는 문자들로 가득했던 것이다. 공작이 그 낯선 언어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겨울 모임이 시작되고 알바린 추기경에게 그 책을 보여준 뒤였다. 이단서적을 밥먹듯이 다뤄온 추기경은, 한 눈에 그 문자가 고대의 마법언어인 아비드어(語)라는 것을 알아봤다. 하지만 그도 그 언어의 정체만 알 수 있었을 뿐, 내용까지 해석해내는 것은 무리였다.
그 아비드어 서적은 식도락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오래 전에 명맥이 끊겼다고 여겨지는 아비드어로 쓰여졌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책의 상태로 볼 때 그렇게 오래 전의 서적이 아니라는 점이 더욱 놀라웠다. 지금 시대에 이렇게 능란하게 아비드어를 쓸 수 있는 인재가 있다니...
식도락가들은 그 책의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세기 전에 사멸해 버린 언어를 추론만으로 번역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거기서 공작이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기억하십니까, 백작? 제가 얼마 전 백작의 저택에 방문했을 때 말입니다. 저는 그 때 백작께 한 권의 번역본에 관한 질문을 드렸찌요?"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그 책은...
"사실 저희는 그 번역본의 원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원본 역시 아비드어로 되어있지요. 거기서 저는 생각한 겁니다. 원본과 번역본을 비교하면서 의미를 파악하다보면, 아비드어를 피상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공작이 어째서 체면마저 불사한 채 퀴에르의 저택을 방문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퀴에르는 조심스럽게 그 책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레드루의 『49마리』..."
공작은 짧은 휘파람으로 긍정했다.
공작은 마침 하인들이 가져온 홍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필사를 마치고 별장에 돌아온 어젯밤부터, 저희는 밤을 꼬박 새가며 『49개의 요리특선』을 번역했습니다. 물론 무척이나 더딘 속도였지만, 네번째 요리까지는 그 조리법을 파악하는 데 성공했지요. 그리고 저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신비함이 그 책에 있었던 겁니다."
"신비함이라고 하시면...?"
"요리의 재료가 너무나 특이했던 겁니다. 이걸 읽어보십시오."
공작은 품안에서 양피지 한 묶음을 꺼내 퀴에르에게 건넸다. 퀴에르는 휘갈겨 쓴 글씨들을 소리내어 읽었다.
"셰이츠 스튜'... 셰이츠의 털을 뽑은 뒤 솥에 넣고 3시간 동안 푹 삶은 다음 꺼낸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놓은 국물에 넣고 다시 1시간 30분 가량을 끓이면 완성이다... 스튜 위에 윌계수 잎을 띄우면 훨씬 좋은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조리법이란 말씀이군요. 그럼 여기에 적힌 '셰이츠'라는 건 대체 무엇입니까?"
공작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저희도 처음에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의미파악이 불가능한 아비드어라고만 여겼죠. 정답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번역 도중 피곤해진 저는 산책을 나갔다가 에코르를 만났죠. 아, 에코르는 저희 별장지기랍니다. 그 에코르가 강아지 한 마리를 를 끌고 다니며 '셰이츠'라고 부르는 걸 들었죠. 셰이츠란 건 바로 별장지기가 애지중지하던 개의 이름이었던 겁니다..."
공작은 입을 다물 줄 모르는 퀴에르에게, "아직 그런 표정을 지으시는 건 이릅니다."라고 하며 셰이츠 스튜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로반트의 식도락가들은 셰이츠의 의미를 알아내고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이름 모를 작가는 무슨 수로 자신의 책이 공작들에게 읽힐 것이며, 공작의 겨울별장에 셰이츠라는 강아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 마법 같은 우연은 미식가들을 잠시 멈칫거리게 만들었을 뿐,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울부짖는 별장지기에게서 셰이츠를 빼앗은 뒤 도살했다. 이윽고 날이 밝자, 『49개의 요리특선』의 첫 번째 요리 '셰이츠 스튜'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공작일행은 선뜻 수저를 놀릴 수 없었다. 개를 사용한 요리는 귀족들의 식탁 위에 오를 수 없다는 암묵적인 법칙이 있었던 데다가, 『49개의 요리특선』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체 모를 기운이 그들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결국 스튜가 차게 식은 뒤에야 그들은 조심스레 한 숟갈씩 스튜를 떠먹기 시작했다.
공작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그 맛에 대해 평가했다.
"정말 감동적인 맛이었습니다. 조금 전에 백작께서 맛보신 동전 수프와도 비견될만한 진미였지요.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스튜가 차가워질수록 향과 맛이 진해진다는 점이었습니다. 마치 '이 요리를 먹는 사람들은 분명 얼마간 망설일 것이므로, 요리가 어느정도 식은 다음에 먹게될 터이다'라고 예상한 듯 말입니다!"
스튜의 맛에 매혹된 식도락가들은, 서둘러 책을 펼치고 두 번째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두 번째 요리가 바로 조금 전에 퀴에르도 맛을 본 동전 수프였다. 재료가 된 동전은 지금은 사라진 북방국가 에디버의 금화였다. 워낙 귀한 물건이라 제국 내에서도 어지간한 재력가들이 아니고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동전이었다. 『49개의 요리특선』에는 그 에디버 금화 14개를 사용해야만 동전 수프를 만들 수 있다고 적혀있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공작의 겨울별장 장식장에는 그 금화가 정확히 14개 있었다.
"저희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49개의 요리특선』은 저희에게 읽히기 위해 쓰여진 책이라는 게 분명해졌으니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제 별장에만 존재할 터인 셰이츠나 에비더 왕국의 금화가 재료로 등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마법사나 예언자의 손에 의해 집필된 책일 테지요... 이제 저희가 왜그렇게 서둘러 만찬을 진행하려 했는지 아시겠습니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퀴에르는 손을 이마에 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공작."
"저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친애하는 백작. 하지만 기적이나 마법이 다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일 터인데, 분명 그것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음식과 이야기에 질려버린 저희들을 흥분시키고 있답니다."
잠자코 있던 추기경이 나섰다.
"때문에 저희 로반트의 식도락가 일동은 밀가스트 백작께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백작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이 같은 기적을 입에 넣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후작이 말했다.
"저희 모임에 가입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백작?"
갑작스런 권유였다. 퀴에르는 멍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들을 바라봤다.
"부디 저희의 요청을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백작. 저희는 꼭 백작과 이 환상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덴버즈 교수가 잠긴 목소리로 간청했다.
"저희와 함께 『49개의 요리특선』을 번역하고, 요리합시다. 아직 요리는 47개나 남아있습니다. 더 맛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더 맛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교수의 목소리가 퀴에르의 머리 속에서 몇 번이고 메아리쳤다. 물론 더 음미하고 싶었다. 이런 각별한 맛을 47번이나 더 맛볼 수 있다니... 게다가 앞으로 등장할 요리들의 재료도 궁금했다.
"동행자가 많으면 악마들도 함부로 범접하지 않는 법입니다."
공작이 멋들어진 목소리로 서사시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수반 협곡 원정』이라는 제목의 옛 서사시였다.
"같이 걸어갑시다, 백작. 이 위험하지만 매혹적인 협곡을 말입니다."
그들의 눈빛은 하나 같이 순수한 열망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퀴에르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차마 입에 담지는 못했지만, 주인공들이 식량이 떨어져 결국 서로를 잡아먹는 『수반 협곡 원정』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기 떄문이다.
한창 퀴에르가 고민에 빠져있던 그 때였다.
"실례합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왼팔에 공작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는, 장신의 여성이었다. 허리춤에는 긴칼이 빗겨 차여 있어서 어딘지 흉흉한 인상이었다. 그녀는 잰걸음으로 공작의 곁에 다가섰다.
"돌아왔군, 루자."
루자 펜블렌은 공작의 말에 목례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