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소설/습작
갑각나비 5. 식물 -1
하얀s
2010. 10. 25. 04:35
누군가 나에게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나무가 되고 싶다고 대답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땔감이 되어주고, 기둥이 되어주며, 집이 되어주는 그런 나무가 되고 싶다고 대답할 것이다. 비록 타인의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고고하게 고목으로 썩어 가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산불이 나서 불과 함께 연기와 재로 돌아간다 해도 그것도 좋을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나무가 되고 싶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어봐 주지 않는다.
아룬 만토스, 『유서』중에서
릿츠의 등에는 종기가 있었다.
처음 그가 종기의 존재를 인식한 것은 아버지와 처음으로 싸운 날 밤이었다. 무슨 이유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아버지와 싸운 그 날 밤, 릿츠는 누군가가 자신의 등을 꼬집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거울에 등을 비춰봤다. 작은 종기가 거기에 있었다. 릿츠는 고름을 짜기 위해 등뒤로 손을 뻗었지만 잘 닿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뒀다.
릿츠는 그 뒤로도 하루가 멀다하고 아버지와 언쟁을 벌였다. 처음에는 사소한 말싸움 같은 것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서로를 향한 어조가 과격해져갔다. 그리고 싸움이 끝난 뒤엔 언제나 종기로부터 번져 나오는 통증이 릿츠를 신음하게 만들었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등에서 번져 나오는 아픔이 그에게 아버지와의 싸움을 독촉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처음에는 작았던 종기는 점점 커져서, 이제는 등에 뭔가가 닿기만 해도 고통스러웠다. 고통이 심해질수록 릿츠의 말투와 성격은 거칠어져 갔다. 거기에 비례해 아버지의 언성 또한 날로 높아져만 갔다. 그리고 결국 어느 날 밤, 아버지와 말싸움 끝에 부지깽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릿츠는 홧김에 아버지를 기절시키고 집을 뛰쳐나오게 된다.
집을 나온 릿츠는 이곳저곳을 여행하다 황도 로반트에 도착하게 되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뿐이었던 릿츠는 일자리를 찾아 전전하다, 우연히 황실 근위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가정교사에게 교양 수준의 검술만 배웠던 그였기에, 근위대가 사용하는 실전 전술을 익히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즐거웠다. 아버지에게 장황한 설교를 듣는 것보다 상관에게 한 대 얻어터지는 편이 훨씬 나았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던 종기도 이제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게 근위대 생활에 재미를 붙여갈수록 무기를 다루는 릿츠의 손놀림도 많이 익숙해졌다. 곧 그는 상관으로부터 노력을 인정받고, 근위대 최고 실력자들이 모여 있다는 1번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릿츠는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루자 펜블렌.
황실 근위대 1번대의 병사들은 하나 같이 뛰어난 기량을 가진 자들이었지만, 대부분 괴짜들이었다. 여색을 병적으로 즐기는 자들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남색을 즐기는 자들도 있었다. 또 어떤 병사는 토끼나 쥐 같은 작은 짐승을 기르다가 밟아 죽이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기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눈에 띄었던 게 바로 루자였다. 근위대에서 유일한 여자라는 점이나, 사오간들도 당해낼 수 없는 천재적인 검술도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원인 중 하나였지만, 그것보다 훨씬 놀라운 것이 있었다. 바로 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이다. 릿츠는 '잠들지 않는 루자'의 소문을 1번대에 들어오기 전부터 익히 들어왔다. 소문에 의하면 루자는 근위대에 들어온 이후 단 하루도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병사들의 그 수근거림을 그다지 신용하지 않았다. 여자에 굶주린 병사들이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해서 소문을 퍼트리는 것이라고만 여겼다.
릿츠가 불침번을 서던 어느 날 밤, 그는 소문의 진위를 직접 확인해볼 요량으로 루자가 잠들어 있는 숙소(일단 여자였기 때문에 따로 작은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다)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숙소에 그녀는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숙소를 나온 릿츠의 귀에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에 홀린 듯 그는 소리를 따라가자 거기에 루자가 있었다. 그녀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술이라고 하기보다는 춤이라고 할만큼 아름다운 움직임이었다. 릿츠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말을 걸어봤다.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루자는 검을 멈추지 않고, 허공을 자르는 소리 사이로 대답했다.
"시간을 베어 죽이고 있지."
릿츠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러자 루자는 검을 내려놓고 그를 돌아봤다.
"릿츠 아르바스... 맞지?"
릿츠는 땅바닥에 주정낮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앉지 그래?"
릿츠가 권했지만 루자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앉지 않아."
"어쨰서?"
"앉을 수도, 누울 수도, 기댈 수도 없는 병에 걸렸거든."
너무나 당연하다는 투의 대답에 릿츠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인가 릿츠는 한밤중에 루자를 만났다. 물론 그때마다 어김없이 루자는 '서있었다'. 릿츠는 루자에게 검술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루자는 자질도 없는 놈한테 검을 가르치는 건 시간낭비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부탁할 때마다 검을 부딪혀줬다.
그렇게 이야기와 검을 나눠가면서 둘은 점점 친해져갔다. 하지만 아무리 허물없는 사이가 되어도, 릿츠는 그녀의 '병'에 관한 것은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된다는 무언의 압박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루자에게 그녀에게 관한 것을 묻기를 포기한 릿츠는, 대신에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버지와의 싸움과 여동생에 관한 추억들, 등 뒤에 나있는 작은 종기, 고향의 정경 등을 두서없이 지껄여댔다. 재미없는 이야기였지만 루자는 지루하다는 표정 하나 짓지 않고 언제나 그의 이야기를 경청해 줬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릿츠가 창고에서 훔쳐온 포도주를 연거푸 마신 루자는 약간 취한 표정으로 기묘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옛날 옛날에 한 빌어먹을 마법사가 살고있었어. 그 마법사는 한 남자를 미친듯이 증오했는데, 그래서 남자를 죽이기 위해 진흙으로 인형을 만들었지. 인형은 누구보다 강한 팔과 무엇보다 빠른 다리를 가지고 있었어. 하지만 그 대신에 인형은 잠들 수 없는 몸이었지... 마법사의 원한과 증오는 인형에게 휴식의 여유를 줄 정도로 가벼운 게 아니었거든... 인형은 붉게 충혈된 눈을 번득이며 그 남자를 죽이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났지..."
릿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자는 소리내어 웃으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좀 취했나보군... 이상한 이야기였지?"
릿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이야기가 그의 흔들리던 결심을 굳게 만들었다. 릿츠는 힘주어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불렀다.
"루자."
루자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릿츠를 바라봤다. 릿츠는 그녀에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나와 결혼해 주겠어?"
곧이어 루자는 밤하늘 저 멀리까지 울려 퍼질 정도로 큰 웃음소리를 냈다. 웃음은 곧이어 기침으로 바뀌었고, 작은 눈물방울로 바뀌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웃긴 소리였나?"
"취했구나?"
"안 취했어. 이건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나는 너를..."
루자는 얼굴에서 웃음을 서서히 지워갔다.
"멍청한 소리하지 말고 술이나 마셔."
"루자!"
"릿츠."
루자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못박았다.
"나는 앉을 수도, 누울 수도, 기댈 수도 없어. 물론 너한테도 기댈 수 없지. 그러니까 허튼 소리는 하지마."
그녀는 남아있는 술을 몽땅 비워버리고는, 검을 뽑아 밤을 향해 휘두르기 시작했다. 릿츠는 큰 소리로 그녀를 설득했지만, 모조리 그녀의 검 휘두르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그는 잠자코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번에야말로 기필코, 기필코... 그렇게 그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릿츠에게 다음 번은 오지 않았다.
밀가스트 백작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다음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