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소설/습작

폴라리스 랩소디 1 pp 133~140

하얀s 2010. 3. 20. 01:58

 "테리얼레이드에서 레보스호의 재물(돈이나 그 밖에 값나가는 모든 물건)들을 처리하실 생각이셨군요. 젠장."
 라이온은 해도를 보며 머리를 딱 쳤다. 식스는 그럼 그렇지, 우리 선장님께서 아무 생각 없이 선단을 지휘하겠느냐 등의 표정을 얼굴 가득히 지어보이며 득의만면(일이 뜻대로 이루어져 기쁜 표정이 얼굴에 가득함)하게 라이온을 바라보았다.
 테리얼레이드는 악명 높은 무법 지대이며, 바로 그런 점에서 다른 유서 깊은 나라나 도시만큼 복잡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도시다. 악명도 역사가 없으면 생기지 않는다. 수많은 영웅들이나 필사의 도망자들의 전설이 곳곳에 남아 있는 테리얼레이드의 가장 최근의 악명은 주로 마법사 하이낙스의 관련된 악명이다. 테리얼레이드는 그 광포한 무법성 때문에 하이낙스가 제국을 모조리 휩쓸다시피 했을 때 반하이낙스파의 거점이 되었다. 하지만 거꾸로 하이낙스의 몰락 이후 이 도시는 하이낙스파 부흥의 핵심 도시가 되는 아이로니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테리얼레이드의 뒷골목과 지하로 숨어버린 하이낙스파의 잔존 세력은 아직까지도 건재하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다.
 식스는 기세좋게 말했다.
 "이 배에 실려 있는 그 엄청난 재물이라도, 테리얼레이드에서는 반드시 처분할 수 있겠지. 사실 그곳이 아니라면 어디서 이 많은 재물을 처리하겠나. 그렇잖은가, 라이온 임시 선장?"
 식스는 그것이 점잖은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비꼬는 어투를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하지만 라이온은 별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라이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테리얼레이드에 도착하려면 우리는 대드래곤의 성지를 지나야 합니다. 식스."
 잠깐 동안 식스는 대드래곤의 성지라는 말보다는 식스라는 호칭에 대해 정신을 잃을 정도의 분노에 휩싸였다.


 "대드래곤의 성지라고? 안개의 성지라고 하지, 그래."
 미노 만의 짙은 안개를 마주 대하고 있는 한 척의 롱 갤리어스 위에서, 애꾸눈의 사내가 남아 있는 한쪽 눈을 잔뜩 찡그린 채 투덜거렸다.
 롱 갤리어스는 자유호처럼 이상할 정도로 좁은 선체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유호가 거의 터릿 갤리어스라고 착각될 정도로 긴 선장 때문에 선폭이 좁아보이는 것에 비해 볼 때 이 배는 통상적인 롱 갤리어스의 선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좁은 선폭을 가지고 있다. 눈밝은 뱃사람이라면 이 롱 갤리어스가 대륙에서 가장 빠른 배를 만들어내는 전통을 가진 자마쉬의 조선소에서 설계되었음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숙련된 함선 설계가가 본다면 이 배에서 30여 년 전 위명을 떨치던 한 함선 설계자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로드니 라일름 리드클리프. 이 속도에 미친 설계자의 서명인 3L은 함명인 <질풍> 바로 아래에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질풍호의 선장 트로포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안대를 만지작거렸다. 처음 왼쪽 눈을 잃고 안대를 착용하게 되었을 때 익숙지 않은 느낌 때문에 만지곤 하던 것이 그만 버릇이 된 것이다. 트로포스는 배 앞의 해원 가득히 깔린 안개를 바라보며 다시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드래곤 한 마리가 숨어 있어도 흔적도 없겠는걸. 아니, 수십 마리가 숨어 있다고 해도 난 믿겠어."
 그의 등뒤에 있던 질풍호의 해적들은 소름 끼친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노스윈드의 선단을 가로막고 있는 미노 만의 안개는 농밀한 정도를 넘어서 차라리 하얀 산처럼 보였다.
 선단에서 가장 빠르다는 이유로 척후선의 역할을 맡았건만, 까마득한 높이로 바다 전체를 뒤덮은 미노 만의 안개 앞에서는 질풍호의 그 놀라운 속도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질풍호는 미노 만의 입구에서 어영부영하다가 후발대에 따라잡히는, 척후선으로서는 꽤나 창피스러운 지경에 빠져 있었다.
 트로포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질풍호의 뒤쪽으로는 노스윈드의 선단을 구성하는 거함들의 나머지 일곱 척과 레보스호까지 합쳐 여덟 척의 배가 미노 만의 입구를 가득 메운 채 정렬해 있었다. 장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총배수량만 6,000,000파운드에 달하는 위용인 것이다. 그런 굉장한 광경을 보던 트로포스의 시선이 흑기사호의 검은 선체에 이르렀을 때였다. 트로포스는 문득 오른쪽 눈을 꿈틀거렸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의 선원들에게 말했다.
 "이봐, 저기 흑기사호 좀 봐주게. 무슨 연기 같은 것이 보이는데?"
 눈밝은 선원 하나가 대답했다.
 "예. 오닉스 나이트 선장님꼐서 부적을 태우고 있습니다."
 "논다, 놀아."
 
트로포스는 혀를 차고는 다시 다른 배로 시선을 옮겨갔다. 흑기사호 왼쪽의 페가서스호의 이물에는 하리야 선장이 그 튝유의 찌푸린 얼굴을 더욱 찌푸린 채 서 있었다. 그랜드머더호에서는 킬리 선장이, 그랜드파더호에서는 돌탄 선장이 각자 이물에 서서 트로포스의 머리 너머 안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급선인 물수리호와 바다사자호는 조금 뒤로 쳐진 상태였다. 노스윈드의 전투함들이 그 뱃머리에 각자의 위대한 선장들을 세우고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장관이라면 장관이라고 불러줄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부적을 태우고 있는 오닉스의 모습 때문에 풍경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전투함들의 한가운데에는 자유호와 레보스호가 떠 있었다.
 자유호에는 항상 그렇듯이 키 드레이번 대신 식스 1등 항해사가 근엄한 얼굴을 한 채 서 있었고, 레보스호의 선상에서는 벼락출세한 라이온이 턱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트로포스는 식스의 모습에 주목했다. 잠시 후, 식스의 입이 뭐라고 움직였다. 자유호의 기수는 재빨리 기를 휘저었고 트로포스는 그 깃발 신호에 얼굴을 더욱 찡그렸다.
 <조심스럽게>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어쨌든 전진 명령이었다.
 "제기랄! 이 안개 속으로 들어가라니."
 미노 만은 정규 항로가 아니기 때문에 트로포스호에는 미노 만의 물길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암초나 곶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지독한 안개 속에선 미리 발견하기도 힘들다. 자칫하면 해안 절벽에 배를 가져다 박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선원들은 불안한 얼굴로 트로포스를 바라보았다.
 "어떡하죠?"
 트로포스는 찡그린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선원들을 돌아보았다.
 "할 수 없군. 죽는 것이 싫냐, 마법이 싫냐."
 "마법이 싫습니다." 대답은 이구동성으로 터져나왔고, 그래서 트로포스는 히죽 웃었다. 질풍호의 선원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그들의 선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트로포스가 입을 열었을 때 선원들의 표정은 공포로 바뀌었다.
 "그런데 난 죽는 것이 더 싫어. 내 지팡이를 가져와."
 레보스호 선상의 라이온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질풍호의 갑판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았다. 진귀한 광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질풍호의 갑판원들은 갑판을 텅 비워둔 채 배의 양쪽 뱃전에 바싹 붙어 있었다. 그들은 소리 없이 아귀다툼을 하며 조금이라도 더 뒤로 물러나려 노력하고 있었기에 잘못하면 그대로 바다에 떨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갑판 가운데로는 한 불행한 선원이 동료들을 사열(조사하거나 검열하기 위하여 하나씩 쭉 살펴봄)하는 듯한 모습으로 외롭게 이물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오만상을 찌푸린 채 걸어가는 선원의 앞으로 내밀어진 손에는 길다란 지팡이가 공손히 들려져 있었다.
 라이온은 피식 웃었다. "그건가? 흐음. 난 찬성이야."
 트로포스는 선원에게 건네받은 지팡이를 짚고는 질풍호의 이물에 당당히 섰다. 그리고 질풍호의 선원들은 몇몇 호기심이 과도한 선원들을 빼놓곤 모두 고물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트로포스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지팡이를 두 손을 쥐고는 앞으로 내밀었다.
 트로포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질풍호의 선장 트로포스가 마법을 쓸 결심을 한 것이다. 술에 취했을 때 트로포스는 술주정 삼아 자신이 하이낙스에게서 마법을 배웠으니 어쩌니 하지만,  선단의 그 누구도 그 말을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트로포스가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것은 사실이며, 지금 쓰려고 하고 있다. 라이온은 트로포스가 어쩌다 포로로 잡은 마법사에게 마법을 배우고 그의 지팡이를 빼앗은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보곤 한다. 트로포스라면 그럴 수 있다. 그렇게 잔인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겁도 없이 단순히 호기심만으로 마법을 배워볼 정도로 무모한 성격이라는 의미다. 트로포스의 마법은 될 때와 안 될 때가 불규칙하기 때문에 라이온의 의심은 타당하다 하겠다.
 자유호의 선상에서, 식스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트로포스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트로포스가 굳이 마법을 선택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충분한 주의와 약간의 행운만 있다면 트로포스에게는 저 정도의 안개라도 뚫고 지나갈 능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마법을 쓴다면, 그가 마법을 사용하여 걷어내려는 것은 저 엄청난 안개라기보다는 대드래곤의 성지로 들어가게 된 해적들이 느끼는 불안 심리일 것이다. 그래서 라이온과 마찬가지로 식스 또한 트로포스의 행동에 무언으로 찬성을 보내었다.
 하지만 트로포스의 행동에 반대표를 던지는 사나이가 있었다.
 "저놈! 또 불법 마법을 쓰는 게냐! 그 흉측한 흑마법 멈추지 못해!"
 페가서스호의 선상에 우뚝 서 있던 하리야 선장이 노성을 터뜨렸다. 하리야는 선단 전체에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기 위해 확성기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말 그대로 쩌렁쩌렁(목소리가 자꾸 크고 높게 울리는 소리) 울렸다. 하지만 곧 그의 목소리에 화답한 것은 트로포스가 아니었다.
 "이퐈, 신푸! 흑마펍으로푸터 우릴 치켜야치? 우리 선탄을 위해 키토라토 촘 올려추케나. 커헐헐!"
 이 함대에서 저렇게 지독한 자마쉬 사투리를 쓰는 건 한 사람 뿐이다. 하리야 선장은 고개를 홱 돌려 그랜드파더호를 바라보았다. 그랜드파더호의 선장 돌탄과 그 선원들은 한결같이 사나운 미소를 지은 채 하리야 선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리야 선장은 끙! 하는 신음을 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라이온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하리야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지 말아요. 하리야. 당신이 그런다고 해서 이 막돼(말이나 행실이 버릇없고 난폭하다) 먹은 놈들 중 누구 하나 감사라도 할 줄 압니까? 이놈들은 당신을 더욱 놀릴 뿐이라고요. 젠장, 나도 놀리고 싶어진단 말입니다! 하지 말아요!"
 하지만 하리야는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