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소설/습작
폴라리스 랩소디 1 pp 67~102
하얀s
2010. 3. 14. 04:36
키 드레이번은 자신의 책상 뒤에 앉은 채 두 손에 턱을 고이고는 율리아나 공주를 바라보았다. 공주는 방 가운데 서서 키의 시선을 참아내고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키는 그녀에게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앉으라는 말뿐만 아니라 키는 공주가 선장실에 들어온 이후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율리아나 공주는 많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조금 전까지 공주는 불안감과 공포 쪽에 많이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공주는 솔직한 호기심으로 제국의 공적 제1호를 바라보았다. 키는 그 호기심 어린 시선에 조금 놀랐다. 그리고 그 놀람 때문에 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불쾌해할 줄 알았는데. 독특한 아가씨군."
"말했어! 어, 그런데 무슨 말을 하셨죠?"
"......거기 앉으시오."
"아, 예."
공주 역시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투로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자신을 꾸짖기 시작했다. 멍청하긴. 왜 해적의 말을 기다린 거야. 그냥 앉으면 되는 걸 가지고. 율리아나 공주는 자신에 대해 비웃으며 의자를 끌어와 키의 책상 앞에 놓았다. 잠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서로를 응시했다. 그리고 키는 두번째로 항복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에겐 익숙한 일은 아니었다.
"소개해야 되는 거겠지. 키 드레이번이오."
"율리아나 입니다. 이곳은 궁전이 아니니 길고 복잡한 이름 다 부르지 않아도 되겠지요?"
"다 기억하기는 하오?"
"딜비움 그랜다이 레보라 아크 리 바레린 길리데아 율리아나 카밀카르라고 말한다면 자기 이름을 말할 줄 아는 것이 무슨 자랑거리냐고 되물을 거죠?"
고풍스러운 엘프식 작명법이 따른 길고 긴 이름을 들은 키는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 미소를 본 율리아나 공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웃으시네요?"
"입이 있으니까."
대답하며 키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율리아나 공주의 손이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고 그녀의 동공은 잔뜩 팽창된 채 키의 움직임을 쫓았다. 책상 옆을 돌아 공주 앞에 온 키는 책상 귀퉁이에 걸터앉아서는 공주를 바라보았다. 공주는 키의 턱을 올려다보는 대신 고개를 숙여 자신의 무릎을 보며 말했다.
"말해 두겠어요. 라이온 씨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자살 미수범이에요. 바다에 뛰어들려고 했었지요."
"왜 그랬소?"
"당신에게 나를 제공할 의사는 별로 없으니까. 지금도 그 결심은 그대로예요."
말을 마치는 율리아나 공주는 표독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려 애쓰면서 키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공주의 커다란 눈은 크게 떠지자 더욱 둥글게 바뀌었을 뿐, 소기의 목적 즉 키를 위협하려는 목적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키는 고개를 조금 가로저었다.
공주는 입을 앙다문 채 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공적 제1호. 제국의 8할을 휩쓸고 열한 개의 왕관과 여섯 개의 지팡이를 파괴한 대마법사 하이낙스 이후 두번째로 그런 칭호를 받은 사내. 그것은 키 드레이번의 강력함을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이낙스가 제국에게 어느 정도의 타격을 주었는지를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제국의 최전성기라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해적에게 제국의 공적 1호라는 칭호를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제국이 그정도로 처절한 타격을 입었기에 이런 해적의 발호도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이름만으로 제국의 모든 뱃사람들을 진감케 하는 사나이가 말했다.
"당신, 착각하고 있군."
"착각이라고요?"
"당신은 나에게 자신을 제공할 필요가 없소. 당신을 기다리는 자는 따로 있으니."
공주는 순간 아직 결혼하지도 않은 미래의 남편 때문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럼, 몸값을 받으실 건가요?"
"뭐요?"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도 로네스 경에게." 일단은 이렇게 불러야 할 것이다. 아직은 남편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 "날 보내주시고 몸값을 받으시려는 것 아닌가요?"
키는 빙긋 웃었고 율리아나 공주는 그 웃음이 마음에 들었다. 키는 웃는 얼굴을 바꾸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런 것이 있을지 의심스럽지만, 만일 필마온의 갈까마귀들에게 받을 것이 있다면 직접 검독수리의 관문을 열고 들어가 받아낼 거요."
율리아나 공주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말했다.
"누구도 강제로 열 수는 없엇던 문을 새장 문이나 여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새장의 문을 열어본 적이 있소?"
"예?"
키는 책상머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공주의 무릎 바로 앞에 선 채로 공주를 내려다보았고, 공주는 팔걸이를 단단히 쥔 채 몸을 꺾어 키를 올려다보았다.
"새장의 문을 열어 새로 하여금 그 메마른 날개에 자유의 공기를 적시도록 해본 적이 있소?"
너무 현학적인 질문을 들은 율리아나 공주는 입을 조금 벌린 채 키의 어두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키는 갑자기 몸을 숙였다. 그리고는 의자의 팔걸이를 짚으며 공주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다대었다. 해적과 공주의 얼굴은 1피트 정도의 거리만을 두고 서로를 쳐다보게 되었다. 공주의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고동쳤지만 키는 여상하게 속삭였다.
"새장의 문을 여는 것이 그렇게 쉬운 거요? 그 새가 누려온 안락과 안전 대신 무자비한 자유를 주는 것이 과연 그 새를 위한 일이오?"
"모르......몰라요. 하,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어요."
"말해 보시오."
얼굴 바로 앞에 키의 두 눈이 있었기에 그럴 수는 없었지만, 공주는 입술을 핥고 싶었다. 율리아나 공주는 힘들게 말했다.
"당신, 당신은 내게 질문하고 있지만, 대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
키의 눈에 묘한 빛이 지나갔다.
키는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책상을 돌아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율리아나 공주가 한숨을 내쉴 사이도 없이 키는 곧장 말했다.
"나가보시오."
공주는 떨떠름한 얼굴로 키를 바라보았지만, 키는 말을 마치자마자 의자를 뒤로 돌렸다. 공주는 일어나서 키의 등을 한번 바라본 다음 문으로 걸어갔다. 그때 키가 등을 돌린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문을 강하게 잡아당기시오."
공주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키를 바라보았지만, 키는 여전히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총명한 공주는 곧 키의 말을 이해했고, 그래서 얼굴을 붉히며 문을 확 잡아당겼다. 덕분에 선장실의 문에 귀를 바싹 가져다댄 채 엿듣고 있던 라이온외 몇몇 해적들이 선장실 안으로 일제히 나동그라졌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수면으로 미끄러졌다.
수평선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진 해역으로 날아든 갈매기들은 탐욕스러운 노래를 부르며 자맥질을 해대었다. 물론 배의 파편들을 주워모아 유족에게 전달해 주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바닷속에서는 탐욕스러움에 있어 갈매기에 절대 뒤지지 않는 남해의 상어들이 허연 몸을 뒤집어가며 시체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가끔 애처로운 비명이 들려왔지만, 해적들이 던진 구명 부이를 붙잡고 올라오는 이들은 적었다. 그들 대부분이 전투에 의해 부상을 입은 채 바다에 떨어진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자유호의 1등 항해사 식스는 자유호의 선교에 우뚝 선 채 레보스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보스호에 실려 있는 엄청난 양의 화물은 도저히 자유호로 옮겨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식스는 레보스호를 통채로 끌고 가기로 결정했다. 레보스호를 끌고가기 위해선 레보스호의 선원들이 필요했고, 그래서 라이온에게 그 일을 맡긴 지금 식스는 분통이 터지는 것을 참으며 입술을 꾹 다문 채 레보스호를 쏘아 보고만 있었다.
라이온은 자신을 바라보며 분을 삭히고 있는 식스의 눈길을 충분히 느꼈고, 그래서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식스의 비위를 박박 긁는 일을 수행했다. 라이온은 기세좋게 외쳤다.
"다음 녀석!"
꽁꽁 묶인 채 갑판에 무릎 꿇려 있던 카밀카르 전투병들 중 한 명이 해적들의 손길에 의해 일으켜세워졌다. 병사는 증오가 담긴 눈으로 라이온을 바라보고는 해적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직접 뱃전으로 향해 걸어갔다. 레보스호의 오른쪽 뱃전에는 라이온이 <감별사>라고 부르는 판자가 바다를 향해 길게 내밀어져 있엇다. 당당하게 걸어간 병사가 판자 위에 발을 올리자, 라이온은 그 병사의 등을 향해 지금껏 몇 번이나 반복했던 질문을 지겨워하는 기색도 없이 말했다.
"자, 묻겠다. 친구. 상어가 될 텐가, 상어밥이 되겠는가?"
병사는 고개를 돌려 라이온을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지옥에서 만나지."
라이온은 실망한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마지막은 자신의 취향대로 걸어가도록 배려한다는 원칙을 세워두었기에 라이온은 포로의 등을 칼로 쑤셔대는 짓은 하지 않았다. 병사는 천천히 판자 위를 걸어갔다. 뱃전에 와 부딪히는 잔물결 소리와 늦은 오후의 햇살만이 고요히 떨어져내리는 가운데 병사는 뒤로 팔이 묶인 채 수평선을 향해 걸어갔다.
판자 끝에 선 외로운 병사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짧은 정적 후 병사는 마지막 걸음을 내디뎠고, 곧 판자 위에서 병사의 모습은 사라졌다. 풍덩! 물소리가 들려올 뿐, 배 위의 아무도 뱃전으로 머리를 내밀어 수면 위에 그러지는 파문이나 물보라를 보지는 않았다. 해적들은 각자의 무기를 짚은 채 묵묵히 고개를 숙였고, 라이온 역시 고개를 숙여 사내의 저승길이 편안하기를 기도했다. 짧은 기도를 마친 라이온은 곧 표정을 바꾸며 외쳤다.
"다음!"
해적들에 의해 일으켜세워진 병사의 얼굴은 어려보였고, 게다가 얼굴 근육 전체를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라이온은 혀 차는 소리를 내며 병사를 바라보았다. 젊은 병사는 걸음을 떼지 못했다. 해적들은 라이온을 한번 쳐다본 다음 젊은 병사의 겨드랑이에 팔을 쑤셔넣었다. 젊은 병사는 발을 질질 끌면서 판자 쪽으로 끌려왔다.
"젊은 친구. 상어가 될 텐가, 상어밥이 될 텐가?"
젊은 병사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라이온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이 몇 번 움직였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가쁜 숨소리만이 새어나올 뿐이었다. 그러나 라이온은 그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라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어넣어."
"아, 아냐ㅡ"
"집어넣어!"
라이온은 젊은이의 목소리가 묻힐 정도로 크게 고함 질렀다. 해적들은 재빨리 사내의 등을 떠밀었고, 젊은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바다에 빠졌다. 갑판에 남아 있던 병사들의 얼굴 위로 무서운 공포와 침묵이 동시에 흘렀다. 라이온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번에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 것은 기도가 아니었다.
"죽는 것까지 도와줘야 되는 자네에겐 삶의 대가가 너무 무거울 걸세, 친구. 자네가 방랑하기에 이 세상은 너무 황량해."
짧은 침묵 후 고개를 든 라이온은 다시 명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라? 슈마허로군."
슈마허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라이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처 입은 어깨에선 피가 엉겨붙어 끔찍한 꼴을 하고 있었고, 얼굴은 창백해진 채 다리를 떨고 있었다. 그러나 슈마허를 바라보는 라이온의 눈에는 아무런 동정심도 없었다. 라이온은 오로지 기대감만을 담은 채 슈마허를 바라보았고, 그 시선 속에 슈마허는 다리를 끌면서도 힘겹게 뱃전을 향해 걸어갔다. 슈마허가 떨리는 다리로 판자 위에 서자, 라이온은 담담하게 말했다.
"자, 용맹한 서 슈마허. 상어가 되겠는가, 상어밥이 되겠는가?"
피를 많이 흘린 슈마허는 몽롱한 정신 속에 판자를 내려다보았다. 바다는 붉었다. 먼저 떨어져간 병사들은 익사하기도 전에 포악한 남해의 상어들의 습격을 받았고, 그래서 바다는 오후의 햇살 속에서 더욱 붉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슈마허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햇살은 따스했지만 슈마허는 어깨를 떨고 있었다.
"상어가...... 되겠다."
"그래. 잘 알겠ㅡ뭐라고?"
고개를 끄덕이던 라이온은 당황하며 되물었다. 슈마허는 판자 위에서 몸을 돌려 라이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어가 되겠다."
라이온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슈마허를 보았지만 역광 때문에 그 얼굴을 잘 볼 수 없었다. 라이온의 입술이 일그러지며 갑작스럽게 폭언이 튀어나왔다.
"이런 개같은 새끼를 봤나, 섬겨야 할 레이디를 강탈당한 기사가 목숨을 구걸하는 거냐?"
"그렇다."
"좋아, 이 자식아. 넌 특별 대우다. 내 밑에 넣어서 귀여워해주지. 그놈 당장 판자 위에서 끌어내!"
해적들은 슈마허를 판자 위에서 끌어내렸다. 그때까지 간신히 버티던 슈마허는 판자 아래로 내려오자마자 갑판 위에 쓰러졌다. 바닥에 나뒹구는 슈마허를 경멸스럽게 내려다보던 라이온은 턱짓을 했다.
"저놈 데리고 가서 치료해. 반드시 살려놔야 돼. 알겠냐?"
슈마허는 다시 거칠게 일으켜졌고 해적들의 손에 의해 선실로 끌려갔다. 침을 뱉으려던 라이온은 이 배를 끌고가야 된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도로 침을 삼켰고, 그래서 기분이 더욱 지저분해졌다.
"제기랄, 다음!"
그러나 잠시 후 라이온은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라이온은 속으로 슈마허에게 경의를 보내었다. 지금까지 줄곧 바다로 뛰어들던 카밀카르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휘자의 변절을 본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충성을 지켜야 할 필요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많은 수의 병사들이 판자 위에서 도로 내려왔다. 라이온은 판자 위에서 내려오는 병사들의 얼굴에서 아주 뚜렷한 두 개의 문장을 읽을 수 있었다. 지휘관인 슈마허도 변절했다. 내가 왜 개죽음을 당해야 하나?
더 이상 판자 건너기가 필요없게 되었다. 카밀카르 병사들은 앞다투어 해적이 될 것을 맹세했다. 라이온은 이마를 싸쥐고는 남은 병사들을 모두 풀어줄 것을 명령했다.
풀려나는 병사들을 보던 라이온은 몸을 돌려 판자 쪽으로 걸어갔다.
해적들과 병사들이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라이온은 판자 끝까지 걸어갔다. 마치 빠져드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판자 끝에 선 라이온은 저물어가는 서녘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망할 놈. 나는 죽어가면서도 객기 부릴 줄 아는 놈이 싫어."
라스 법무대신은 선실을 거닐면서 초조한 표정으로 선실문을 바라보았다. 좌로 세 걸음, 우로 세 걸음. 무의식중에 선실의 넓이를 재고 있던 라스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앉았다.
"라스와 공주가 숨어 있는 선실로 느닷없이 들이닥친 시커먼 갑옷의 해적은 라스를 한 주먹에 기절시켰다. 정신을 차린 라스는 세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율리아나 공주가 사라졌다는 사실과, 그는 이곳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과, 아무래도 코뼈가 내려앉은 것 같다는 사실. 마짐가 사실이 그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있기는 했지만 라스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첫번째 사실에 집중했다. 공주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란 라스가 바라보는 가운데, 선실로 들어선 해적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데리고 온 사내를 바닥에 집어던지고는 몸을 돌려다. 라스는 해적들의 등을 향해 외쳤다.
"여, 여보게. 이봐!"
그러나 해적들은 무정하게 뭄을 닫았다. 철컹. 밖에서 빗장 채우는 소리가 들리자 라스는 좌절하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바닥에 쓰러진 사람이 슈마허인 것을 알고는 다시 놀랐다.
"서 슈마허?"
라스는 황급히 슈마허를 부축하여 침대에 눕혔다. 슈마허의 어깨에는 붕대가 매어져 있었고 갑옷이나 무기는 모두 없어진 상태였다. 침대에 눕혀진 슈마허는 눈을 떠 라스를 바라보고는 힘들게 웃으며 말했다.
"로드...... 라스. 로드와 감방 동기가 될 줄은 꿈에도......."
"말하지 말아요, 말하지 말아. 이런 큰 상처라니.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일단은 좀 쉬도록 하시오, 서 슈마허."
"서......가 아닙니다."
"뭐요?"
"서가 아닙니다...... 저는 해적이 되었습니다."
라스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슈마허를 바라보았지만 반문을 하거나 재촉하지는 않았다. 슈마허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판자 건너기...... 아십니까?"
라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슈마허는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해적이 되기로...... 해적 슈마허라고 불러주십시오."
"이유를 말해 보시오."
슈마허는 하얗게 웃었다.
"부하들...... 마음 편하게......"
잠시 기다리던 라스는 슈마허가 이미 실신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라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슈마허에게 시트를 덮어주고는 의자에 앉았다.
판자 건너기라. 그런 것을 시켰단 말이지. 라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젊은 청년에겐 너무 가혹한 일이었겠군. 라스는 슈마허의 말에서 생략된 부분을 거의 정확하게 추측해낼 수 있었다. 부하들이 마음 편하게 변절하여, 그들 자신의 목숨을 보존할 수 있도록 저 스스로 먼저 변절했습니다.
골똘히 생각하던 라스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렷다. 그런데 왜 내게는 판자 건너기를 시키지 않은 거지? 아아, 그렇군. 라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의 노회(경험이 많고 교활하다)한 머릿속으로 해답이 떠올랐다.
몸값이군. 그렇다면 공주님께서도 무사하실 가능성이 높군.
라이온의 상당히 거친 해적 선발이 호위대장 슈마허의 자발적인 변절에 도움을 받아 간단히 마무리되었을 때, 태양은 이미 수평선을 넘었고 하늘은 부드러운 검붉은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판자 위에 서 있던 라이온은 벼락출세의 본보기가 되어 있었다.
"선장? 내가?"
"물론 임시직입니다. 따라서 취임식 같은 것은 없습니다."
판자 끝으로 걸어갈 때 자유호의 갑판장이었던 라이온은, 그래서 판자 끝에서 돌아올 땐 레보스호의 임시 선장이 되어 있었다. 비록 그 안에 실린 화물을 다 팔아치우는 순간 침몰시킬 배였지만, 어쨌든 선장은 선장이다. 석양을 바라보던 라이온은 노련한 선장 같은 표정을 지어보려다가, 그런 자신을 비웃어준 다음 고개를 돌려 레보스호의 선장으로서의 업무를 시작했다.
피탄에 의해 선체에 구멍을 몇 개 나고 충각에 꿰뚫리기도 했지만, 라이온은 레보스호가 웬만한 파도를 만나지 않는 이상 가라앉을 것 같지는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배의 보수에 앞서 사상자들의 시체를 바다에 던지느 작업이 먼저 시작되었다. 해적이 되기로 맹세한 카밀카르의 병사들은 아무 말 없이 전우의 시체를 바다에 던졌다. 그들 중 많은 수가 가슴속으로 통곡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풍덩거리는 물소리만이 들릴 뿐 밤바다는 고요했다. 다른 해적선들 역시 침묵 속에서 레보스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체 처리와 부상자 격리가 끝났을 때 밤은 이미 깊어 별빛이 아롱거렸다.
레보스호의 선원들은 격렬한 전투와 그 뒷처리로 정신이 몽롱할 정도의 피로를 느꼈다. 노잡이 노예들 역시 마찬가지인지라, 라이온은 자유호로 전갈을 보내었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나직한 지시와 명령들이 오갔다. 잠시 후 해적 선단과 레보스호는 밤바람에 몸을 맡긴 채 조용히 떠내려가는 식의 항해를 시작했다. 배들 간의 간격을 나타내기 위해 선수와 선미에 밝혀든 등불만이 장난스럽게 까불거릴 뿐 아홉 척의 배는 정적의 해원을 소리 없이 미끄러졌다.
흔히 육지 사람들이 상상하곤 하는 해적들의 미친 듯한 잔치ㅡ술통이 바닥날 때까지 퍼마시고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고 불운한 포로들을 상어에게 던져주는 식의ㅡ는 없었다. 격심한 전투 직후에 그런 짓을 했다가는 아무리 강인한 해적들이라 해도 모두 혈관이 파열되고 말 것이다. 게다가 노스윈드의 해적들은 기율(도덕상으로 여러 사람에게 행위의 표준이 될 만한 질서)이 꽤나 엄하다. 다만 해적선 곳곳에선 레보스호에서 슬쩍한 고급 술병으로 조촐한 잔치를 벌이는 해적들이 있었지만, 엄격한 식스도 눈감아줄 정도의 작은 잔치였다.
사건은 그런 고요함 때문에 일어났다.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엘리엇 선장의 소유였던 침대에서 사지를 제멋대로 던진 채 잠들어 있던 라이온은 섬뜩한 느낌을 받으며 일어났다. 침대에 앉은 채 라이온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사방을 훑어보았다. 무엇 때문에 잠에서 깨었더라?
시각, 어둡다. 후각, 별 냄새 없군. 촉각, 매끄러운 시트의 감각. 아아, 이 맛에 선장이 되는 건가. 청각, 뱃전에 부딪히는 물소리와 노랫소리. 별 이상이 없는...... 잠깐. 노랫소리라고?
라이온은 자신의 등뼈가 타다다닥 소리를 내며 곧추서는(꼿꼿이 서다) 느낌을 받았다. 밤바다 위에서, 특히나 해적 선단에서느 절대로 들릴 리가 없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낮은 허밍.
"우와아악!" 라이온이 비명을 지른 바로 그 순간, 선단 곳곳에서 머리카락이 쭈뼛 설 것 같은 비명들이 터져나왔다. 비명들은 서로 공명하여 더욱 처절해졌고, 갑판을 쿵쾅거리는 발자국 소리와 덜거럭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퍼졌다. 고요한 밤항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 같은 소란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해적선 곳곳에서 랜턴 불빛이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목적을 잃고 달리던 해적들은 서로에게 부딪히며 놀랐고, 돛에 비치는 자신들의 괴물 같은 그림자를 보고도 놀라 주저앉아서는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자유호의 주승강구에서 갑판 위로 뚜어올라온 식스는 당황함 고함 질렀다.
"모두 정신차려! 조용히 햇!"
그때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모든 사람들이 숨을 몰아쉬기 위해 잠시 입을 다물었기에 발생한 극히 짧은 정적 속에서, 식스는 바람결을 타고 들려오는 부드러운 허밍을 들었다.
음...... 음음...... 음......
식스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신이여!"
해적선 곳곳에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착란에 빠지게 만드는 비명이 높아지는 가운데, 흑기사호의 주승강구에서 오닉스가 뛰쳐나왔다. 바지만 걸친 모습이었지만 얼굴의 마스크만은 완고하게 착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돛대라도 찍어넘길듯한 그 어마어마한 배틀 엑스를 꽉 쥐고 있었다.
흑기사호의 상황도 다른 배의 사황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선원들은 서로의 얼굴에 놀라고 자신의 발걸음에 놀라고 심지어 자기 머리카락을 스스로 잡아당기며 <귀신이 내 머리를 잡아챈다!> 등의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어이없어하는 한숨 소리 한 번 뱉어볼 만하건만, 대신 오닉스는 갑판에 주저앉아 있던 해적들의 덜미를 붙잡아 일으켰다.
해적들은 질겁했지만 오닉스는 그들에게 공포에 자신을 맡기는 사치를 허락하지 않았다. 공포에 손을 떨면서도 해적들은 오닉스의 손짓에 따라 보트를 내렸다. 오닉스는 뱃전에서 그대로 보트로 뛰어내렸다. 하마터면 배가 뒤집어질 뻔했지만 오닉스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은 채 왼손을 들어 자유호를 가리켰다. 노들이 물결을 때렸고 보트는 자유호로 흘러갔다.
보트원들은 노를 젓는 단순하고 격렬한 동작이 가져다준 평온함 속에서 괴기스러운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오닉스의 기세는 분명히 누군가를 때려 죽일 기세였고, 아무리 해적이라도 동료 선박을 방문하는 몰골로는 최하급이었다. 웃통은 벗어붙이고 오른손의 도끼는 그 자체가 오른팔의 연장인 것처럼 단단히 움켜쥔 채 사트로니아의 대해적은 보트의 뱃머리에서 자유호를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흑기사호의 보트가 자유호로 흘러가는 동안에도 다른 배들에서는 비명이 끊임없이 터져나왔다.
"제기랄, 도대체 뭘 들었다고 이 지랄이야, 응? 오닉스 선장? 어디 가는 건가!"
그랜드머더호의 선장 킬리는 자유호로 향하는 오닉스의 보트를 발견하고는 뱃전(배의 양쪽 가장자리 부분)으로 상체를 내밀어 외쳤다. 그러나 오닉스는 대답하지 않았고, 킬리 역시 자신이 멍청한 짓을 했음을 깨달았다. 킬리가 다른 방식의 질문을 궁리하는 사이에, 오닉스의 보트는 자유호의 뱃전에 닿았다. 오닉스는 배틀 엑스를 허리춤에 꽂은 다음 재빠른 동작으로 건현(수면에서 상갑판 위까지의 거리)을 기어올라갔다. 쿵! 오닉스의 거구가 갑판에 서자 요란한 소리가 났다.
갑판에 얼어붙어 있던 식스는 그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오닉스의 모습에 더욱 놀랐다.
"오닉스 선장? 뭐하자는 거요, 그 도끼는 또 뭡니까?"
오닉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두 눈만을 붉게 불태우며 식스를 향해 걸어갔다. 소름이 돋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식스는 엄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는 당신의 배가 아니오, 오닉스 선장! 동료 선장에 대한 예의를 갖추시오."
오닉스는 경멸(깔아보아 업신여김)스러운 눈빛으로 식스를 보며 왼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식스는 어두운 밤에 오닉스의 빠른 손짓을 봐야 한다는 새악에 눈을 크게 떴지만, 예상과 달리 오닉스는 매우 간단한 손짓 두 개만을 보내었다. 오닉스는 먼저 새끼손가락을 펴보이고는, 손을 뒤집어 자신의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여자, 율리아나 공주? 그건 안 됩니다!"
발끈한 오닉스는 더 이상 손짓을 보내지도 않았다. 오닉스는 그대로 식스를 향해 걸어왔다. 의혹 속에서 오닉스를 바라보던 식스는 오닉스가 막을 테면 막아보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식스는 성난 오닉스의 앞을 막는 것은 맨손으로 범고래의 돌진을 막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식스는 옆으로 비켜서고 말았다.
오닉스는 거리낌(일이나 행동 따위를 하는 데에 걸려서 방해가 됨)없는 태도로 식스의 옆을 지나쳐 자유호의 승강구 앞에 섰다. 그러나 오닉스는 승강구의 계단을 내려가지는 않았다. 식스와 자유호의 선원들은 그런 오닉스의 등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오닉스는 앞이 아니라 뒤로, 즉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 식스는 계단에서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귀에 너무나 익숙한 가벼운 발자국 소리. 식스는 승강구를 통해 올라선 남자를 향해 반가움을 담아 말했다. "키 선장님!"
키 드레이번은 서두르지 않는 걸음걸이로 갑판에 올라섰다. 비명이 요란하던 자유호의 갑판은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마치 키의 펄럭이는 외투 자락이 모든 공포와 소란을 삼켜버린 것처럼. 하지만 조금 떨어진 다른 배에서는 여전히 고함이 들려왔고 그래서 식스는 속으로 한탄했다. 저 선장들께서는 제 부하 간수도 못하시나. 삼엄한(무서우리만큼 질서가 바로 서고 엄숙하다)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키가 말했다.
"잠꼬대라면 너무 시끄럽고, 반란이라면 너무 멍청하군. 네놈들은 뭘 하고 있는 거지."
고요한 선원들 사이에서 오닉스가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조금 전 취했던 동작이 다시 반복되었다. 키는 오닉스의 마스크를 물끄러미(우두커니 한 곳만 바라보는 모양) 바라보다가 말했다.
"율리아나 공주를 죽이겠다고?"
<이 귀신 소리를 들어보라! 함대에 귀신이 붙었다. 바다는 여자를 싫어한다. 지금이라도 바다에 여자를 던져 해신께 사죄드려야 한다>에 해당하는 의미를 담아 오닉스는 빠르게 손짓했다.
"귀신이라고 했나?"
오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는 싱긋 웃고는, 오닉스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질문을 했다.
"귀신에 대해 알고 싶나?"
오닉스는 주춤했다. 그리고 주위의 해적들도 의아한 표정으로 키를 바라보았다. 키는 설명하는 대신 앞으로 걸어갔다. 오닉스는 키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재빨리 배틀 엑스를 두 손으로 쥐었다. 하지만 키는 맨손이었다. 게다가 두 손은 버클(허리띠 따위를 죄어 고정시키는 장치가 되어 있는 장식물)에 얹은 채 걸어왔다.
"응? 말해 봐. 귀신에 대해 알고 싶나? 귀신을 보고 싶나?"
어느새 키는 오닉스의 바로 앞까지 걸어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오닉스는 비무장인 키를 상대로 도끼를 들어올릴 수도 없었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마스크 때문에 오닉스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 아래에서 뿜어져나오는 다급한 숨소리는 오닉스의 긴장 상태를 잘 나타내고 있었다. 키는 오닉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 눈이 귀신을 보게 하고 싶은가? 죽음을 보고 싶나?"
퍼ㅡ억. 잔인한 소리와 함께 키의 주먹이 오닉스의 복부에 꽂히자 오닉스는 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키는 오닉스의 큼직한 턱을 붙잡아 천천히 끌어올렸다. 키는 오닉스의 얼굴을 자기 얼굴 바로 앞까지 끌고 와서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오닉스를 바라보았다.
"말해 봐라, 이 후레자식아. 귀신을 보고 싶나? 귀신을 보고 싶나? 내 눈을 봐!"
오닉스는 자신의 손에 도끼가 들려져 있다는 사실도 거의 잊어버렸다. 그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키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헛바람을 삼켰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키의 동공은 축소되어 있었다.
"나는 매일 귀신을 본다. 이 눈동자에 붙어 있기 때문에, 눈을 감아도 피할 수 없지. 내 눈을 봐라, 오닉스 나이트. 귀신이 보고 싶다고 했나? 내 눈을 봐라. 수천 마리의 귀신이 바글거리는 것이 보이지 않나? 봐라, 오닉스 나이트!"
오닉스는 키의 눈 속에서 귀신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키가 죽인 뱃사람들, 그가 침몰시킨 배, 화염이 불타오르는 돛대와 폭풍에 찢겨지는 돛, 포연과 피바람 속에 으르릉거리는 해골들의 군무. 오닉스는 키의 눈 속에서 그것들을 보았다. 그의 입이 힘없이 벌어졌다.
오닉스는 무의식중에 뒤로 물러나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키는 이미 오닉스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채 오닉스의 턱을 움켜쥐고 있던 자신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나씩 손가락들이 천천히 굽혀지고, 키는 손이 하얗게 변하도록 주먹을 감싸쥐었다. 키는 그 주먹을 옆으로 뿌리면서 말했다.
"일항사(1등 항해사)!"
"예!"
"라이온 선장에게 전해라. 레보스호의 화물실을 뒤져라. 노래를 부르고 있는 꽃이 있을 것이다."
"아아, 싱잉 플로라군요!"
"그렇다. 내게로 가져와라."
"오닉스 선장도 좀 덜 뻣뻣해질 때가 되었는데."
식스는 고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라이온은 콧방귀(코로 나오는 숨을 멈추었다가 갑자기 터트리면서 불어 내는 소리)를 뀔 뿐이었다.
"그 작자가요? 설마. 나는 저주가 무서워서 평생 말을 안하기로 맹세한 다음 그것을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타입의 녀석은 평생 바뀌지 않는 법이지요."
"하긴, 그렇지."
"게다가 그 흉물스러운 마스크 좀 보십시오. 아마 지금 그 마스크를 벗으면 녀석의 얼굴은 바닷물에 표백된 바다사자 뼈만큼이나 하얗겠지요. 놈이 얼마나 오랫동안 햇빛을 안 받았는지 짐작 가십니까? 그건 뭐 때문이더라. 아, 네 얼굴에 그림자가 없어질 때 너는 죽으리라는 예언 때문이라지요? 병신 자식." -오닉스에 대해 말로 설명
고개를 끄덕이던 식스는 라이온이 유달리 신경질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경질 그만 부리게. 나도 아까는 등골이 오싹했어."
라이온은 입을 다물었다. 라이온이 비명을 지른 것을 창피스러워하고 있다는 식스의 판단은 정확했던 모양이다. 라이온은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미신적인 성격과 완고함이 결합되면 키 드레이번 같은 사람도 감당할 수 없는 작자가 태어나는 법이란 말입니다. 놈은 끝까지 뻣뻣할 겁니다. 그러니까......"
"됐네, 좀 조용히 해보게!"
식스는 조금 거칠게 말했고 이번에는 라이온도 입을 다물었다. 라이온이 조용해지자 노랫소리가 보다 정확하게 들려왔다. 잠시 귀를 기울이던 식스는 여러 개의 문 중 하나를 가리켰고, 라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안쪽인 거 같군요."
문을 열려던 라이온은 그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특별 화물실이니만큼 당연한 일이다. 라이온은 어깨를 으쓱인 다음 칼을 뽑아 자물쇠를 내리치려고(내리치다:위에서 아래로 힘껏 치다. 내려치다:사람이 어떤 대상을 위에서 아래로 힘껏 때리거나 치다) 했다. 하지만 식스는 고개를 가로저은 다음 주머니 속에서 엘리엇 선장에게 뺏어둔 열쇠 꾸러미를 꺼내었다. 라이온은 조금 궁시렁거렸지만, 식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열쇠를 맞춰나가기 시작했다. 몇 번의 시도 후 식스는 올바른 열쇠를 찾아낸 다음 특별 화물실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두 사내는 기겁하며 귀를 틀어막았다.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가 느닷없이 크게 들려왔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흐느끼는 듯한 노랫소리와 달리 싱잉 플로라는 거의 비명을 지르듯이 노래했다. 식스와 라이온은 귀를 머릿속으로 집어넣을 듯이 꽉꽉 틀어막았지만 싱잉 플로라의 노래는 머릿속에서 울려나오는 듯 낮아지지 않았다. 라이온은 비틀거리는 식스의 어깨를 잡아끌며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쾅! 라이온은 문을 걷어차고는 통로의 벽에 기대어 헉헉거렸다. 식스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토할 거 같아."
"해적이 멀미하면 삼대가 망신입니다, 헉헉."
"뭐라고? 잘 안 들려."
식스는 귓속에서 울려나오는 이명(몸 밖에 음원이 없는데도 잡음이 들리는 병적인 상태)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표정이었다. 라이온 역시 머리가 띵할 정도로 아팠다. 그는 똑바로 서려 애쓰다가 고함을 내질렀다.
"1등 항해사님! 제발 비명 좀 그만 질러요! 머리가 울린단 말입니다."
"뭐? 어, 난 비명 안 질렀는데?"
라이온은 의아한 표정으로 식스를 보다가 혀를 내찼다. 비명이 아스라하게(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분명하지 않고 희미하다)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식스가 아니라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에 놀란 해적들이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라이온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햇다.
"오닉스가 또 발작을 일으키겠군. 젠장."
키 드레이번은 분노했다.
그는 빈손으로 돌아온 라이온과 식스를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시끄러워서 못 가져왔다는 설명에는 더욱 험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라이온은 심히 억울하다는 투로 키 드레이번을 보았지만 그가 말한 변명들은 키를 이해시키기는커녕 더욱 분노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러니까, 에, 그게 꼭 시끄러워서만은 아니지요. 에, 저는 포성 속에서도 잠을 잘 수 있단 말입니다. 어, 음. 그런데 그 비명이라는 것이, 흠흠. 참, 거 뭐랄까......"
"뭐?"
라이온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목 졸린 여자 같단 말입니다.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없어요."
키는 한참 동안 라이온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그 옆에 있던 식스에게 말했다.
"일항사. 율리아나 공주를 데려가."
"예?"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가르쳐줘야 하나! 여자는 싱잉 플로라의 소리를 못 듣는다. 그러니 율리아나 공주가 들고 오게 하란 말이다!"
식스와 라이온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선장실을 빠져나왔다. 선장실을 빠져나온 라이온은 으르릉거리며 눈에 들어오는 어떤 선원이라도 붙잡아 반드시 시비를 걸어ㅡ너 이 새끼, 왜 눈을 깜빡거리는 거야!ㅡ화풀이를 하려고 마음 먹었지만 율리아나 공주가 감금되어 있는 선실까지 걸어가는 동안 한 사람의 선원도 만나지 못했다. 라이온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허, 이놈들이 다 어디 처박혀 있는 거죠?"
"전부들 메인 마스트(돛대) 아래에 모여 앉아 벌벌 떨고 있을 걸세."
"젠장. 이번에 붙잡은 것은 너무 골치 아픈 재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싱잉 플로라가 있을 줄은 몰랐지."
"아니, 그것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식스는 라이온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라이온은 얼굴을 찌푸려 미간에 세로 주름을 만들고 있었다.
"일단, 여자가 있다는 것 때문에 오닉스가 발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듣자니 놈은 무기를 휴대하고 자유호에 올라왔다면서요? 그것도 두 번씩이나. 비록 낮엔 레보스호를 습격하기 위해서였고 밤엔 율리아나 공주가 목표이긴 했지만, 어쨌든 이곳은 키 드레이번의 배입니다. 얼렁뚱땅 넘어가긴 했어도 그건 예삿일이 아닙니다."
식스는 라이온의 표정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것이다. 라이온은 계속 말했다.
"그리고, 그 여자라는 것이 카밀카르의 공주고 필마온 기사단장의 아내가 될 여자입니다. 카밀카르의 해군이나 필마온의 갈가마귀들을 무서워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둘과 원한 관계를 만들었다는 것, 기분이 썩 좋지는 않군요."
"그만. 키 드레이번이 결정한 일이야. 그리고 바다의 신사가 원한을 두려워하나. 교수대에 걸려서도 껄껄 웃으며 죽는 것이......"
"제기랄, 여ㅡ론이라는 것이 있잖습니까, 여ㅡ론!"
라이온은 여론(사회 대중의 공통된 의견)이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는 것이 퍽 자랑스럽다는 듯이 그 단어를 길게 발음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식스는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라이온을 바라보았다. 라이온은 우쭐거리며 말했다.
"필마온은 신부를 뺏긴 얼간이 취급당할 겁니다. 여ㅡ론이 그렇게 될 거라고요. 놈들은 단순한 원한이 아니라 그런 여ㅡ론에 시달리게 되는 것에 더 화를 낼 겁니다. 카밀카르도 마찬가지지요. 자국의 공주를 빼앗긴 국민들의 여ㅡ론이 어떨지 생각해 보시라고요."
"그만해. 다 왔네. 공주가 듣겠어."
식스는 방문을 가리켜 보였고 라이온은 입을 다물었다. 식스는 방문의 열쇠를 연 다음, 퍼뜩 생각난 것처러 라이온을 바라보고는 근엄한 동작으로 방문을 노크했다. 라이온이 잠시 감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예절도 아슈? 그래서 <여론>이라는 단어를 말할 줄 아는 라이온과 신사의 예절에 밝은 식스는 퍽 자랑스러운 태도로 공주의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율리아나 공주의 방으로부터 식스의 난감해하는 고함 소리가 터져나왔다.
"고, 공주님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요?"
자유호와 해적 선단은 총체적인 공포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매끄러운 밤바다 위로 주름을 잡듯 가볍게 물결치는파도 이외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해원에서,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는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음산함을 더해 갔다. 레보스호의 선실에 갇혀 있던 라스 법무대신과 슈마허도 놀랄 정도의 노랫소리였다. 그들은 항해 동안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를 들어왔지만 이토록 기분 나쁜 노랫소리는 듣지 못했었다.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는 약간 슬프고, 동시에 약간 낯부끄러운 노랫소리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 밤바다를 새하얀 공포로 물들이고 있는 노랫소리는......
"고스트 송Ghost song이야."
라스 법무대신은 무의식중에 말했다.
"이건 고스트 송이라고."
슈마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불편한 몸을 간신히 일으키며 말했다.
"저는 싱잉 플로라가 고스트 송을 부른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로드 라스."
"서 슈마허. 저 꽃은 지금 낮의 전투에서 죽은 이들을 대신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걸세."
라스 법무대신은 자신의 말에 찬성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슈마허는 그런 라스를 미심쩍은(분명하지 못하여 마음이 놓이지 않다)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음산한 노랫소리가 갑자기 커지자 찔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자유호의 갑판에서는 키 드레이번이 끔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눈에 들어오는 모든 선원들을 사나운 시선으로 노려보았지만 선원들은 고개를 돌리거나 발끝을 바라보는 식으로 키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아무리 선장의 명령이라도, 저는 저 꽃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키는 그런 그들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증오했다. 함대 내에 있는 유일한 여자인 율리아나 공주조차도 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도대체 저 꽃을 어떻게 해야 되는 가. 키는 레보스호를 격침시키라는 명령을 내리고 싶어졌다.
오닉스는 심술궂은 표정을 지은 채 그런 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마스크 때문에 아무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오닉스는 캡스턴(배에서 닻 등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는 밧줄을 감는 실린더)에 기대어 앉아서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었으며, 불량스럽게 고개를 조금 기울인 상태였다. 그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라 있을 것인지는 뻔하다. 키는 낮게 말했다.
"한 놈도 없는가. 내 부하들 중에 나를 위해 저 꽃을 가져올 놈은 하나도 없단 말인가."
선원들은 모두 키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척했다. 고지식한 식스는 차마 그런 행동을 취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매우 송구스러워하는 표정으로 키를 바라봄으로써 키를 미치게 만들었다. 키는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가지."
"안 됩니다!"
식스는 비명처럼 외쳤다. 그는 키의 허리를 잡기라도 할 듯한 모습으로 말했다.
"안 됩니다, 선장님. 저 꽃에 가까이 가시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저는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어도 정신이 이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시고 그것을 만지시면, 오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기만 합니다."
"한 놈도 없잖은가!"
"아침까지, 아침까지만 기다려주십시오. 낮이 되면 노래를 멈출 겁니다. 그럼 그때 제가 직접 가져다 바치겠습니다."
"웃기지 마! 아침이 오면 아마도 난 혼은 악마의 꽃에 빼앗기고 육신만 남은 껍데기 유령들이 모는 배의 선장이 될 것이다. 그렇잖으면 그들의 선장을 위해 꽃 하나 가져다줄 수 없는 너희 덜떨어진 해적놈들이 모두 바다에 빠져들든가!"
"제가 가도 될까요?"
목소리는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키와 식스, 그리고 각자 다른 표정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라이온과 오닉스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갑판 해치 쪽이었다. 해치는 조금 열려 있었고 그 아래에서 사람의 머리처럼 보이는 것이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어두운 밤이라 해치 아래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키는 삼엄하게 말했다.
"누구냐, 노잡이인가? 올라와서 말해라!"
해치 아래에서 말하던 자는 머뭇거리며 갑판 위로 올라와서는 얌전히 무릎을 꿇었다. 그가 입을 떼기도 전에 라이온이 먼저 그를 알아보았다.
"아, 너. 오스발이라고 했지?"
무릎을 꿇고 있던 오스발은 고개를 조금 들었다.
"예. 그렇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그 꽃을 가져오겠습니다."
키 드레이번은 오스발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식스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말했다.
"일개 노잡이 노예 주제에...... 네가 할 수 있단 말이냐?"
오스발은 다시 송구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발음은 정확했으며 공포에 질려 있는 것처럼 들리는 부분은 없었다.
"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들도 낮의 전투 때문에 몹시 피곤합니다. 그런데 저 노래 때문에 친구들이 잠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예장님도 몹시 무서워하고 계시고요. 저는 낮에 노예장님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이 많은지라 어떻게든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까짓 꽃이 문제라면 저 같은 미천한 작자도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식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뭐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키가 먼저 말했다.
"너는 저 노래가 들리지 않느냐?"
오스발은 노스윈드가 직접 말을 걸어왔다는 것에 대해 크게 황송해하며 말했다.
"저, 이상합니다. 아주 가느다란 노래 비슷한 것이 들리기도 합니다만, 저런 작은 소리에 왜...... 아, 절대로 귀하신 분들을 욕보이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라이온은 눈을 껌뻑거리며 중얼거렸다. "저 녀석, 가는귀가 먹었나(작은 소리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귀가 조금 먹다)?" 하지만 아무도 라이온의 짐작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스발은 키나 식스의 말에는 또박또박 대답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온은 다시 한번 주위의 시선을 끌어들이려고 시도했다. "저 녀석, 여자인가 봐." 라이온은 기어코 주위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주위의 해적들이 그를 때려 죽일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키가 말했다.
"오스발이라고 했나? 좋다. 만일 네가 이 얼간이들을 대신해서 저 꽃을 가져온다면 평수부로 승격시켜 주겠다."
식스와 라이온, 오닉스, 그리고 갑판 이곳저곳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던 해적들은 키의 이런 파격적인 제안에 대해 각자의 방식으로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들은 일개 노예가 그들과 같은 신분이 된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까지도 느꼈지만, 키의 선언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시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도저히 싱잉 플로라에 다가갈 수 없으니까. 하지만 잠시 후 그들의 놀라움은 경악(소스라치게 깜짝 놀람'놀라움'으로 순화)으로 바뀌었다.
오스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양하겠습니다."
"뭐라고?"
키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고, 그 표정은 주위를 둘러선 해적들의 얼굴 대부분에 떠올라 있는 것과 같았다. 오스발은 키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고는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해적을 교수대에 매다는 나라는 많아도 노잡이 노예를 교수대에 매다는 나라는 없습니다. 저, 그러니 그런 끔찍한 승격은 바라지 않습니다."
키는 잠시 말을 잃은 채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식스와 라이온 역시 경악을 가누지 못한 채 굳어버렷다. 그래서 오스발의 발언에 대해 가장 먼저 실감 넘치는 반응을 보여준 것은 의외로 과묵한 오닉스였다.
오닉스는 발을 쾅 굴렀다. 그는 옆에 세워둔 도끼를 집어들고는 오스발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마스크 아래 오닉스의 눈이 붉게 타오르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의 눈에 확실히 보였다. 오닉스는 아무 말 없이ㅡ원래 말을 안하지만ㅡ도끼를 집어 올렸다. 키가 재빨리 손을 들었다.
"멈춰라, 오닉스!"
키의 목소리에 식스는 간신히 제정신으 되찾으며 외쳤다.
"저런 발칙한 놈이!"
그리고 라이온 역시 얼굴 근육의 대부분을 수축시킨 표정으로 말했다.
"저놈이 지금 우리를 놀린 거야?"
그리고 다른 해적들 역시 살벌한 표정을 지은 채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해적들이 내뱉은 말의 주된 내용은 감히 교수대가 어쩌니 한, 저 건방진 노예의 소화기관이나 순환기 계통의 구조를 감상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내장을 끄집어내 목을 졸라줘...... 어쩌고 하는 표현은 너무 온화하다는 이유로 배척되는 분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그러나 키는 아무 말 없이 오스발을, 정확하게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오스발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그럼,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조용히 잠자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야 내일도 노를 저을 수 있을 테니까요."
말을 마친 오스발은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키는 잔뜩 찌푸린 눈으로 오스발을 바라보았고 그 동안 해적들은 몹시 씨근거렸다(고르지 아니하고 거칠고 가쁘게 숨 쉬는 소리가 자꾸 나다. 또는 그렇게 하다). 키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일항사, 라이온 임시 선장. 저 노예를 데리고 가서 싱잉 플로라를 가져와라. 내 방에서 기다리겠다."
식스와 라이온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스발은 주춤거리며 일어섰고 키는 그런 오스발을 향해 말했다.
"네가 내일도 자유호의 노를 저을 수 있을지 두고보지. 만약 네가 싱잉 플로라를 내게 가져오지 못한다면 너는 다른 배의 노를 저어야 될 것이다."
지옥의 강을 건너기 위해, 라는 말은 생략되었지만. 대부분의 해적들과 오스발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오스발이 다시 고개를 숙인 사이에 키는 몸을 돌려 승강구로 내려갔다. 남겨진 오스발은 잠시 주저하는 눈으로 라이온을 바라보았다. 라이온은 <내가 너를 혼내주고 싶어한다는 것을 잘 알겠지?>라고 물어보는 듯한 눈으로 오스발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따라와."
해적들은 살벌한 시선으로 바라보며서도 길을 틔워주었고(막혀 있던 것을 치우고 통하게 하다의 피동사의 준말) 식스와 라이온, 그리고 오스발은 보트에 올라 레보스호로 향했다.
레보스호에 도달하여 특별 화물실까지 걸어가는 동안 식스와 라이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오스발은 그런 두 사람의 등 뒤를,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따라갔다. 라이온은 얼핏 고개를 돌려 오스발에게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한 걸음씩 데어놓을 때마다 점점 더 크게 들려오는 저 노랫소리가 진짜 드리지 않는지. 하지만 고개를 돌린 라이온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어두운 통로 속에 시커멓게 보이는 오스발의 얼굴뿐이었다. 최소한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스발은 태연한 자세와 예의 바르게 그들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저 녀석은 어떻게 된 녀석이지?>
라이온은 식스의 얼구을 훔쳐보았다. 랜턴을 들고 있기에 그의 얼굴은 잘 보였으며, 안타깝게도 근엄한 식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초조함으로 진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문득 라이온은 손을 들어 이마를 만져보았다. 자신의 이마를 만진 손에 느껴지는 축축함이 라이온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듣는 이의 뼈까지도 흐느끼게 만들 것 같은 노랫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세 사람은 다시 특별 화물실 앞에 섰다.
식스는 내키지 않는 동작으로 열쇠를 연 다음 라이온을 쳐다보았다.(얼굴을 들고 올려다보다) 그리고 라이온 역시 식스를 쳐다보았다. 어쨋든, 두 사람 모두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라이온은 약간 쉰 목소리로 오스발을 불렀다.
"오스발. 안에 들어가서 꽃을 들고 나와."
오스발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두 분은 안 들어가십니까? 식스는 갑자기 천장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라이온은 거칠게 말했다.
"꽃만 가지고 나와야 한다. 금붙이나 보석 따위를 삼킬 생각은 안하는 것이 좋을걸. 화물 목록이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난 제일 먼저 네 녀석의 뱃속부터 조사하겠다."
오스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노예에게 금붙이나 보석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스발은 싱긋 웃기까지 했다. 라이온은 그 여유 있는 웃음이 싫었지만 아무 말 없이 길을 틔워주었다. 두 사람 사이를 지나친 오스발은 식스가 열어둔 문을 느닷없이 열었다.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식스와 라이온은 모두 오스발을 쳐다보았고, 그래서 가까스로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오스발은 태연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오스발은 잠시 멈춰 서서 식스를 돌아보기까지 했다.
"저, 죄송합니다만 그 랜턴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안이 어둡군요."
입을 열기만 하면 비명이 터져나올 것 같았기에 식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오스발을 바라보기만 했다. 오스발이 다시 말하려 할 때 라이온이 잔뜩 쉰 목소리로 거칠게 외쳤다.
"빌어먹을 놈아, 네 녀석이 이 안에 불이라도 지르면 어쩌라고! 밖에서 불을 비춰줄 테니 어서 들어가!"
오스발은 어깨를 움츠리고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식스는 덜덜 떨리는 손을 힘들게 들어올려 방 안으로 불을 비춰주었다.
율리아나 공주는 많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조금 전까지 공주는 불안감과 공포 쪽에 많이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공주는 솔직한 호기심으로 제국의 공적 제1호를 바라보았다. 키는 그 호기심 어린 시선에 조금 놀랐다. 그리고 그 놀람 때문에 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불쾌해할 줄 알았는데. 독특한 아가씨군."
"말했어! 어, 그런데 무슨 말을 하셨죠?"
"......거기 앉으시오."
"아, 예."
공주 역시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투로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자신을 꾸짖기 시작했다. 멍청하긴. 왜 해적의 말을 기다린 거야. 그냥 앉으면 되는 걸 가지고. 율리아나 공주는 자신에 대해 비웃으며 의자를 끌어와 키의 책상 앞에 놓았다. 잠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서로를 응시했다. 그리고 키는 두번째로 항복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에겐 익숙한 일은 아니었다.
"소개해야 되는 거겠지. 키 드레이번이오."
"율리아나 입니다. 이곳은 궁전이 아니니 길고 복잡한 이름 다 부르지 않아도 되겠지요?"
"다 기억하기는 하오?"
"딜비움 그랜다이 레보라 아크 리 바레린 길리데아 율리아나 카밀카르라고 말한다면 자기 이름을 말할 줄 아는 것이 무슨 자랑거리냐고 되물을 거죠?"
고풍스러운 엘프식 작명법이 따른 길고 긴 이름을 들은 키는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 미소를 본 율리아나 공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웃으시네요?"
"입이 있으니까."
대답하며 키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율리아나 공주의 손이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고 그녀의 동공은 잔뜩 팽창된 채 키의 움직임을 쫓았다. 책상 옆을 돌아 공주 앞에 온 키는 책상 귀퉁이에 걸터앉아서는 공주를 바라보았다. 공주는 키의 턱을 올려다보는 대신 고개를 숙여 자신의 무릎을 보며 말했다.
"말해 두겠어요. 라이온 씨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자살 미수범이에요. 바다에 뛰어들려고 했었지요."
"왜 그랬소?"
"당신에게 나를 제공할 의사는 별로 없으니까. 지금도 그 결심은 그대로예요."
말을 마치는 율리아나 공주는 표독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려 애쓰면서 키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공주의 커다란 눈은 크게 떠지자 더욱 둥글게 바뀌었을 뿐, 소기의 목적 즉 키를 위협하려는 목적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키는 고개를 조금 가로저었다.
공주는 입을 앙다문 채 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공적 제1호. 제국의 8할을 휩쓸고 열한 개의 왕관과 여섯 개의 지팡이를 파괴한 대마법사 하이낙스 이후 두번째로 그런 칭호를 받은 사내. 그것은 키 드레이번의 강력함을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이낙스가 제국에게 어느 정도의 타격을 주었는지를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제국의 최전성기라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해적에게 제국의 공적 1호라는 칭호를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제국이 그정도로 처절한 타격을 입었기에 이런 해적의 발호도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이름만으로 제국의 모든 뱃사람들을 진감케 하는 사나이가 말했다.
"당신, 착각하고 있군."
"착각이라고요?"
"당신은 나에게 자신을 제공할 필요가 없소. 당신을 기다리는 자는 따로 있으니."
공주는 순간 아직 결혼하지도 않은 미래의 남편 때문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럼, 몸값을 받으실 건가요?"
"뭐요?"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도 로네스 경에게." 일단은 이렇게 불러야 할 것이다. 아직은 남편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 "날 보내주시고 몸값을 받으시려는 것 아닌가요?"
키는 빙긋 웃었고 율리아나 공주는 그 웃음이 마음에 들었다. 키는 웃는 얼굴을 바꾸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런 것이 있을지 의심스럽지만, 만일 필마온의 갈까마귀들에게 받을 것이 있다면 직접 검독수리의 관문을 열고 들어가 받아낼 거요."
율리아나 공주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말했다.
"누구도 강제로 열 수는 없엇던 문을 새장 문이나 여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새장의 문을 열어본 적이 있소?"
"예?"
키는 책상머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공주의 무릎 바로 앞에 선 채로 공주를 내려다보았고, 공주는 팔걸이를 단단히 쥔 채 몸을 꺾어 키를 올려다보았다.
"새장의 문을 열어 새로 하여금 그 메마른 날개에 자유의 공기를 적시도록 해본 적이 있소?"
너무 현학적인 질문을 들은 율리아나 공주는 입을 조금 벌린 채 키의 어두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키는 갑자기 몸을 숙였다. 그리고는 의자의 팔걸이를 짚으며 공주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다대었다. 해적과 공주의 얼굴은 1피트 정도의 거리만을 두고 서로를 쳐다보게 되었다. 공주의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고동쳤지만 키는 여상하게 속삭였다.
"새장의 문을 여는 것이 그렇게 쉬운 거요? 그 새가 누려온 안락과 안전 대신 무자비한 자유를 주는 것이 과연 그 새를 위한 일이오?"
"모르......몰라요. 하,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어요."
"말해 보시오."
얼굴 바로 앞에 키의 두 눈이 있었기에 그럴 수는 없었지만, 공주는 입술을 핥고 싶었다. 율리아나 공주는 힘들게 말했다.
"당신, 당신은 내게 질문하고 있지만, 대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
키의 눈에 묘한 빛이 지나갔다.
키는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책상을 돌아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율리아나 공주가 한숨을 내쉴 사이도 없이 키는 곧장 말했다.
"나가보시오."
공주는 떨떠름한 얼굴로 키를 바라보았지만, 키는 말을 마치자마자 의자를 뒤로 돌렸다. 공주는 일어나서 키의 등을 한번 바라본 다음 문으로 걸어갔다. 그때 키가 등을 돌린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문을 강하게 잡아당기시오."
공주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키를 바라보았지만, 키는 여전히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총명한 공주는 곧 키의 말을 이해했고, 그래서 얼굴을 붉히며 문을 확 잡아당겼다. 덕분에 선장실의 문에 귀를 바싹 가져다댄 채 엿듣고 있던 라이온외 몇몇 해적들이 선장실 안으로 일제히 나동그라졌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수면으로 미끄러졌다.
수평선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진 해역으로 날아든 갈매기들은 탐욕스러운 노래를 부르며 자맥질을 해대었다. 물론 배의 파편들을 주워모아 유족에게 전달해 주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바닷속에서는 탐욕스러움에 있어 갈매기에 절대 뒤지지 않는 남해의 상어들이 허연 몸을 뒤집어가며 시체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가끔 애처로운 비명이 들려왔지만, 해적들이 던진 구명 부이를 붙잡고 올라오는 이들은 적었다. 그들 대부분이 전투에 의해 부상을 입은 채 바다에 떨어진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자유호의 1등 항해사 식스는 자유호의 선교에 우뚝 선 채 레보스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보스호에 실려 있는 엄청난 양의 화물은 도저히 자유호로 옮겨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식스는 레보스호를 통채로 끌고 가기로 결정했다. 레보스호를 끌고가기 위해선 레보스호의 선원들이 필요했고, 그래서 라이온에게 그 일을 맡긴 지금 식스는 분통이 터지는 것을 참으며 입술을 꾹 다문 채 레보스호를 쏘아 보고만 있었다.
라이온은 자신을 바라보며 분을 삭히고 있는 식스의 눈길을 충분히 느꼈고, 그래서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식스의 비위를 박박 긁는 일을 수행했다. 라이온은 기세좋게 외쳤다.
"다음 녀석!"
꽁꽁 묶인 채 갑판에 무릎 꿇려 있던 카밀카르 전투병들 중 한 명이 해적들의 손길에 의해 일으켜세워졌다. 병사는 증오가 담긴 눈으로 라이온을 바라보고는 해적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직접 뱃전으로 향해 걸어갔다. 레보스호의 오른쪽 뱃전에는 라이온이 <감별사>라고 부르는 판자가 바다를 향해 길게 내밀어져 있엇다. 당당하게 걸어간 병사가 판자 위에 발을 올리자, 라이온은 그 병사의 등을 향해 지금껏 몇 번이나 반복했던 질문을 지겨워하는 기색도 없이 말했다.
"자, 묻겠다. 친구. 상어가 될 텐가, 상어밥이 되겠는가?"
병사는 고개를 돌려 라이온을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지옥에서 만나지."
라이온은 실망한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마지막은 자신의 취향대로 걸어가도록 배려한다는 원칙을 세워두었기에 라이온은 포로의 등을 칼로 쑤셔대는 짓은 하지 않았다. 병사는 천천히 판자 위를 걸어갔다. 뱃전에 와 부딪히는 잔물결 소리와 늦은 오후의 햇살만이 고요히 떨어져내리는 가운데 병사는 뒤로 팔이 묶인 채 수평선을 향해 걸어갔다.
판자 끝에 선 외로운 병사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짧은 정적 후 병사는 마지막 걸음을 내디뎠고, 곧 판자 위에서 병사의 모습은 사라졌다. 풍덩! 물소리가 들려올 뿐, 배 위의 아무도 뱃전으로 머리를 내밀어 수면 위에 그러지는 파문이나 물보라를 보지는 않았다. 해적들은 각자의 무기를 짚은 채 묵묵히 고개를 숙였고, 라이온 역시 고개를 숙여 사내의 저승길이 편안하기를 기도했다. 짧은 기도를 마친 라이온은 곧 표정을 바꾸며 외쳤다.
"다음!"
해적들에 의해 일으켜세워진 병사의 얼굴은 어려보였고, 게다가 얼굴 근육 전체를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라이온은 혀 차는 소리를 내며 병사를 바라보았다. 젊은 병사는 걸음을 떼지 못했다. 해적들은 라이온을 한번 쳐다본 다음 젊은 병사의 겨드랑이에 팔을 쑤셔넣었다. 젊은 병사는 발을 질질 끌면서 판자 쪽으로 끌려왔다.
"젊은 친구. 상어가 될 텐가, 상어밥이 될 텐가?"
젊은 병사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라이온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이 몇 번 움직였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가쁜 숨소리만이 새어나올 뿐이었다. 그러나 라이온은 그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라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어넣어."
"아, 아냐ㅡ"
"집어넣어!"
라이온은 젊은이의 목소리가 묻힐 정도로 크게 고함 질렀다. 해적들은 재빨리 사내의 등을 떠밀었고, 젊은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바다에 빠졌다. 갑판에 남아 있던 병사들의 얼굴 위로 무서운 공포와 침묵이 동시에 흘렀다. 라이온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번에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 것은 기도가 아니었다.
"죽는 것까지 도와줘야 되는 자네에겐 삶의 대가가 너무 무거울 걸세, 친구. 자네가 방랑하기에 이 세상은 너무 황량해."
짧은 침묵 후 고개를 든 라이온은 다시 명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라? 슈마허로군."
슈마허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라이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처 입은 어깨에선 피가 엉겨붙어 끔찍한 꼴을 하고 있었고, 얼굴은 창백해진 채 다리를 떨고 있었다. 그러나 슈마허를 바라보는 라이온의 눈에는 아무런 동정심도 없었다. 라이온은 오로지 기대감만을 담은 채 슈마허를 바라보았고, 그 시선 속에 슈마허는 다리를 끌면서도 힘겹게 뱃전을 향해 걸어갔다. 슈마허가 떨리는 다리로 판자 위에 서자, 라이온은 담담하게 말했다.
"자, 용맹한 서 슈마허. 상어가 되겠는가, 상어밥이 되겠는가?"
피를 많이 흘린 슈마허는 몽롱한 정신 속에 판자를 내려다보았다. 바다는 붉었다. 먼저 떨어져간 병사들은 익사하기도 전에 포악한 남해의 상어들의 습격을 받았고, 그래서 바다는 오후의 햇살 속에서 더욱 붉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슈마허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햇살은 따스했지만 슈마허는 어깨를 떨고 있었다.
"상어가...... 되겠다."
"그래. 잘 알겠ㅡ뭐라고?"
고개를 끄덕이던 라이온은 당황하며 되물었다. 슈마허는 판자 위에서 몸을 돌려 라이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어가 되겠다."
라이온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슈마허를 보았지만 역광 때문에 그 얼굴을 잘 볼 수 없었다. 라이온의 입술이 일그러지며 갑작스럽게 폭언이 튀어나왔다.
"이런 개같은 새끼를 봤나, 섬겨야 할 레이디를 강탈당한 기사가 목숨을 구걸하는 거냐?"
"그렇다."
"좋아, 이 자식아. 넌 특별 대우다. 내 밑에 넣어서 귀여워해주지. 그놈 당장 판자 위에서 끌어내!"
해적들은 슈마허를 판자 위에서 끌어내렸다. 그때까지 간신히 버티던 슈마허는 판자 아래로 내려오자마자 갑판 위에 쓰러졌다. 바닥에 나뒹구는 슈마허를 경멸스럽게 내려다보던 라이온은 턱짓을 했다.
"저놈 데리고 가서 치료해. 반드시 살려놔야 돼. 알겠냐?"
슈마허는 다시 거칠게 일으켜졌고 해적들의 손에 의해 선실로 끌려갔다. 침을 뱉으려던 라이온은 이 배를 끌고가야 된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도로 침을 삼켰고, 그래서 기분이 더욱 지저분해졌다.
"제기랄, 다음!"
그러나 잠시 후 라이온은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라이온은 속으로 슈마허에게 경의를 보내었다. 지금까지 줄곧 바다로 뛰어들던 카밀카르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휘자의 변절을 본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충성을 지켜야 할 필요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많은 수의 병사들이 판자 위에서 도로 내려왔다. 라이온은 판자 위에서 내려오는 병사들의 얼굴에서 아주 뚜렷한 두 개의 문장을 읽을 수 있었다. 지휘관인 슈마허도 변절했다. 내가 왜 개죽음을 당해야 하나?
더 이상 판자 건너기가 필요없게 되었다. 카밀카르 병사들은 앞다투어 해적이 될 것을 맹세했다. 라이온은 이마를 싸쥐고는 남은 병사들을 모두 풀어줄 것을 명령했다.
풀려나는 병사들을 보던 라이온은 몸을 돌려 판자 쪽으로 걸어갔다.
해적들과 병사들이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라이온은 판자 끝까지 걸어갔다. 마치 빠져드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판자 끝에 선 라이온은 저물어가는 서녘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망할 놈. 나는 죽어가면서도 객기 부릴 줄 아는 놈이 싫어."
라스 법무대신은 선실을 거닐면서 초조한 표정으로 선실문을 바라보았다. 좌로 세 걸음, 우로 세 걸음. 무의식중에 선실의 넓이를 재고 있던 라스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앉았다.
"라스와 공주가 숨어 있는 선실로 느닷없이 들이닥친 시커먼 갑옷의 해적은 라스를 한 주먹에 기절시켰다. 정신을 차린 라스는 세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율리아나 공주가 사라졌다는 사실과, 그는 이곳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과, 아무래도 코뼈가 내려앉은 것 같다는 사실. 마짐가 사실이 그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있기는 했지만 라스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첫번째 사실에 집중했다. 공주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란 라스가 바라보는 가운데, 선실로 들어선 해적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데리고 온 사내를 바닥에 집어던지고는 몸을 돌려다. 라스는 해적들의 등을 향해 외쳤다.
"여, 여보게. 이봐!"
그러나 해적들은 무정하게 뭄을 닫았다. 철컹. 밖에서 빗장 채우는 소리가 들리자 라스는 좌절하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바닥에 쓰러진 사람이 슈마허인 것을 알고는 다시 놀랐다.
"서 슈마허?"
라스는 황급히 슈마허를 부축하여 침대에 눕혔다. 슈마허의 어깨에는 붕대가 매어져 있었고 갑옷이나 무기는 모두 없어진 상태였다. 침대에 눕혀진 슈마허는 눈을 떠 라스를 바라보고는 힘들게 웃으며 말했다.
"로드...... 라스. 로드와 감방 동기가 될 줄은 꿈에도......."
"말하지 말아요, 말하지 말아. 이런 큰 상처라니.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일단은 좀 쉬도록 하시오, 서 슈마허."
"서......가 아닙니다."
"뭐요?"
"서가 아닙니다...... 저는 해적이 되었습니다."
라스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슈마허를 바라보았지만 반문을 하거나 재촉하지는 않았다. 슈마허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판자 건너기...... 아십니까?"
라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슈마허는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해적이 되기로...... 해적 슈마허라고 불러주십시오."
"이유를 말해 보시오."
슈마허는 하얗게 웃었다.
"부하들...... 마음 편하게......"
잠시 기다리던 라스는 슈마허가 이미 실신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라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슈마허에게 시트를 덮어주고는 의자에 앉았다.
판자 건너기라. 그런 것을 시켰단 말이지. 라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젊은 청년에겐 너무 가혹한 일이었겠군. 라스는 슈마허의 말에서 생략된 부분을 거의 정확하게 추측해낼 수 있었다. 부하들이 마음 편하게 변절하여, 그들 자신의 목숨을 보존할 수 있도록 저 스스로 먼저 변절했습니다.
골똘히 생각하던 라스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렷다. 그런데 왜 내게는 판자 건너기를 시키지 않은 거지? 아아, 그렇군. 라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의 노회(경험이 많고 교활하다)한 머릿속으로 해답이 떠올랐다.
몸값이군. 그렇다면 공주님께서도 무사하실 가능성이 높군.
라이온의 상당히 거친 해적 선발이 호위대장 슈마허의 자발적인 변절에 도움을 받아 간단히 마무리되었을 때, 태양은 이미 수평선을 넘었고 하늘은 부드러운 검붉은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판자 위에 서 있던 라이온은 벼락출세의 본보기가 되어 있었다.
"선장? 내가?"
"물론 임시직입니다. 따라서 취임식 같은 것은 없습니다."
판자 끝으로 걸어갈 때 자유호의 갑판장이었던 라이온은, 그래서 판자 끝에서 돌아올 땐 레보스호의 임시 선장이 되어 있었다. 비록 그 안에 실린 화물을 다 팔아치우는 순간 침몰시킬 배였지만, 어쨌든 선장은 선장이다. 석양을 바라보던 라이온은 노련한 선장 같은 표정을 지어보려다가, 그런 자신을 비웃어준 다음 고개를 돌려 레보스호의 선장으로서의 업무를 시작했다.
피탄에 의해 선체에 구멍을 몇 개 나고 충각에 꿰뚫리기도 했지만, 라이온은 레보스호가 웬만한 파도를 만나지 않는 이상 가라앉을 것 같지는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배의 보수에 앞서 사상자들의 시체를 바다에 던지느 작업이 먼저 시작되었다. 해적이 되기로 맹세한 카밀카르의 병사들은 아무 말 없이 전우의 시체를 바다에 던졌다. 그들 중 많은 수가 가슴속으로 통곡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풍덩거리는 물소리만이 들릴 뿐 밤바다는 고요했다. 다른 해적선들 역시 침묵 속에서 레보스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체 처리와 부상자 격리가 끝났을 때 밤은 이미 깊어 별빛이 아롱거렸다.
레보스호의 선원들은 격렬한 전투와 그 뒷처리로 정신이 몽롱할 정도의 피로를 느꼈다. 노잡이 노예들 역시 마찬가지인지라, 라이온은 자유호로 전갈을 보내었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나직한 지시와 명령들이 오갔다. 잠시 후 해적 선단과 레보스호는 밤바람에 몸을 맡긴 채 조용히 떠내려가는 식의 항해를 시작했다. 배들 간의 간격을 나타내기 위해 선수와 선미에 밝혀든 등불만이 장난스럽게 까불거릴 뿐 아홉 척의 배는 정적의 해원을 소리 없이 미끄러졌다.
흔히 육지 사람들이 상상하곤 하는 해적들의 미친 듯한 잔치ㅡ술통이 바닥날 때까지 퍼마시고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고 불운한 포로들을 상어에게 던져주는 식의ㅡ는 없었다. 격심한 전투 직후에 그런 짓을 했다가는 아무리 강인한 해적들이라 해도 모두 혈관이 파열되고 말 것이다. 게다가 노스윈드의 해적들은 기율(도덕상으로 여러 사람에게 행위의 표준이 될 만한 질서)이 꽤나 엄하다. 다만 해적선 곳곳에선 레보스호에서 슬쩍한 고급 술병으로 조촐한 잔치를 벌이는 해적들이 있었지만, 엄격한 식스도 눈감아줄 정도의 작은 잔치였다.
사건은 그런 고요함 때문에 일어났다.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엘리엇 선장의 소유였던 침대에서 사지를 제멋대로 던진 채 잠들어 있던 라이온은 섬뜩한 느낌을 받으며 일어났다. 침대에 앉은 채 라이온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사방을 훑어보았다. 무엇 때문에 잠에서 깨었더라?
시각, 어둡다. 후각, 별 냄새 없군. 촉각, 매끄러운 시트의 감각. 아아, 이 맛에 선장이 되는 건가. 청각, 뱃전에 부딪히는 물소리와 노랫소리. 별 이상이 없는...... 잠깐. 노랫소리라고?
라이온은 자신의 등뼈가 타다다닥 소리를 내며 곧추서는(꼿꼿이 서다) 느낌을 받았다. 밤바다 위에서, 특히나 해적 선단에서느 절대로 들릴 리가 없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낮은 허밍.
"우와아악!" 라이온이 비명을 지른 바로 그 순간, 선단 곳곳에서 머리카락이 쭈뼛 설 것 같은 비명들이 터져나왔다. 비명들은 서로 공명하여 더욱 처절해졌고, 갑판을 쿵쾅거리는 발자국 소리와 덜거럭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퍼졌다. 고요한 밤항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 같은 소란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해적선 곳곳에서 랜턴 불빛이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목적을 잃고 달리던 해적들은 서로에게 부딪히며 놀랐고, 돛에 비치는 자신들의 괴물 같은 그림자를 보고도 놀라 주저앉아서는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자유호의 주승강구에서 갑판 위로 뚜어올라온 식스는 당황함 고함 질렀다.
"모두 정신차려! 조용히 햇!"
그때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모든 사람들이 숨을 몰아쉬기 위해 잠시 입을 다물었기에 발생한 극히 짧은 정적 속에서, 식스는 바람결을 타고 들려오는 부드러운 허밍을 들었다.
음...... 음음...... 음......
식스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신이여!"
해적선 곳곳에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착란에 빠지게 만드는 비명이 높아지는 가운데, 흑기사호의 주승강구에서 오닉스가 뛰쳐나왔다. 바지만 걸친 모습이었지만 얼굴의 마스크만은 완고하게 착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돛대라도 찍어넘길듯한 그 어마어마한 배틀 엑스를 꽉 쥐고 있었다.
흑기사호의 상황도 다른 배의 사황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선원들은 서로의 얼굴에 놀라고 자신의 발걸음에 놀라고 심지어 자기 머리카락을 스스로 잡아당기며 <귀신이 내 머리를 잡아챈다!> 등의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어이없어하는 한숨 소리 한 번 뱉어볼 만하건만, 대신 오닉스는 갑판에 주저앉아 있던 해적들의 덜미를 붙잡아 일으켰다.
해적들은 질겁했지만 오닉스는 그들에게 공포에 자신을 맡기는 사치를 허락하지 않았다. 공포에 손을 떨면서도 해적들은 오닉스의 손짓에 따라 보트를 내렸다. 오닉스는 뱃전에서 그대로 보트로 뛰어내렸다. 하마터면 배가 뒤집어질 뻔했지만 오닉스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은 채 왼손을 들어 자유호를 가리켰다. 노들이 물결을 때렸고 보트는 자유호로 흘러갔다.
보트원들은 노를 젓는 단순하고 격렬한 동작이 가져다준 평온함 속에서 괴기스러운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오닉스의 기세는 분명히 누군가를 때려 죽일 기세였고, 아무리 해적이라도 동료 선박을 방문하는 몰골로는 최하급이었다. 웃통은 벗어붙이고 오른손의 도끼는 그 자체가 오른팔의 연장인 것처럼 단단히 움켜쥔 채 사트로니아의 대해적은 보트의 뱃머리에서 자유호를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흑기사호의 보트가 자유호로 흘러가는 동안에도 다른 배들에서는 비명이 끊임없이 터져나왔다.
"제기랄, 도대체 뭘 들었다고 이 지랄이야, 응? 오닉스 선장? 어디 가는 건가!"
그랜드머더호의 선장 킬리는 자유호로 향하는 오닉스의 보트를 발견하고는 뱃전(배의 양쪽 가장자리 부분)으로 상체를 내밀어 외쳤다. 그러나 오닉스는 대답하지 않았고, 킬리 역시 자신이 멍청한 짓을 했음을 깨달았다. 킬리가 다른 방식의 질문을 궁리하는 사이에, 오닉스의 보트는 자유호의 뱃전에 닿았다. 오닉스는 배틀 엑스를 허리춤에 꽂은 다음 재빠른 동작으로 건현(수면에서 상갑판 위까지의 거리)을 기어올라갔다. 쿵! 오닉스의 거구가 갑판에 서자 요란한 소리가 났다.
갑판에 얼어붙어 있던 식스는 그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오닉스의 모습에 더욱 놀랐다.
"오닉스 선장? 뭐하자는 거요, 그 도끼는 또 뭡니까?"
오닉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두 눈만을 붉게 불태우며 식스를 향해 걸어갔다. 소름이 돋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식스는 엄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는 당신의 배가 아니오, 오닉스 선장! 동료 선장에 대한 예의를 갖추시오."
오닉스는 경멸(깔아보아 업신여김)스러운 눈빛으로 식스를 보며 왼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식스는 어두운 밤에 오닉스의 빠른 손짓을 봐야 한다는 새악에 눈을 크게 떴지만, 예상과 달리 오닉스는 매우 간단한 손짓 두 개만을 보내었다. 오닉스는 먼저 새끼손가락을 펴보이고는, 손을 뒤집어 자신의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여자, 율리아나 공주? 그건 안 됩니다!"
발끈한 오닉스는 더 이상 손짓을 보내지도 않았다. 오닉스는 그대로 식스를 향해 걸어왔다. 의혹 속에서 오닉스를 바라보던 식스는 오닉스가 막을 테면 막아보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식스는 성난 오닉스의 앞을 막는 것은 맨손으로 범고래의 돌진을 막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식스는 옆으로 비켜서고 말았다.
오닉스는 거리낌(일이나 행동 따위를 하는 데에 걸려서 방해가 됨)없는 태도로 식스의 옆을 지나쳐 자유호의 승강구 앞에 섰다. 그러나 오닉스는 승강구의 계단을 내려가지는 않았다. 식스와 자유호의 선원들은 그런 오닉스의 등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오닉스는 앞이 아니라 뒤로, 즉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 식스는 계단에서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귀에 너무나 익숙한 가벼운 발자국 소리. 식스는 승강구를 통해 올라선 남자를 향해 반가움을 담아 말했다. "키 선장님!"
키 드레이번은 서두르지 않는 걸음걸이로 갑판에 올라섰다. 비명이 요란하던 자유호의 갑판은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마치 키의 펄럭이는 외투 자락이 모든 공포와 소란을 삼켜버린 것처럼. 하지만 조금 떨어진 다른 배에서는 여전히 고함이 들려왔고 그래서 식스는 속으로 한탄했다. 저 선장들께서는 제 부하 간수도 못하시나. 삼엄한(무서우리만큼 질서가 바로 서고 엄숙하다)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키가 말했다.
"잠꼬대라면 너무 시끄럽고, 반란이라면 너무 멍청하군. 네놈들은 뭘 하고 있는 거지."
고요한 선원들 사이에서 오닉스가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조금 전 취했던 동작이 다시 반복되었다. 키는 오닉스의 마스크를 물끄러미(우두커니 한 곳만 바라보는 모양) 바라보다가 말했다.
"율리아나 공주를 죽이겠다고?"
<이 귀신 소리를 들어보라! 함대에 귀신이 붙었다. 바다는 여자를 싫어한다. 지금이라도 바다에 여자를 던져 해신께 사죄드려야 한다>에 해당하는 의미를 담아 오닉스는 빠르게 손짓했다.
"귀신이라고 했나?"
오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는 싱긋 웃고는, 오닉스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질문을 했다.
"귀신에 대해 알고 싶나?"
오닉스는 주춤했다. 그리고 주위의 해적들도 의아한 표정으로 키를 바라보았다. 키는 설명하는 대신 앞으로 걸어갔다. 오닉스는 키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재빨리 배틀 엑스를 두 손으로 쥐었다. 하지만 키는 맨손이었다. 게다가 두 손은 버클(허리띠 따위를 죄어 고정시키는 장치가 되어 있는 장식물)에 얹은 채 걸어왔다.
"응? 말해 봐. 귀신에 대해 알고 싶나? 귀신을 보고 싶나?"
어느새 키는 오닉스의 바로 앞까지 걸어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오닉스는 비무장인 키를 상대로 도끼를 들어올릴 수도 없었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마스크 때문에 오닉스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 아래에서 뿜어져나오는 다급한 숨소리는 오닉스의 긴장 상태를 잘 나타내고 있었다. 키는 오닉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 눈이 귀신을 보게 하고 싶은가? 죽음을 보고 싶나?"
퍼ㅡ억. 잔인한 소리와 함께 키의 주먹이 오닉스의 복부에 꽂히자 오닉스는 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키는 오닉스의 큼직한 턱을 붙잡아 천천히 끌어올렸다. 키는 오닉스의 얼굴을 자기 얼굴 바로 앞까지 끌고 와서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오닉스를 바라보았다.
"말해 봐라, 이 후레자식아. 귀신을 보고 싶나? 귀신을 보고 싶나? 내 눈을 봐!"
오닉스는 자신의 손에 도끼가 들려져 있다는 사실도 거의 잊어버렸다. 그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키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헛바람을 삼켰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키의 동공은 축소되어 있었다.
"나는 매일 귀신을 본다. 이 눈동자에 붙어 있기 때문에, 눈을 감아도 피할 수 없지. 내 눈을 봐라, 오닉스 나이트. 귀신이 보고 싶다고 했나? 내 눈을 봐라. 수천 마리의 귀신이 바글거리는 것이 보이지 않나? 봐라, 오닉스 나이트!"
오닉스는 키의 눈 속에서 귀신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키가 죽인 뱃사람들, 그가 침몰시킨 배, 화염이 불타오르는 돛대와 폭풍에 찢겨지는 돛, 포연과 피바람 속에 으르릉거리는 해골들의 군무. 오닉스는 키의 눈 속에서 그것들을 보았다. 그의 입이 힘없이 벌어졌다.
오닉스는 무의식중에 뒤로 물러나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키는 이미 오닉스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채 오닉스의 턱을 움켜쥐고 있던 자신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나씩 손가락들이 천천히 굽혀지고, 키는 손이 하얗게 변하도록 주먹을 감싸쥐었다. 키는 그 주먹을 옆으로 뿌리면서 말했다.
"일항사(1등 항해사)!"
"예!"
"라이온 선장에게 전해라. 레보스호의 화물실을 뒤져라. 노래를 부르고 있는 꽃이 있을 것이다."
"아아, 싱잉 플로라군요!"
"그렇다. 내게로 가져와라."
"오닉스 선장도 좀 덜 뻣뻣해질 때가 되었는데."
식스는 고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라이온은 콧방귀(코로 나오는 숨을 멈추었다가 갑자기 터트리면서 불어 내는 소리)를 뀔 뿐이었다.
"그 작자가요? 설마. 나는 저주가 무서워서 평생 말을 안하기로 맹세한 다음 그것을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타입의 녀석은 평생 바뀌지 않는 법이지요."
"하긴, 그렇지."
"게다가 그 흉물스러운 마스크 좀 보십시오. 아마 지금 그 마스크를 벗으면 녀석의 얼굴은 바닷물에 표백된 바다사자 뼈만큼이나 하얗겠지요. 놈이 얼마나 오랫동안 햇빛을 안 받았는지 짐작 가십니까? 그건 뭐 때문이더라. 아, 네 얼굴에 그림자가 없어질 때 너는 죽으리라는 예언 때문이라지요? 병신 자식." -오닉스에 대해 말로 설명
고개를 끄덕이던 식스는 라이온이 유달리 신경질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경질 그만 부리게. 나도 아까는 등골이 오싹했어."
라이온은 입을 다물었다. 라이온이 비명을 지른 것을 창피스러워하고 있다는 식스의 판단은 정확했던 모양이다. 라이온은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미신적인 성격과 완고함이 결합되면 키 드레이번 같은 사람도 감당할 수 없는 작자가 태어나는 법이란 말입니다. 놈은 끝까지 뻣뻣할 겁니다. 그러니까......"
"됐네, 좀 조용히 해보게!"
식스는 조금 거칠게 말했고 이번에는 라이온도 입을 다물었다. 라이온이 조용해지자 노랫소리가 보다 정확하게 들려왔다. 잠시 귀를 기울이던 식스는 여러 개의 문 중 하나를 가리켰고, 라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안쪽인 거 같군요."
문을 열려던 라이온은 그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특별 화물실이니만큼 당연한 일이다. 라이온은 어깨를 으쓱인 다음 칼을 뽑아 자물쇠를 내리치려고(내리치다:위에서 아래로 힘껏 치다. 내려치다:사람이 어떤 대상을 위에서 아래로 힘껏 때리거나 치다) 했다. 하지만 식스는 고개를 가로저은 다음 주머니 속에서 엘리엇 선장에게 뺏어둔 열쇠 꾸러미를 꺼내었다. 라이온은 조금 궁시렁거렸지만, 식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열쇠를 맞춰나가기 시작했다. 몇 번의 시도 후 식스는 올바른 열쇠를 찾아낸 다음 특별 화물실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두 사내는 기겁하며 귀를 틀어막았다.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가 느닷없이 크게 들려왔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흐느끼는 듯한 노랫소리와 달리 싱잉 플로라는 거의 비명을 지르듯이 노래했다. 식스와 라이온은 귀를 머릿속으로 집어넣을 듯이 꽉꽉 틀어막았지만 싱잉 플로라의 노래는 머릿속에서 울려나오는 듯 낮아지지 않았다. 라이온은 비틀거리는 식스의 어깨를 잡아끌며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쾅! 라이온은 문을 걷어차고는 통로의 벽에 기대어 헉헉거렸다. 식스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토할 거 같아."
"해적이 멀미하면 삼대가 망신입니다, 헉헉."
"뭐라고? 잘 안 들려."
식스는 귓속에서 울려나오는 이명(몸 밖에 음원이 없는데도 잡음이 들리는 병적인 상태)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표정이었다. 라이온 역시 머리가 띵할 정도로 아팠다. 그는 똑바로 서려 애쓰다가 고함을 내질렀다.
"1등 항해사님! 제발 비명 좀 그만 질러요! 머리가 울린단 말입니다."
"뭐? 어, 난 비명 안 질렀는데?"
라이온은 의아한 표정으로 식스를 보다가 혀를 내찼다. 비명이 아스라하게(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분명하지 않고 희미하다)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식스가 아니라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에 놀란 해적들이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라이온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햇다.
"오닉스가 또 발작을 일으키겠군. 젠장."
키 드레이번은 분노했다.
그는 빈손으로 돌아온 라이온과 식스를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시끄러워서 못 가져왔다는 설명에는 더욱 험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라이온은 심히 억울하다는 투로 키 드레이번을 보았지만 그가 말한 변명들은 키를 이해시키기는커녕 더욱 분노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러니까, 에, 그게 꼭 시끄러워서만은 아니지요. 에, 저는 포성 속에서도 잠을 잘 수 있단 말입니다. 어, 음. 그런데 그 비명이라는 것이, 흠흠. 참, 거 뭐랄까......"
"뭐?"
라이온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목 졸린 여자 같단 말입니다.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없어요."
키는 한참 동안 라이온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그 옆에 있던 식스에게 말했다.
"일항사. 율리아나 공주를 데려가."
"예?"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가르쳐줘야 하나! 여자는 싱잉 플로라의 소리를 못 듣는다. 그러니 율리아나 공주가 들고 오게 하란 말이다!"
식스와 라이온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선장실을 빠져나왔다. 선장실을 빠져나온 라이온은 으르릉거리며 눈에 들어오는 어떤 선원이라도 붙잡아 반드시 시비를 걸어ㅡ너 이 새끼, 왜 눈을 깜빡거리는 거야!ㅡ화풀이를 하려고 마음 먹었지만 율리아나 공주가 감금되어 있는 선실까지 걸어가는 동안 한 사람의 선원도 만나지 못했다. 라이온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허, 이놈들이 다 어디 처박혀 있는 거죠?"
"전부들 메인 마스트(돛대) 아래에 모여 앉아 벌벌 떨고 있을 걸세."
"젠장. 이번에 붙잡은 것은 너무 골치 아픈 재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싱잉 플로라가 있을 줄은 몰랐지."
"아니, 그것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식스는 라이온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라이온은 얼굴을 찌푸려 미간에 세로 주름을 만들고 있었다.
"일단, 여자가 있다는 것 때문에 오닉스가 발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듣자니 놈은 무기를 휴대하고 자유호에 올라왔다면서요? 그것도 두 번씩이나. 비록 낮엔 레보스호를 습격하기 위해서였고 밤엔 율리아나 공주가 목표이긴 했지만, 어쨌든 이곳은 키 드레이번의 배입니다. 얼렁뚱땅 넘어가긴 했어도 그건 예삿일이 아닙니다."
식스는 라이온의 표정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것이다. 라이온은 계속 말했다.
"그리고, 그 여자라는 것이 카밀카르의 공주고 필마온 기사단장의 아내가 될 여자입니다. 카밀카르의 해군이나 필마온의 갈가마귀들을 무서워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둘과 원한 관계를 만들었다는 것, 기분이 썩 좋지는 않군요."
"그만. 키 드레이번이 결정한 일이야. 그리고 바다의 신사가 원한을 두려워하나. 교수대에 걸려서도 껄껄 웃으며 죽는 것이......"
"제기랄, 여ㅡ론이라는 것이 있잖습니까, 여ㅡ론!"
라이온은 여론(사회 대중의 공통된 의견)이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는 것이 퍽 자랑스럽다는 듯이 그 단어를 길게 발음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식스는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라이온을 바라보았다. 라이온은 우쭐거리며 말했다.
"필마온은 신부를 뺏긴 얼간이 취급당할 겁니다. 여ㅡ론이 그렇게 될 거라고요. 놈들은 단순한 원한이 아니라 그런 여ㅡ론에 시달리게 되는 것에 더 화를 낼 겁니다. 카밀카르도 마찬가지지요. 자국의 공주를 빼앗긴 국민들의 여ㅡ론이 어떨지 생각해 보시라고요."
"그만해. 다 왔네. 공주가 듣겠어."
식스는 방문을 가리켜 보였고 라이온은 입을 다물었다. 식스는 방문의 열쇠를 연 다음, 퍼뜩 생각난 것처러 라이온을 바라보고는 근엄한 동작으로 방문을 노크했다. 라이온이 잠시 감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예절도 아슈? 그래서 <여론>이라는 단어를 말할 줄 아는 라이온과 신사의 예절에 밝은 식스는 퍽 자랑스러운 태도로 공주의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율리아나 공주의 방으로부터 식스의 난감해하는 고함 소리가 터져나왔다.
"고, 공주님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요?"
자유호와 해적 선단은 총체적인 공포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매끄러운 밤바다 위로 주름을 잡듯 가볍게 물결치는파도 이외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해원에서,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는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음산함을 더해 갔다. 레보스호의 선실에 갇혀 있던 라스 법무대신과 슈마허도 놀랄 정도의 노랫소리였다. 그들은 항해 동안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를 들어왔지만 이토록 기분 나쁜 노랫소리는 듣지 못했었다.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는 약간 슬프고, 동시에 약간 낯부끄러운 노랫소리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 밤바다를 새하얀 공포로 물들이고 있는 노랫소리는......
"고스트 송Ghost song이야."
라스 법무대신은 무의식중에 말했다.
"이건 고스트 송이라고."
슈마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불편한 몸을 간신히 일으키며 말했다.
"저는 싱잉 플로라가 고스트 송을 부른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로드 라스."
"서 슈마허. 저 꽃은 지금 낮의 전투에서 죽은 이들을 대신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걸세."
라스 법무대신은 자신의 말에 찬성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슈마허는 그런 라스를 미심쩍은(분명하지 못하여 마음이 놓이지 않다)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음산한 노랫소리가 갑자기 커지자 찔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자유호의 갑판에서는 키 드레이번이 끔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눈에 들어오는 모든 선원들을 사나운 시선으로 노려보았지만 선원들은 고개를 돌리거나 발끝을 바라보는 식으로 키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아무리 선장의 명령이라도, 저는 저 꽃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키는 그런 그들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증오했다. 함대 내에 있는 유일한 여자인 율리아나 공주조차도 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도대체 저 꽃을 어떻게 해야 되는 가. 키는 레보스호를 격침시키라는 명령을 내리고 싶어졌다.
오닉스는 심술궂은 표정을 지은 채 그런 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마스크 때문에 아무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오닉스는 캡스턴(배에서 닻 등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는 밧줄을 감는 실린더)에 기대어 앉아서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었으며, 불량스럽게 고개를 조금 기울인 상태였다. 그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라 있을 것인지는 뻔하다. 키는 낮게 말했다.
"한 놈도 없는가. 내 부하들 중에 나를 위해 저 꽃을 가져올 놈은 하나도 없단 말인가."
선원들은 모두 키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척했다. 고지식한 식스는 차마 그런 행동을 취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매우 송구스러워하는 표정으로 키를 바라봄으로써 키를 미치게 만들었다. 키는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가지."
"안 됩니다!"
식스는 비명처럼 외쳤다. 그는 키의 허리를 잡기라도 할 듯한 모습으로 말했다.
"안 됩니다, 선장님. 저 꽃에 가까이 가시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저는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어도 정신이 이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시고 그것을 만지시면, 오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기만 합니다."
"한 놈도 없잖은가!"
"아침까지, 아침까지만 기다려주십시오. 낮이 되면 노래를 멈출 겁니다. 그럼 그때 제가 직접 가져다 바치겠습니다."
"웃기지 마! 아침이 오면 아마도 난 혼은 악마의 꽃에 빼앗기고 육신만 남은 껍데기 유령들이 모는 배의 선장이 될 것이다. 그렇잖으면 그들의 선장을 위해 꽃 하나 가져다줄 수 없는 너희 덜떨어진 해적놈들이 모두 바다에 빠져들든가!"
"제가 가도 될까요?"
목소리는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키와 식스, 그리고 각자 다른 표정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라이온과 오닉스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갑판 해치 쪽이었다. 해치는 조금 열려 있었고 그 아래에서 사람의 머리처럼 보이는 것이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어두운 밤이라 해치 아래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키는 삼엄하게 말했다.
"누구냐, 노잡이인가? 올라와서 말해라!"
해치 아래에서 말하던 자는 머뭇거리며 갑판 위로 올라와서는 얌전히 무릎을 꿇었다. 그가 입을 떼기도 전에 라이온이 먼저 그를 알아보았다.
"아, 너. 오스발이라고 했지?"
무릎을 꿇고 있던 오스발은 고개를 조금 들었다.
"예. 그렇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그 꽃을 가져오겠습니다."
키 드레이번은 오스발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식스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말했다.
"일개 노잡이 노예 주제에...... 네가 할 수 있단 말이냐?"
오스발은 다시 송구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발음은 정확했으며 공포에 질려 있는 것처럼 들리는 부분은 없었다.
"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들도 낮의 전투 때문에 몹시 피곤합니다. 그런데 저 노래 때문에 친구들이 잠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예장님도 몹시 무서워하고 계시고요. 저는 낮에 노예장님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이 많은지라 어떻게든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까짓 꽃이 문제라면 저 같은 미천한 작자도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식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뭐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키가 먼저 말했다.
"너는 저 노래가 들리지 않느냐?"
오스발은 노스윈드가 직접 말을 걸어왔다는 것에 대해 크게 황송해하며 말했다.
"저, 이상합니다. 아주 가느다란 노래 비슷한 것이 들리기도 합니다만, 저런 작은 소리에 왜...... 아, 절대로 귀하신 분들을 욕보이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라이온은 눈을 껌뻑거리며 중얼거렸다. "저 녀석, 가는귀가 먹었나(작은 소리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귀가 조금 먹다)?" 하지만 아무도 라이온의 짐작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스발은 키나 식스의 말에는 또박또박 대답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온은 다시 한번 주위의 시선을 끌어들이려고 시도했다. "저 녀석, 여자인가 봐." 라이온은 기어코 주위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주위의 해적들이 그를 때려 죽일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키가 말했다.
"오스발이라고 했나? 좋다. 만일 네가 이 얼간이들을 대신해서 저 꽃을 가져온다면 평수부로 승격시켜 주겠다."
식스와 라이온, 오닉스, 그리고 갑판 이곳저곳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던 해적들은 키의 이런 파격적인 제안에 대해 각자의 방식으로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들은 일개 노예가 그들과 같은 신분이 된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까지도 느꼈지만, 키의 선언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시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도저히 싱잉 플로라에 다가갈 수 없으니까. 하지만 잠시 후 그들의 놀라움은 경악(소스라치게 깜짝 놀람'놀라움'으로 순화)으로 바뀌었다.
오스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양하겠습니다."
"뭐라고?"
키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고, 그 표정은 주위를 둘러선 해적들의 얼굴 대부분에 떠올라 있는 것과 같았다. 오스발은 키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고는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해적을 교수대에 매다는 나라는 많아도 노잡이 노예를 교수대에 매다는 나라는 없습니다. 저, 그러니 그런 끔찍한 승격은 바라지 않습니다."
키는 잠시 말을 잃은 채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식스와 라이온 역시 경악을 가누지 못한 채 굳어버렷다. 그래서 오스발의 발언에 대해 가장 먼저 실감 넘치는 반응을 보여준 것은 의외로 과묵한 오닉스였다.
오닉스는 발을 쾅 굴렀다. 그는 옆에 세워둔 도끼를 집어들고는 오스발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마스크 아래 오닉스의 눈이 붉게 타오르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의 눈에 확실히 보였다. 오닉스는 아무 말 없이ㅡ원래 말을 안하지만ㅡ도끼를 집어 올렸다. 키가 재빨리 손을 들었다.
"멈춰라, 오닉스!"
키의 목소리에 식스는 간신히 제정신으 되찾으며 외쳤다.
"저런 발칙한 놈이!"
그리고 라이온 역시 얼굴 근육의 대부분을 수축시킨 표정으로 말했다.
"저놈이 지금 우리를 놀린 거야?"
그리고 다른 해적들 역시 살벌한 표정을 지은 채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해적들이 내뱉은 말의 주된 내용은 감히 교수대가 어쩌니 한, 저 건방진 노예의 소화기관이나 순환기 계통의 구조를 감상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내장을 끄집어내 목을 졸라줘...... 어쩌고 하는 표현은 너무 온화하다는 이유로 배척되는 분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그러나 키는 아무 말 없이 오스발을, 정확하게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오스발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그럼,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조용히 잠자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야 내일도 노를 저을 수 있을 테니까요."
말을 마친 오스발은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키는 잔뜩 찌푸린 눈으로 오스발을 바라보았고 그 동안 해적들은 몹시 씨근거렸다(고르지 아니하고 거칠고 가쁘게 숨 쉬는 소리가 자꾸 나다. 또는 그렇게 하다). 키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일항사, 라이온 임시 선장. 저 노예를 데리고 가서 싱잉 플로라를 가져와라. 내 방에서 기다리겠다."
식스와 라이온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스발은 주춤거리며 일어섰고 키는 그런 오스발을 향해 말했다.
"네가 내일도 자유호의 노를 저을 수 있을지 두고보지. 만약 네가 싱잉 플로라를 내게 가져오지 못한다면 너는 다른 배의 노를 저어야 될 것이다."
지옥의 강을 건너기 위해, 라는 말은 생략되었지만. 대부분의 해적들과 오스발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오스발이 다시 고개를 숙인 사이에 키는 몸을 돌려 승강구로 내려갔다. 남겨진 오스발은 잠시 주저하는 눈으로 라이온을 바라보았다. 라이온은 <내가 너를 혼내주고 싶어한다는 것을 잘 알겠지?>라고 물어보는 듯한 눈으로 오스발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따라와."
해적들은 살벌한 시선으로 바라보며서도 길을 틔워주었고(막혀 있던 것을 치우고 통하게 하다의 피동사의 준말) 식스와 라이온, 그리고 오스발은 보트에 올라 레보스호로 향했다.
레보스호에 도달하여 특별 화물실까지 걸어가는 동안 식스와 라이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오스발은 그런 두 사람의 등 뒤를,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따라갔다. 라이온은 얼핏 고개를 돌려 오스발에게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한 걸음씩 데어놓을 때마다 점점 더 크게 들려오는 저 노랫소리가 진짜 드리지 않는지. 하지만 고개를 돌린 라이온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어두운 통로 속에 시커멓게 보이는 오스발의 얼굴뿐이었다. 최소한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스발은 태연한 자세와 예의 바르게 그들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저 녀석은 어떻게 된 녀석이지?>
라이온은 식스의 얼구을 훔쳐보았다. 랜턴을 들고 있기에 그의 얼굴은 잘 보였으며, 안타깝게도 근엄한 식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초조함으로 진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문득 라이온은 손을 들어 이마를 만져보았다. 자신의 이마를 만진 손에 느껴지는 축축함이 라이온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듣는 이의 뼈까지도 흐느끼게 만들 것 같은 노랫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세 사람은 다시 특별 화물실 앞에 섰다.
식스는 내키지 않는 동작으로 열쇠를 연 다음 라이온을 쳐다보았다.(얼굴을 들고 올려다보다) 그리고 라이온 역시 식스를 쳐다보았다. 어쨋든, 두 사람 모두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라이온은 약간 쉰 목소리로 오스발을 불렀다.
"오스발. 안에 들어가서 꽃을 들고 나와."
오스발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두 분은 안 들어가십니까? 식스는 갑자기 천장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라이온은 거칠게 말했다.
"꽃만 가지고 나와야 한다. 금붙이나 보석 따위를 삼킬 생각은 안하는 것이 좋을걸. 화물 목록이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난 제일 먼저 네 녀석의 뱃속부터 조사하겠다."
오스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노예에게 금붙이나 보석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스발은 싱긋 웃기까지 했다. 라이온은 그 여유 있는 웃음이 싫었지만 아무 말 없이 길을 틔워주었다. 두 사람 사이를 지나친 오스발은 식스가 열어둔 문을 느닷없이 열었다.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식스와 라이온은 모두 오스발을 쳐다보았고, 그래서 가까스로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오스발은 태연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오스발은 잠시 멈춰 서서 식스를 돌아보기까지 했다.
"저, 죄송합니다만 그 랜턴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안이 어둡군요."
입을 열기만 하면 비명이 터져나올 것 같았기에 식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오스발을 바라보기만 했다. 오스발이 다시 말하려 할 때 라이온이 잔뜩 쉰 목소리로 거칠게 외쳤다.
"빌어먹을 놈아, 네 녀석이 이 안에 불이라도 지르면 어쩌라고! 밖에서 불을 비춰줄 테니 어서 들어가!"
오스발은 어깨를 움츠리고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식스는 덜덜 떨리는 손을 힘들게 들어올려 방 안으로 불을 비춰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