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소설/습작

갑각나비 2. 태엽 -1

하얀s 2010. 10. 11. 22:08

2. 태엽



 인간은 시계 속에 시간을 가두려 했지만, 거기에 갇힌 것은 인간 자신이었다.

               -젠트 볼브, 『어느 자정』중에서



 "사실 아버지께선 절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차라리 증오하고 있다 하는 편이 더 어울리겠군요. 고작 증조부시절에 얻은 남작직위와 보잘것없는 칭호를 마치 개국공신이나 교회의 성인들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아버지께 있어, 재주를 지니지 못한 저는 명예로운 가문의 오명이자 눈엣가시지요. 아버지께서는 겉으로는 저를 앆주고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십니다. 하지만 가끔씩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아버지의 폭언과 저주는... 전 참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는 수밖에는... 제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을의 술집에서 허드렛일을 거들게 된 것도 잠시나마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습니다. 전 아버지가 밉습니다. 그래서 지금 대륙의 귀빈께서 제게 베풀어주시려는 은총을, 송구스럽게도 달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군요. 만일 진정으로 제게 왼팔이 생긴다면 아버지께서는 다시 그 지긋지긋한 일에 저를 몰아넣으실 겁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쳐다보기만 해도 토악질이 나는 그 시계를 만드는 일에..."

 말끝을 조심스레 흐리는 그렉을 향해 레이즈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응수했다.

 "시간이란 이름의 죄수선에 타고 바다를 건너는 우리 죄수들은 평생동안 배가 가라앉길 염원하지만, 아아 이 얼마나 평온하고 얕은 바다인가. 우리의 인생도 이리 잔잔한 무늬였다면 좋으련만."

 그렉은 레이즈를 멀뚱거리는 눈으로 봤다.

 "'시간 바다의 죄수선'의 한 구절이죠. 레드루의 대표적 서사시입니다만 아비드어로 쓰여진 터라 역시 현대어로 읊으니 제 맛이 안 나는군요."

 "부끄럽습니다. 제가 워낙 서책에 대해 무지해서..."

 "아닙니다. 제가 괜한 잘난 척을 했군요. 그저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니 불현듯 떠올라 읊어봤을 뿐입니다. 그 이야기에서는 결국 그 죄수들이 폭동을 일으켜 배를 제압하고 축제를 벌입니다. 하지만 선장과 조타수를 잃은 그 배는 암초에 부딪히고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죠. 하지만 배가 가라앉는다는 사실을 안 뒤에도 죄수들의 축제는 계속되었답니다... 슬픈 이야기죠. 시간을 거스르는 작업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일 테지요."

 레이즈는 웃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가라앉는 것이 있으면 솟아오르는 것도 있는 법,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는 것입니다. 비록 무엇이 떠오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럼 시작할까요?"

 그리고는 왼손을 펼쳤다.



 10월 17일. 오후 1시 27분.

 아버지는 '시계의 왕'이다.
 그 누구보다 시계를 사랑했고, 또 아름답고 정교하게 만드셨기에 시계의 왕이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시계의 왕이란 명칭이 처음 이 세계에 나온 것은 아버지의 할아버지. 즉 내 증조할아버지 시절의 일이라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처음으로 톱니바퀴를 이용한 태엽 시계를 발명해 내신 위대한 기술자였다. 증조할아버지의 태엽 시계는 곧 황제 폐하께 바쳐졌고, 황제 폐하는 그 새로운 발명품에 감탄하며 증조할아버지에게 '시계의 왕'이란 칭호와 남작의 작위를 하사했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시계의 왕의 칭호를 얻은 것은 할아버지였다. 증조할아버지가 시계의 기계적 측면에 몰두하셨다면, 할아버지는 예술적 측면을 더 중시했다. 나무로 된 시계의 겉면에 집이나 사람, 귀여운 들짐승들 따위를 미세한 조각칼로 파내고 조각해 넣음으로써, 시계는 드디어 단순한 시간만을 토해내는 기계장치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품, 장식품으로써의 가치까지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시계의 왕이 된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장점을 모두 이어받아 기술적, 예술적으로 태엽 시계를 한 차원 발전시켰다. 그 중에서 특히 눈부신 성과는 내가 태어나기 2년 전에 아버지가 수도인 '로반트'로 직접 가서 만든, 저 유명한 '로반트의 시계탑'이었다. 제국 내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설계에서부터 완공까지 무려 9년 11개월 3시간의 세월이 들어간 금세기 최고의 시계였다. 본래 황제 폐하께서 처음 아버지에게 대륙에서 가장 높은 시계탑의 건설을 명했을 때 많은 귀족들이 반대했다고 한다. 저 유명한 50단검의 황제, 레비지스크가 로반트를 수도로 정하고 황궁을 지을 때, "그 어떤 탑도 황궁의 첨탑보다 높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황제는, "레비지스크 님도 이 황홀한 시계를 봤더라면 그런 말씀을 못 하셨을 것이다."라고 일축한 뒤, 그대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한다.
 나도 어렸을 때 딱 한 번 그 로반트의 시계탑을 본적이 있었다. 신의 나라를 향해 뻗어 올려진 듯한 그 시계탑은, 마치 커다란 짐승이 눈을 뜬 것 같은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목이 긴 외눈의 짐승은 나를 말없이 응시하며 그 커다란 눈을 통해 조용히 그때의 시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내 생애에 있어 다시는 잊지 못할 기적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때가 몇 시였더라?
 어쟀든, 나는 그 시계의 왕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시계의 왕이 될 수 없다. 나 역시 시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는 아버지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계를 만드는 능력에 있어서는 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아버지 아래의 견습공들보다도 훨씬 뒤졌다. 시계를 만드는 것에는 엄청난 노력과 정신력, 그리고 천부적인 자질이 있어야했다. 나는 그 중 어느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거기다 평범한 사람들이 으레 가지고 있는 '어떤 것'도 없었다.
 나는 외팔이였다.



 10월 17일. 오후 1시 31분.

 나는 다시 시계를 확인해 본다. 1시 31분. 집을 나서기까지 아직 29분의 여유가 있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19년 2개월 3일 6시간 정도전에, 처음으로 이 세상의 빛을 봤을 때부터, 그러니까 태어났을 때부터 외팔이였다. 그리고 내 어머니는 난산 끝에, 내가 태어나고 나서 7일 4시간 정도 후에 죽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자식이 외팔이라는 사실은 아버지를 적지 않게 실망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한 팔만 버둥거리는 아이에게 시계의 조립을 가르치려 애썼다. 하지만 그 아이는 위대한 시계의 왕의 아들이라고 하기에는 집중력, 정신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자신의 아들이 시계의 왕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버지는 곧 칭호의 대물림을 포기했다. 그리고 시계 제작 견습공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에게 시계의 왕의 칭호를 물려주기로 했다.
 그렇지만 그 일로 인하여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식어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아버지는 오히려 그 전보다 사랑과 정성으로 나를 키우기 시작했고 나 역시 훌륭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한 팔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나름대로 배웠다. 아버지는 시계를 살아하시는 것만큼 나를 사랑해주셨고, 나 역시 시계를 사랑하는 것만큼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러던, 외팔이였던 내가, 외팔이가 아니게 된 것은 바로 4일 전 10월 13일, 오후 9시 27분 경의 만남이 있은 후였다. 설마 이런 작은 산골 마을에, 전설에서나 나타날 법한 기적의 인물이 나타날 줄은 그 누가 알았겠는가? 내게 온전한 팔이 생긴 것을 누구보다 기뻐한 것은 역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이제야 아들에게 시계의 왕의 칭호를 물려줄 수 있을 거라 여기고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새로운 팔만을 얻었다고 해서 갑자기 없던 자질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다 새로운 팔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실수를 일으키기 십상이었고 아버지는 다시금 나에게 기대를 거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나 역시 변함없이 아버지를 사랑했다.


 10월 17일. 오후 1시 59분.

 이제 슬슬 나갈 시간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옷매무새를 살핀 후 작업실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시계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나는 다른 일을 찾아야했다. 물론 우리 집은 풍족했고 내가 특별히 일을 해야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빈둥거리기만 하는 것은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었다. 물론 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리하여 내가 하는 일은 마을 술집 중 하나인 '하얀 만월'에서 허드렛일을 거드는 것이었다. 우리 마을은 그리 크진 않았지만 엔자 지방에서 수도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항상 여행객들로 술집과 여관이 붐볐다. 거기다 쭉 일을 거들어 오던 밀턴이, 가업을 잇기 위해 술집 일을 그만뒀기 때문에 하얀 만월에서는 한시바삐 장정 한 명을 구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막상 5년 9개월 8일 4시간쯤 전에 한 외팔이가 일을 하겠다고 찾아오자 하얀 만월의 주인인 도즌 씨는 약간 망설이는 눈빛을 지었다. 나는 한 팔만으로도 꽤 무거운 술통들을 거뜬히 들어올릴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또 선물로 벽걸이용 태엽 시계 하나를 들고 간 덕분에 겨우 하얀 만월에서 일할 수 있게되었다. 그 벽시계는 오래되긴 했지만 상당히 고가의 물건으로, 우리 마을에서 집에 시계가 있는 곳은 우리 집과 하얀 만월뿐이었다. 하얀 만월이 우리 마을에서도 가장 유명한 술집이 된 데에 그 시계가 한몫 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사실 그 시계는 하얀 만월에 선물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나는 일할 때에도 가끔씩 시계를 보고 그때 그때의 시간을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했다. 때문에 나는 유년 시절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 시계에 둘러싸여 보냈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부드럽게 나무랐지만 그렇게 책망하지는 않았다. 시계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자식의 모습에서 당신의 어렸을 때를 본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랬기 때문에 나는 하얀 만월에서 일하기로 결심한 후 집에 있는 시계 중 하나를 들고 그곳에 매달아 놓았다. 그것은 도즌 씨를 위해서도 여행객을 위해서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시계를 통해 '지금'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10월 17일. 오후 2시 12분.

 술집에 들어선 나는 일단 시계를 확인해 본다. 2시 12분. 3분 일찍 도착했다. 나는 곧 도즌 씨에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도즌 씨?"

 "오오, 그렉 왔구나."

 도즌 씨는 인자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준다. 팔이 생기고 나서 처음 하얀 만월을 찾았을 때의 도즌 씨의 표정은 정말 가관이었다. 다른 마을 사람들도 나를 볼 때마다 내 새로운 팔 또는, 그들의 오래된 눈을 의심했지만 곧 익숙해져갔다.

 "아버지께서는 안녕하시니?"

 바로 어제인 10월 16일 오후 2시 13분에도 똑같은 질문을 했는데도, 도즌 씨는 언제나 아버지의 건강을 묻는다. 약간 가식적인 것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싫지 않았다.

 "네, 건강하세요."

 웃으며 대답한 후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술집 안은 아직 그렇게 사람들이 붐비지 않았다. 나는 우선 벽시계로 다가갔다. 태엽을 감을 시간이었다.
 끼릭, 끼릭, 끼릭.
 이 뻑뻑하면서도 기계적인 첨단의 소리는 언제나 나를 흥분시켰다. 태엽을 감아주지 않으면 움직임을 멈추는 이 시계처럼, 내 심장도 태엽 감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 어느 샌가 멈춰버릴 것만 같았다.
 이윽고 태엽 감는 일이 끝나자 나는 저녁 시간에 몰려든 손님들에 대비해 술통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아직 양손을 쓰는 게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힘들지는 않았다. 대강 일이 일단락 된 것은 4시 17분이었다. 이제 곧 수많은 여행객들이 피로에 찌든 얼굴을 지은 채 몰려올 것이다. 나와 도즌 씨는 그에 앞서 이른 저녁 식사를 했다.

 "그나저나 아무리 봐도 신기하다니까."

 식사 도중 도즌 씨가 나를 보며 말했다.

 "무엇이요?"

 "네 그 왼팔 말이다."

 도즌 씨는 약간 굵은 손가락으로 내 새로운 팔을 가리켰다.

 "어떻게... 다시 생길 수 있는 거냐?"

 "저번에도 말씀드렸짢아요? 저희 집에 부..."

 "아, 알고 있다. 그냥 볼 때마다 놀라서 해본 말이다."

 "네."
 
 도즌 씨는 약간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무리도 아니었다. 10월 13일, 오후 9시 27분까지 왼팔이었던 내가 갑자기 온전한 양손을 흔들며 다니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이후 우리는 엔자 지방의 한 귀족 집에서 발생했다는 화재, 룬단 산에서 나타났다는 용, 여행객들을 노리고 돌아다닌다는 식인귀 등등의, 여행객들이 그들의 짐과 피로와 함께 가져온 근거 없는 소문들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우리가 식사를 거의 끝마친 4시 39분쯤에 술집 문이 열리고 손님들이 들어왔다.

 "실례합니다아."

 들어온 것은 두 명의 여자였다. 먼저 들어온 것은 중간 정도의 키에 금발을 가진 귀여운 여자였다. 나와 엇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그녀는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으로 사뿐사뿐 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뒤이어 들어온 여자 역시 같은 금발을 가진 미녀였다. 하지만 훤칠한 키와 어린 차가움은 바라보는 이를 압도하는 뭔가가 있었다. 거기다 허리춤에 매여있는 장검 한 자루가 그녀의 분위기를 더욱 차갑게 만들고 있었다.
 두 여자는 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서둘러 그녀들에게 주문을 받으러 갔다.

 "뭘 드릴까요?"

 내가 말을 걸자 키가 작은 쪽의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고기 스튜!"

 키가 큰 여자도 곧이어 조용히 말했다.

 "오믈렛."

 "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잠깐."

 주문을 도즌 씨에게 전하려는 나를 키가 큰 여자가 불러 세웠다.
 
 "묻고 싶은 게 있다."

 "네. 말씀하세요."

 그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최근 이 마을에 기적이 일어난 일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