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소설/습작
폴라리스 랩소디 1 pp 278~289
하얀s
2010. 4. 22. 04:09
바람에 의해 나가떨어졌던 트로포스는 낑낑거리면서도 하리야를 향해 이죽거렸다.
세실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파킨슨 신부가 간신히 새로 만들었던, 그래서 피뢰 장치나 단단한 마감 공사 같은 거이 아직 더해지지 않아서 부실한 교회 지붕이 이글거리며 불타고 있었다. 이런 맙소사, 저놈 날 태워버릴 생각이었군!
세실과 모든 해적들, 심지어 숨어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테리얼레이드의 밤의 사내들까지도 넋빠진 표정으로 불타는 교회 지붕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기적을 만들어낸 트로포스만은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등을 힐끗 바라보았다. 혹시 나타나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트로포스의 소망을 무시하며 나타난 흰 점은 시계 문자판의 7의 위치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트로포스는 낙천적이 되기로 결심했다. 열한 번이니까 앞으로 네 번은 더 쓸 수 있군. 여덟번째는 좀더 신경 써야겠어. 그러나 조금 후 들려온 주위의 웅성거림에 고개를 들었을 때 트로포스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여덟번째가 곧장 다가온 것이다.
"계절의 하얀 수의, 겨울 하늘의 우수, 눈꽃이여!"
"말도 안 돼!"
트로포스는 악을 쓰며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말이 되고도 남았다. 봄의 향취가 물씬 묻어나는 밤하늘의 가장 어두운 갈피로부터 희디흰 눈폭풍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라이온은 기겁하며 온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어디서부터인지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쏟아져내린 눈은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차가움보다 수백 배는 더 차가웠다. 그리고 라이온이 평생 본 것 중에서 가장 거대한 눈송이들이었다. 거의 흰 꽃송이라고 착각될 만큼 거대한 눈송이들은 모두 교회 건물을 향해 수렴되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 위로 쏟아지는 흰 눈꽃들은 발그스름하게 물들어 극히 매혹적이었지만 해적들은 공포를 먼저 느꼈다.
광포하게 일어난 흰 수증기가 교회 위를 솟구쳐오르는 가운데 눈꽃의 집중 공격을 받은 화염은 순식간에 사그러들었다. 그리고 교회 안으로부터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그 선장에 그 부하로군. 숙녀를 대하는 에티켓에 자신이 없으니 터프한 모습을 보여주는 유치함은 십대나 저지르는 귀여운 실수 아냐?"
키는 그만 실소하고 말았지만 트로포스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트로포스는 고함을 내지르며 지팡이를 부여잡았다.
"젠장, 귀엽다고 했나? 그렇다면 애교 좀 더 떨어줄까? 벼락아, 번개여!"
트로포스의 고함은 눈폭풍 속에 번득이는 벼락이 되어 테리얼레이드 교회를 강타했다. 쾅쾅거리는 천둥 소리와 함께 내리꽂힌 벼락들은 한 점을 향해 쏟아지는 폭포처럼 테리얼레이드 교회의 뾰족한 지붕으로 수렴되었다. 하지만 어떤 강력한 벼락이라하더라도 눈을 태울 수는 없다. 트로포스는 격노하여 지팡이를 쳐들었지만 그때 키 드레이번이 트로포스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관둬. 이젠 충분하다."
"선장님?"
트로포스는 입술을 깨물며 키를 바라보았지만, 키는 이미 몸을 돌리고 있었다. 키는 그대로 교회 정문을 향해 외쳤다.
"이봐, 마법사! 당신의 힘은 잘 알겠군. 하지만 당신도 언제까지 우리 모두를 막아낼 수는 없다. 더욱이 나는 절대로 막을 수 없을걸. 마법사들에겐 익숙지 않은 것이고, 마법사와 그걸 하는 사람도 얼간이라지만, 어때? 협상을 해볼까."
키의 말에 가장 크게 놀란 것은 다름아닌 트로포스였다. 흠칫하는 표정으로 키의 뒷모습을 보던 트로포스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생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트로포스의 생각은 순식간에 외침이 되어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키는 고개를 돌려 트로포스를 바라보았다. 트로포스는 형형히 타오르는 눈빛으로 키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내 자존심을 생각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 안쪽으로부터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완연한 세실의 목소리가 들려왔따.
"그래? 지지 않았다고? 이번엔 얼마나 터프한 모습 보여줄 생각인데?"
"넌 상상도 못했던 것일 게다!"
트로포스는 속으로 뒷말을 이었다. 나 역시 상상도 못해 봤던 것이야. 과연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트로폿느느 곧 자신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수 있어. 나는 마법사야! 트로포스는 이를 갈면서 지팡이를 힘껏 들어올렸다. 곧이어 벌어진 광경은 다시 한번 조롱을 보내려 들었던 세실로 하여금 그 조롱이 목구멍 어디쯤에서 걸려버리게 만들었다.
"으아아압!"
팍! 하는 소리와 함께 트로포스는 지팡이를 땅에 꽂았다. 뭉툭한 지팡이는 마리 예리한 창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땅을 파고들어 꼿꼿이 섰다. 트로포스는 한쪽 무릎을 꿇은 다음 두 손으로 지팡이를 움켜쥐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에서 거침없는 주문이 흘러나왔다.
마지막 눈송이 몇 개가 트로포스의 어깨와 머리에 떨어졌지만 트로포스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뱃속에서 불덩이가 굴러다니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트로포스는 주문을 멈추지 않았다. 오로지 세실만이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 아무도 파악하지 못하는 사이에 트로포스의 주문이 이 세계의 경계를 뛰어 넘었다. 교회 안으로부터 세실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이 미친놈, 당장 멈춰! 아무리 불법 마법사라도 그런 짓은 할 수 없어!"
세실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린 그 순간, 트로포스의 주문은 이 세계와 또다른 세계 사이의 장벽에 날카로운 흠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트로포스가 영창한 금단의 주문은 저 세계의 <무엇>을 포착했다. 가닿아서는 안 되는 것.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것. 그러나 트로포스의 주문은 모든 금기와 모든 슬픔을 꿰뚫고 그것에 직접 가닿았다.
"됐어!"
트로포스는 눈을 번쩍 떠 핏발선 눈동자를 보이며 외쳤다. 바로 그 순간 트로포스가 붙잡은 <그것>의 분노에 찬 포효가 테리얼레이드의 하늘 위로 길게 울려퍼졌다.
"......!"
라이온은 핼쓱해진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바라본 하늘은 미쳐 날뒤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들었던 표효는 불타는 증오와 폭풍 같은 분노 이외에 어떤 의미도 담겨 있지 않은 순수한 외침이었다. 그것은 소리조차 아니었다. 그때 교회 안으로부터 세실의 신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프, 프, 프린스 오브 구울Prince of ghoul!"
하리야 선장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하리야는 급히 트로포스를 돌아보았고 그가 눈을 뒤집은 채 하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며 헛바람을 삼켰다. 이 사태에 대한 어떤 설명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주위의 해적들은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며 뒤로 물러났다. 트로포스가 입을 열자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그리고 아이도 아니고 노인도 아닌 기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해냈어! 구울의 위대한...... 왕자여!"
하리야는 재빨리 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키는 벌써 복수를 뽑아든 채 하리야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키는 넋빠진 표정을 하고 있는 하리야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리야! 지금 트로포스 놈이 불러내는 것이 뭔가? 구울의 왕자라고?"
"그, 그렇습니다. 구울의 왕자, 언데드의 수호자, 판데모니엄Pandemonium의 하이마스터...... 막아야 합니다!"
하리야의 마지막 말은 그냥 찢어지는 비명 비슷했다. 열풍이 휘몰아치고 메스꺼운 냄새들이 진동하는 가운데 밤하늘은 암적색으로 이글거렸다. 키는 혼란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다.
"신학자나 악마 숭배자놈들이나 관심 가질 멀미 나게 기나긴 호칭 같은 건 집어치우고 말해. 트로포스가 뭔가 골치 아픈 것을 불러내었단 말이지? 그런데 트로포스가 그 녀석을 알면서 불러냈다는 것은, 그 녀석을 지배할 자신이 있기 때문 아닌가?"
하리야는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너무 기가 막힌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배한다고 하셨습니까? 인간이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를? 차라리 고래를 지배한다고 하십시오!"
"그거면 대답이 됐어." 키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외쳤다. "오닉스! 놈을 기절......"
바로 그 순간,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는 지상에 도래했다.
아무도 그것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자들이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형상에서 빗나가 있고 색채에서 일탈해 있었지만 단지 그곳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모든 신의 피조물에 대한 끔찍한 모욕이었다. 신이 창조한 어떤 빛도 그것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기에 아무도 그것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피조물도 볼 수 없을지언정 신을 느끼는 것만큼이나 악을 느끼는 데 민감한 인간들만은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암흑을 덮는 암흑이었고 불을 태우는 불이었다. 그림자를 감추는 그림자였고 죽음을 죽이는 죽음이었다. 교회 속에서 세실은 경탄과 공포 중 어느 감정에 몸을 맡겨야 될지 몰라하며 덜덜 떨고 있었다. 세상에 어떤 마법사가 지옥의 권세를 이 땅 위에 직접 불러낼 수 있다는 말인가. 대마법사 하이낙스가 부활하지 않은 바에야.
지상에 도래한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는 또다시 노호했다.
"......!"
신이 창조한 어떤 바람도 그것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는 없었기에 테리얼레이드의 한르 위로는 실제로 어떤 소리도 울려펴지진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지옥의 일곱 지배자들의 하나인 자의 목소리였다. 고막이 터져나가는 고통에 신음하는 살마들 사이로 구울의 왕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우둔의불꽃을넘어서이다지도무례한짓으한것은도대체어떻게생겨먹은놈인가."
아무도 입을 열 생각을 못하는 가운데, 트로포스는 두 팔을 벌리며 기성을 질렀다.
"나요, 구울의 왕자여!"
구울의 왕자는 무한한 경멸이 가득 담긴 눈으로 트로포스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조그마한가슴속에자신의파멸을이끌수있을정도로치명적인용기를담을수있다는사실에경탄스럽구나미력한인간아네놈이정녕모래알을던져대양에소용돌이를만들려했다는말이더냐."
트로포스는 눈가에 흘러넘치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낸 다음 외쳤다.
"그렇소! 구울의 왕자여,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여! 그리고 나는 해냈소. 바로 내가 신의 창조물들 사이에 당신을 서게 했단 말이오. 그것을 인정하시오!"
라이온은 자신의 턱이 모조리 부서져나가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이를 부딪히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구울의 왕자는 트로포스의 말에 비웃음으로 대답했다.
"인정한다어리석은놈그리고네소망역시알고있다너스스로도그진정한의미를모르는소원을."
구울의 왕자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기분이 이상하군."
파킨슨 신부는 테리얼레이드 방향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낮 동안 기나긴 여정을 소화해 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쳐버린 율리아나 공주는 오스발이 만들어준 잠자리에 들어가 잠든 지 오래였다. 데스필드와 파킨슨 신부, 그리고 오스발 세 명은 모닥불 주위에 모여앚아 다른 이들의 정적으로 자신의 정적으 감추며 앉아 있었다. 파킨슨 신부가 갑자기 입을 열자 데스필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교회가 걱정된다는 식의 말을 하려는 거요, 신부님 당신? 설마 그렇진 않을 거 같은데. 지금 이 순간 테리얼레이드에 교회는 없고 교회터만 남아 있을 거라는 데 본인은 뭘 걸어도 좋을 거 같소만."
"글쎼. 나도 그건 알고 있네. 다만 기분이 이상해. 상당히 불길한 기분이 드는군. 그런데 교회가 파괴되는 것보다 더 불길한 일이 뭘지 모르겠군. 으음."
파킨슨 신부는 말끝을 흐리며 다시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모처럼 찾아온 대화의 시간을 그냥 보내기가 아쉬웠다. 그래서 데스필드는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발 당신, 노예였다고?"
"그렇습니다."
"아아, 어려워할 것 없수. 다른 나라는 어떨지 몰라도 테리얼레이드 사람들은 그런 것 신경 안 써. 귀족 당신이든 노예 당신이든, 에, 신부님 당신, 용서하쇼. 설령 신부님 당신이라도 칼로 찌르면 죽는 건 똑같아."
파킨슨 신부는 쓰게 웃어버렸지만 오스발은 점잖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보복은 다르겠지요."
"뭐요?"
"노예를 죽이면 아무 처벌이 없습니다. 하지만 귀족을 죽이면 국사범(국가나 국가 권력을 침해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 또는 그런 죄를 지은 사람)으로 처형되겠죠. 하물며 신부를 죽였다면...... 신부님은 죽일 수가 없습니다."
"무슨 소리. 신부 살해라면, 본인이 기억하기로도 꽤 되는 걸?"
오스발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분들은 모두 순교자로 추서(죽은 뒤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줌)되었죠."
데스필드와 파킨슨 신부가 동시에 이채로운 눈빛으로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스발은 모닥불 끝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눈을 고정시킨 채 조용히 말했다.
"살해자의 목적이 한 인간의 말살이라면 신부의 경우는 살해할 수 없습니다. 미개인이나 이교도들이 신부님의 육신을 죽일 수 있을진 모르지만, 그분들은 모두 순교자가 되지요. 이 경우 살해자는 오히려 신부님들에게 영생을 부여한 것 같습니다."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끋거였다.
"아, 죄송합니다. 비꼬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파킨슨 신부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데스필드는 정수리를 벅벅 긁어대다가 말했다.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군. 하지만 본인에게 물어본다면, 죽고 나서 무덤에 금칠해 줄 바엔 살아서 금화 한 닢 받는 것이 훨씬 행복하겠다고 말하겠어."
오스발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저라도 그렇게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신부님의 경우와 다른 분들의 경우는 다릅니다. 신부님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까."
"원한다고?"
"예. 죽기를 원하는 자를 죽이는 것이 살해가 될 수 있을까요?"
밤이 그 자체의 농밀한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별들이 구름 뒤로 숨었다 나타났다 하기를 몇 차례. 모닥불은 작게 사그라들고 있었지만 아직 꺼지지는 않았다. 파킨슨 신부는 장작을 부러뜨리며 저녁 기도를 읊조리고 있었고 나무 우듬지(나무의 꼭대기 줄기)에 기대어누운 데스필드는 그런 신부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장작을 던져넣은 파킨슨 신부는 잠든 오스발을 돌아보며 기도하던 음조 그대로 말했다.
"노예이길 원하는 자를 노예라고 부르는 것은 모욕이 될 수 있을까?"
"어라? 신부님 당신, 왜 갑자기 앵무새 흉내를? 뭐, 원래 신부님 당신네들은 신의 앵무새라고 하지만."
데스필드의 이죽거림(이기죽거리다의 준말 : 자꾸 밉살스럽게 지껄이며 짓궂게 빈정거리다)에도 불구하고 파킨슨 신부는 잠든 오스발을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대신 그의 주먹만은 그의 몸과 따로 떨어진 생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민첩하게 움직여 데스필드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데스필드는 파킨슨 신부의 주먹을 살짝 피한 다음 다시 말했다.
"아까 발 당신이 했던 말을 조금 바꾼 거잖습니까?"
"그래. 저 전직 노예 친구가 하고 싶었던 말은 혹시 그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혹시 자네 노예의 정의가 뭔지 아나?"
데스필드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모욕적이군요! 본인을 그렇게 똑똑한 놈으로 보다니. 당연히 모릅니다."
"......자비로우신 신이여, 부디 이 시련을 이겨낼 힘을 주소서. 이 빌어먹을 악마의 사생아 녀석아. 잘 들어라. 노예는 인권이 없는 인간이다. 그리고 인권은 인격을 유지 발전시킬 권리고."
"흐음. 인격은 뭐냐고 물어볼 차례인 거 같군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사람만의 고유하고 보편적인 성격이다. 물론 이런 논법은 교회가 인정하는 논리는 아니다만, 대개의 나라의 법전은 이런 논법을 따르지."
"신부님 당신은 본인에게 어떤 복음을 주시려는 겁니까?"
"뭐가 사람다운 거냐?"
아무렇게나 대답하려던 데스필드는 문득 입을 닫고는 파킨슨 신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파킨슨 신부는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데스필드를 바라보며 자신이 진지한 대답을 기대하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데스필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말씀해 보슈. 하시고 싶은 말이 뭔데요?"
"나는 뭐가 사람다운 것인지를 말하지는 않겠다. 내 대답이 네녀석의 귓구멍을 조금이라도 파고들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을 생각해 보거라. 만약 사람을 버린 자라면, 인격이 없다 해도, 그것을 유지 발전시킬 인권이 없다 해도 뭐 불편할 것이 있겠느냐? 노예라 해도 뭐 불편한 것이 있겠느냔 말이다."
데스필드는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타인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애쓰는 것은 더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데스필드는 대부분의 살마들이 그러하듯 깊이 생각하는 척하다가 말했다.
"하지만 어느 놈 당신이 사람을 버린단 말입니까."
"그래...... 어느 놈이 그러겠냐. 생각을 좀더 해봐야겠다."
파킨슨 신부는 뜻밖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래서 데스필드는 안도하며 말할 수 있었다.
"이만 주무쇼, 신부님 당신. 유령 당신도 당신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으니까 삶들 주위를 떠돈다고 들었씁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당신이 어떻게 사람을 버리겠습니까?"
세실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파킨슨 신부가 간신히 새로 만들었던, 그래서 피뢰 장치나 단단한 마감 공사 같은 거이 아직 더해지지 않아서 부실한 교회 지붕이 이글거리며 불타고 있었다. 이런 맙소사, 저놈 날 태워버릴 생각이었군!
세실과 모든 해적들, 심지어 숨어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테리얼레이드의 밤의 사내들까지도 넋빠진 표정으로 불타는 교회 지붕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기적을 만들어낸 트로포스만은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등을 힐끗 바라보았다. 혹시 나타나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트로포스의 소망을 무시하며 나타난 흰 점은 시계 문자판의 7의 위치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트로포스는 낙천적이 되기로 결심했다. 열한 번이니까 앞으로 네 번은 더 쓸 수 있군. 여덟번째는 좀더 신경 써야겠어. 그러나 조금 후 들려온 주위의 웅성거림에 고개를 들었을 때 트로포스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여덟번째가 곧장 다가온 것이다.
"계절의 하얀 수의, 겨울 하늘의 우수, 눈꽃이여!"
"말도 안 돼!"
트로포스는 악을 쓰며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말이 되고도 남았다. 봄의 향취가 물씬 묻어나는 밤하늘의 가장 어두운 갈피로부터 희디흰 눈폭풍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라이온은 기겁하며 온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어디서부터인지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쏟아져내린 눈은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차가움보다 수백 배는 더 차가웠다. 그리고 라이온이 평생 본 것 중에서 가장 거대한 눈송이들이었다. 거의 흰 꽃송이라고 착각될 만큼 거대한 눈송이들은 모두 교회 건물을 향해 수렴되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 위로 쏟아지는 흰 눈꽃들은 발그스름하게 물들어 극히 매혹적이었지만 해적들은 공포를 먼저 느꼈다.
광포하게 일어난 흰 수증기가 교회 위를 솟구쳐오르는 가운데 눈꽃의 집중 공격을 받은 화염은 순식간에 사그러들었다. 그리고 교회 안으로부터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그 선장에 그 부하로군. 숙녀를 대하는 에티켓에 자신이 없으니 터프한 모습을 보여주는 유치함은 십대나 저지르는 귀여운 실수 아냐?"
키는 그만 실소하고 말았지만 트로포스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트로포스는 고함을 내지르며 지팡이를 부여잡았다.
"젠장, 귀엽다고 했나? 그렇다면 애교 좀 더 떨어줄까? 벼락아, 번개여!"
트로포스의 고함은 눈폭풍 속에 번득이는 벼락이 되어 테리얼레이드 교회를 강타했다. 쾅쾅거리는 천둥 소리와 함께 내리꽂힌 벼락들은 한 점을 향해 쏟아지는 폭포처럼 테리얼레이드 교회의 뾰족한 지붕으로 수렴되었다. 하지만 어떤 강력한 벼락이라하더라도 눈을 태울 수는 없다. 트로포스는 격노하여 지팡이를 쳐들었지만 그때 키 드레이번이 트로포스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관둬. 이젠 충분하다."
"선장님?"
트로포스는 입술을 깨물며 키를 바라보았지만, 키는 이미 몸을 돌리고 있었다. 키는 그대로 교회 정문을 향해 외쳤다.
"이봐, 마법사! 당신의 힘은 잘 알겠군. 하지만 당신도 언제까지 우리 모두를 막아낼 수는 없다. 더욱이 나는 절대로 막을 수 없을걸. 마법사들에겐 익숙지 않은 것이고, 마법사와 그걸 하는 사람도 얼간이라지만, 어때? 협상을 해볼까."
키의 말에 가장 크게 놀란 것은 다름아닌 트로포스였다. 흠칫하는 표정으로 키의 뒷모습을 보던 트로포스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생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트로포스의 생각은 순식간에 외침이 되어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키는 고개를 돌려 트로포스를 바라보았다. 트로포스는 형형히 타오르는 눈빛으로 키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내 자존심을 생각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 안쪽으로부터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완연한 세실의 목소리가 들려왔따.
"그래? 지지 않았다고? 이번엔 얼마나 터프한 모습 보여줄 생각인데?"
"넌 상상도 못했던 것일 게다!"
트로포스는 속으로 뒷말을 이었다. 나 역시 상상도 못해 봤던 것이야. 과연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트로폿느느 곧 자신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수 있어. 나는 마법사야! 트로포스는 이를 갈면서 지팡이를 힘껏 들어올렸다. 곧이어 벌어진 광경은 다시 한번 조롱을 보내려 들었던 세실로 하여금 그 조롱이 목구멍 어디쯤에서 걸려버리게 만들었다.
"으아아압!"
팍! 하는 소리와 함께 트로포스는 지팡이를 땅에 꽂았다. 뭉툭한 지팡이는 마리 예리한 창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땅을 파고들어 꼿꼿이 섰다. 트로포스는 한쪽 무릎을 꿇은 다음 두 손으로 지팡이를 움켜쥐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에서 거침없는 주문이 흘러나왔다.
마지막 눈송이 몇 개가 트로포스의 어깨와 머리에 떨어졌지만 트로포스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뱃속에서 불덩이가 굴러다니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트로포스는 주문을 멈추지 않았다. 오로지 세실만이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 아무도 파악하지 못하는 사이에 트로포스의 주문이 이 세계의 경계를 뛰어 넘었다. 교회 안으로부터 세실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이 미친놈, 당장 멈춰! 아무리 불법 마법사라도 그런 짓은 할 수 없어!"
세실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린 그 순간, 트로포스의 주문은 이 세계와 또다른 세계 사이의 장벽에 날카로운 흠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트로포스가 영창한 금단의 주문은 저 세계의 <무엇>을 포착했다. 가닿아서는 안 되는 것.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것. 그러나 트로포스의 주문은 모든 금기와 모든 슬픔을 꿰뚫고 그것에 직접 가닿았다.
"됐어!"
트로포스는 눈을 번쩍 떠 핏발선 눈동자를 보이며 외쳤다. 바로 그 순간 트로포스가 붙잡은 <그것>의 분노에 찬 포효가 테리얼레이드의 하늘 위로 길게 울려퍼졌다.
"......!"
라이온은 핼쓱해진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바라본 하늘은 미쳐 날뒤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들었던 표효는 불타는 증오와 폭풍 같은 분노 이외에 어떤 의미도 담겨 있지 않은 순수한 외침이었다. 그것은 소리조차 아니었다. 그때 교회 안으로부터 세실의 신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프, 프, 프린스 오브 구울Prince of ghoul!"
하리야 선장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하리야는 급히 트로포스를 돌아보았고 그가 눈을 뒤집은 채 하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며 헛바람을 삼켰다. 이 사태에 대한 어떤 설명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주위의 해적들은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며 뒤로 물러났다. 트로포스가 입을 열자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그리고 아이도 아니고 노인도 아닌 기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해냈어! 구울의 위대한...... 왕자여!"
하리야는 재빨리 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키는 벌써 복수를 뽑아든 채 하리야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키는 넋빠진 표정을 하고 있는 하리야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리야! 지금 트로포스 놈이 불러내는 것이 뭔가? 구울의 왕자라고?"
"그, 그렇습니다. 구울의 왕자, 언데드의 수호자, 판데모니엄Pandemonium의 하이마스터...... 막아야 합니다!"
하리야의 마지막 말은 그냥 찢어지는 비명 비슷했다. 열풍이 휘몰아치고 메스꺼운 냄새들이 진동하는 가운데 밤하늘은 암적색으로 이글거렸다. 키는 혼란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다.
"신학자나 악마 숭배자놈들이나 관심 가질 멀미 나게 기나긴 호칭 같은 건 집어치우고 말해. 트로포스가 뭔가 골치 아픈 것을 불러내었단 말이지? 그런데 트로포스가 그 녀석을 알면서 불러냈다는 것은, 그 녀석을 지배할 자신이 있기 때문 아닌가?"
하리야는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너무 기가 막힌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배한다고 하셨습니까? 인간이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를? 차라리 고래를 지배한다고 하십시오!"
"그거면 대답이 됐어." 키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외쳤다. "오닉스! 놈을 기절......"
바로 그 순간,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는 지상에 도래했다.
아무도 그것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자들이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형상에서 빗나가 있고 색채에서 일탈해 있었지만 단지 그곳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모든 신의 피조물에 대한 끔찍한 모욕이었다. 신이 창조한 어떤 빛도 그것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기에 아무도 그것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피조물도 볼 수 없을지언정 신을 느끼는 것만큼이나 악을 느끼는 데 민감한 인간들만은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암흑을 덮는 암흑이었고 불을 태우는 불이었다. 그림자를 감추는 그림자였고 죽음을 죽이는 죽음이었다. 교회 속에서 세실은 경탄과 공포 중 어느 감정에 몸을 맡겨야 될지 몰라하며 덜덜 떨고 있었다. 세상에 어떤 마법사가 지옥의 권세를 이 땅 위에 직접 불러낼 수 있다는 말인가. 대마법사 하이낙스가 부활하지 않은 바에야.
지상에 도래한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는 또다시 노호했다.
"......!"
신이 창조한 어떤 바람도 그것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는 없었기에 테리얼레이드의 한르 위로는 실제로 어떤 소리도 울려펴지진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지옥의 일곱 지배자들의 하나인 자의 목소리였다. 고막이 터져나가는 고통에 신음하는 살마들 사이로 구울의 왕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우둔의불꽃을넘어서이다지도무례한짓으한것은도대체어떻게생겨먹은놈인가."
아무도 입을 열 생각을 못하는 가운데, 트로포스는 두 팔을 벌리며 기성을 질렀다.
"나요, 구울의 왕자여!"
구울의 왕자는 무한한 경멸이 가득 담긴 눈으로 트로포스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조그마한가슴속에자신의파멸을이끌수있을정도로치명적인용기를담을수있다는사실에경탄스럽구나미력한인간아네놈이정녕모래알을던져대양에소용돌이를만들려했다는말이더냐."
트로포스는 눈가에 흘러넘치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낸 다음 외쳤다.
"그렇소! 구울의 왕자여,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여! 그리고 나는 해냈소. 바로 내가 신의 창조물들 사이에 당신을 서게 했단 말이오. 그것을 인정하시오!"
라이온은 자신의 턱이 모조리 부서져나가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이를 부딪히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구울의 왕자는 트로포스의 말에 비웃음으로 대답했다.
"인정한다어리석은놈그리고네소망역시알고있다너스스로도그진정한의미를모르는소원을."
구울의 왕자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기분이 이상하군."
파킨슨 신부는 테리얼레이드 방향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낮 동안 기나긴 여정을 소화해 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쳐버린 율리아나 공주는 오스발이 만들어준 잠자리에 들어가 잠든 지 오래였다. 데스필드와 파킨슨 신부, 그리고 오스발 세 명은 모닥불 주위에 모여앚아 다른 이들의 정적으로 자신의 정적으 감추며 앉아 있었다. 파킨슨 신부가 갑자기 입을 열자 데스필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교회가 걱정된다는 식의 말을 하려는 거요, 신부님 당신? 설마 그렇진 않을 거 같은데. 지금 이 순간 테리얼레이드에 교회는 없고 교회터만 남아 있을 거라는 데 본인은 뭘 걸어도 좋을 거 같소만."
"글쎼. 나도 그건 알고 있네. 다만 기분이 이상해. 상당히 불길한 기분이 드는군. 그런데 교회가 파괴되는 것보다 더 불길한 일이 뭘지 모르겠군. 으음."
파킨슨 신부는 말끝을 흐리며 다시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모처럼 찾아온 대화의 시간을 그냥 보내기가 아쉬웠다. 그래서 데스필드는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발 당신, 노예였다고?"
"그렇습니다."
"아아, 어려워할 것 없수. 다른 나라는 어떨지 몰라도 테리얼레이드 사람들은 그런 것 신경 안 써. 귀족 당신이든 노예 당신이든, 에, 신부님 당신, 용서하쇼. 설령 신부님 당신이라도 칼로 찌르면 죽는 건 똑같아."
파킨슨 신부는 쓰게 웃어버렸지만 오스발은 점잖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보복은 다르겠지요."
"뭐요?"
"노예를 죽이면 아무 처벌이 없습니다. 하지만 귀족을 죽이면 국사범(국가나 국가 권력을 침해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 또는 그런 죄를 지은 사람)으로 처형되겠죠. 하물며 신부를 죽였다면...... 신부님은 죽일 수가 없습니다."
"무슨 소리. 신부 살해라면, 본인이 기억하기로도 꽤 되는 걸?"
오스발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분들은 모두 순교자로 추서(죽은 뒤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줌)되었죠."
데스필드와 파킨슨 신부가 동시에 이채로운 눈빛으로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스발은 모닥불 끝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눈을 고정시킨 채 조용히 말했다.
"살해자의 목적이 한 인간의 말살이라면 신부의 경우는 살해할 수 없습니다. 미개인이나 이교도들이 신부님의 육신을 죽일 수 있을진 모르지만, 그분들은 모두 순교자가 되지요. 이 경우 살해자는 오히려 신부님들에게 영생을 부여한 것 같습니다."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끋거였다.
"아, 죄송합니다. 비꼬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파킨슨 신부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데스필드는 정수리를 벅벅 긁어대다가 말했다.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군. 하지만 본인에게 물어본다면, 죽고 나서 무덤에 금칠해 줄 바엔 살아서 금화 한 닢 받는 것이 훨씬 행복하겠다고 말하겠어."
오스발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저라도 그렇게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신부님의 경우와 다른 분들의 경우는 다릅니다. 신부님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까."
"원한다고?"
"예. 죽기를 원하는 자를 죽이는 것이 살해가 될 수 있을까요?"
밤이 그 자체의 농밀한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별들이 구름 뒤로 숨었다 나타났다 하기를 몇 차례. 모닥불은 작게 사그라들고 있었지만 아직 꺼지지는 않았다. 파킨슨 신부는 장작을 부러뜨리며 저녁 기도를 읊조리고 있었고 나무 우듬지(나무의 꼭대기 줄기)에 기대어누운 데스필드는 그런 신부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장작을 던져넣은 파킨슨 신부는 잠든 오스발을 돌아보며 기도하던 음조 그대로 말했다.
"노예이길 원하는 자를 노예라고 부르는 것은 모욕이 될 수 있을까?"
"어라? 신부님 당신, 왜 갑자기 앵무새 흉내를? 뭐, 원래 신부님 당신네들은 신의 앵무새라고 하지만."
데스필드의 이죽거림(이기죽거리다의 준말 : 자꾸 밉살스럽게 지껄이며 짓궂게 빈정거리다)에도 불구하고 파킨슨 신부는 잠든 오스발을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대신 그의 주먹만은 그의 몸과 따로 떨어진 생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민첩하게 움직여 데스필드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데스필드는 파킨슨 신부의 주먹을 살짝 피한 다음 다시 말했다.
"아까 발 당신이 했던 말을 조금 바꾼 거잖습니까?"
"그래. 저 전직 노예 친구가 하고 싶었던 말은 혹시 그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혹시 자네 노예의 정의가 뭔지 아나?"
데스필드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모욕적이군요! 본인을 그렇게 똑똑한 놈으로 보다니. 당연히 모릅니다."
"......자비로우신 신이여, 부디 이 시련을 이겨낼 힘을 주소서. 이 빌어먹을 악마의 사생아 녀석아. 잘 들어라. 노예는 인권이 없는 인간이다. 그리고 인권은 인격을 유지 발전시킬 권리고."
"흐음. 인격은 뭐냐고 물어볼 차례인 거 같군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사람만의 고유하고 보편적인 성격이다. 물론 이런 논법은 교회가 인정하는 논리는 아니다만, 대개의 나라의 법전은 이런 논법을 따르지."
"신부님 당신은 본인에게 어떤 복음을 주시려는 겁니까?"
"뭐가 사람다운 거냐?"
아무렇게나 대답하려던 데스필드는 문득 입을 닫고는 파킨슨 신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파킨슨 신부는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데스필드를 바라보며 자신이 진지한 대답을 기대하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데스필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말씀해 보슈. 하시고 싶은 말이 뭔데요?"
"나는 뭐가 사람다운 것인지를 말하지는 않겠다. 내 대답이 네녀석의 귓구멍을 조금이라도 파고들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을 생각해 보거라. 만약 사람을 버린 자라면, 인격이 없다 해도, 그것을 유지 발전시킬 인권이 없다 해도 뭐 불편할 것이 있겠느냐? 노예라 해도 뭐 불편한 것이 있겠느냔 말이다."
데스필드는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타인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애쓰는 것은 더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데스필드는 대부분의 살마들이 그러하듯 깊이 생각하는 척하다가 말했다.
"하지만 어느 놈 당신이 사람을 버린단 말입니까."
"그래...... 어느 놈이 그러겠냐. 생각을 좀더 해봐야겠다."
파킨슨 신부는 뜻밖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래서 데스필드는 안도하며 말할 수 있었다.
"이만 주무쇼, 신부님 당신. 유령 당신도 당신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으니까 삶들 주위를 떠돈다고 들었씁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당신이 어떻게 사람을 버리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