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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소설/습작

갑각나비 1. 후기 -5


 간밤에 잠을 설친 것은 나뿐이 아니었으리라. 아침 식사 중에도 알드레는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고 나 역시 덩달아 흥분에 도취되었다. 점심시간은 아직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융단 한 장 한 장을, 창틀 하나 하나를 살피며 별장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내가 4번째로 내 방을 정리할 때쯤, 하녀로부터 레이즈 님이 방문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 응접실에서 알드레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응접실로 향했다. 그리고 응접실 문을 열자, 알드레와 담소를 즐기는 한 청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첫인상은 정말 너무나 평범한 남성이었다. 20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에, 호리호리하지만 균형 있는 몸매. 그다지 독특한 구석은 없는 여행자용 외투. 그 어느 것 하나 특별하다고 할만한게 그에게는 없었다. 어제의 이야기 때문에 조금 정도 특별한 구석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다시 한 번 그를 봤지만 전혀 아니었다. 슬쩍 바라본 그의 왼손도 평범 그 자체였다. 성스러움과 기적을 연상할만한 어떠한 표식도 거기에는 없었다.

 "엘버 님이십니까?"

 그가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레이즈라 합니다."

 내민 손은 오른손이었다. 나는 잠시 바보처럼 그 손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부활의 왼손은 악수도 왼손으로 해야하는 겁니까? 원하시면 왼손을 드리겠습니다만."

 알드레의 웃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의 손을 잡았다.

 "아, 아닙니다. 엘버 브리드라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악수를 나누며 느낀 그의 손길 역시 보통 사람의 그것이었다. 난 내가 레이즈란 인물에 대해 깊은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레이즈 님께서 지금 인팔레 왕에 대해 이야기해주시는 중이었네."

 레이즈의 등뒤에서 알드레가 말했다.

 "인팔레 왕? 그럼 인팔레 왕의 왼팔을 치료해 주셨다는 이야기는 사실입니까?"

 내 질문에 레이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꽤 오래 전의 일이었죠."

 마치 3주쯤 전에 옆집 사는 노인의 감기를 치료해줬다는 투의 목소리였다. 난 호기심에 휩싸여 물어봤다.

 "인팔레 왕은 정말 전설처럼 미남이었습니까?"

 "하하, 나도 지금 그걸 여쭤보던 참이었네."

 알드레 역시 나와 같은 수준이었던 모양이다. 레이즈는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즉각 대답했다.

 "네. 대단한 미남이셨죠. 당시 화가들이 그 분의 모습을 그려내려다 실패하고 붓을 꺾는 일이 허다할 정도였으니까요. 그 중에는 붓을 꺾다 실수로 손을 베여 저에게 직접 치료 받은 이도 있었습니다."

 그의 대답에 나와 알드레는 낮게 웃었다. 다음으로 알드레가 레이즈에게 물었다.

 "그럼 레비지스크 황제는 정말 잘 때도 몸에 50 자루의 단검을 지니고 있었습니까?"

 "정확히는 47개입니다. 제가 등창을 치료해 드릴 때 그걸 모두 치우느라 고생 좀 했지요. 특히 '그곳'에 있는 것은... 아, 그곳이 어딘지는 묻지 마시길 바랍니다. 입에 담기 조금 괴롭군요."

 우리는 이번에는 좀 크게 웃었다. 우리의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은 기적의 산 증인이 아니라 대륙 최고의 사기꾼일 터였다. 나는 다음 질문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럼 레이즈 님은..."

 그 때 레이즈가 말을 끊고 들어왔다.

 "아, 이 다음 질문은 식사를 하면서 받도록 하죠. 레비지스크 님의 이야기를 했더니 황실의 음식이 생각 나 참을 수가 없군요."

 또 한 번 우리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주방장이 솜씨를 발휘했는지 오늘의 점심 식사는 나조차도 놀랄 수준이었다. 레이즈는 그 점심 식사에 레비지스크 황제 치료 후에 먹었던 황실 음식에 비할만 하다는 평을 내려 주방장을 우쭐해지게 만들었다가, 300년 전 제국의 입맛과 현재의 입맛이 달라졌다는 점을 주방장에게 상기시켜 줌으로써 주방장을 순식간에 실망의 구렁텅이에 밀어버렸다. 물론 나와 알드레는 박장대소했지만.
 식사를 나누면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레이즈에게 던졌고 그 대답들로 미루어 몇 가지 사실을 알아 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백과 사전의 기록들(이름, 기억, 능력이 세습된다는 등의)은 상당부분이 맞는 이야기이며, 역시 거기에 쓰인 것처럼 그 세습 자격와 의식에 대해서는 일체 말할 수 없다 했다. 또, 그렇지만 자신의 치료 능력에 대한 이야기들은 시인들에 의해 과장된 부분이 많으며, 사실 자신은 심하지 않은 외상과 약간의 질병 치료 능력만 가지고 있다 했다.
 우리는 점심 식사를 끝낸 후 내 방으로 와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금 루비온 저택에 묵고 계신다 들었습니다만...?"

 나의 물음에 레이즈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지금은 그곳에서 식객 노릇을 하고 있죠."

 "치료를 위해서 가신 겁니까?"

 "네."

 "사실 저와 알드레도 며칠 전에 백작 저택을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아둔한 저희들은 저택에 아픈 사람이 있다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혹시 백작 부인이나 두 영양들께서 상처를 입으셨거나 병을 앓고 계신 겁니까?"

 내가 질문한 의도는 백작 부인과 두 딸의 안위에 대한 걱정보다는 단순한 호기심에 기인한 것이었다. 어쨌든 레이즈는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사실은 저도 아직 모릅니다."

 나보다 알드레가 먼저 의아하다는 목소리를 냈다.

 "모르신다고요?"

 "네... 제 느낌으로는 분명 그 댁에 '환자'가 있는 듯 해서 저택을 찾아뵌 것인데, 백작 부인께서는 저택에 그런 환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도 수 세기를 거쳐온 레이즈의 '느낌'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터라 양해를 구하고 며칠 간 신세를 지기로 한 것이죠."

 알드레는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럼 레이즈 님은 얼마나 더 저택에 머무르실 생각이십니까?"

 "글쎄요. '대륙의 귀빈'이니 일주일 정도는 더 만용을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요?"

 대륙의 귀빈이란 레이즈가 레비지스크 황제를 치료해 주고 부여받은 특권의 공식 명칭으로, 제국령 내의 모든 집들은 레이즈가 방문하게 되면 일주일 동안 귀빈으로 대접해야한다는 게 그 특권의 주요 골자였다. 즉 레이즈가 마음먹고 반년 정도만 투자하면 모든 제국 각료들 저택의 침대 시트와 음식 맛을 비교한 책을 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야말로 '특권'이었지만, 아직까지 이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은 레이즈(레이즈를 단수로 표현한다면) 한 명 뿐이었다. 그런 내용을 떠올린 나와 알드레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하하, 그러고 보니 레이즈 님은 대륙의 귀빈이셨죠."

 "원하신다면 이대로 일주일 정도 여기에 묵으셔도 괜찮습니다만..."

 내가 농담조로 말하자 레이즈도 가볍게 그 농담을 받았다.

 "제가 일주일 뒤에 백작 저택에서 쫓겨나면, 그 때 정식으로 부탁드리죠."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농담을 던질 요량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조금은 부럽군요. 아름다운 백작 가의 두 영양들과 같은 지붕 아래서 주무신다니..."

 내 짓궂은 말에 알드레의 얼굴은 조금 붉어졌지만 레이즈의 얼굴은 변함없이 웃는 얼굴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정말 그렇군요. 어찌되었건 그 저택에서는 현재 제가 유일한 남자이니까요."

 "네?"

 무심결에 입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와 버렸다. 알드레 역시 놀란 표정으로 레이즈에게 물었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레이즈 님?"

 "말 그대로입니다. 그 저택에 있는 분들은 모두 여성입니다. 정원사, 요리사, 하인, 집사 할 것 없이 전부 여성 분 들이요. 백작 부인의 말씀에 따르면 백작 님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일부로 남성을 집에 들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기억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잘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분명 집사는 훤칠한 키의 여자였고 오며가며 마주친 하인들 사이에서도 남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택에 남자가 한 명도 없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알드레도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랬군요... 저는 그저 남자 하인이 얼마 없다고 여기고 지나쳤는데... 저희를 바라보시던 백작 부인의 표정이 그리 밝지만은 않아 보이더니 그런 내막이 있었군요."

 "덕분에 어지간히 얼굴이 두꺼운 저로서도 식객으로 있는데 눈치가 보이더군요."

 레이즈의 말에 우리는 다시 웃음을 찾았다. 확실히 신기한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지금 눈앞에 있는 영원의 치료사보다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그 영원의 치료사는 우리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번에는 제가 질문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오랫동안 대답만 했더니 질문하는 법을 잊어버릴 것 같군요."

 우리가 그러시라고 말하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두 분 모두 작가 분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최근에는 어떤 글을 쓰고 계십니까?"

 나는 물론이거니와 알드레 역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글에 수치를 가진 작가만큼 추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없으니." 라고 레드루가 읊조렸던가? 나는 레이즈를 향해 멋쩍게 대답했다.

 "요즘에는 글은 쓰지 않고 그 대신 『신과 종달새』란 책을 번역하고 있습..."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던 나는 순간 입을 틀어막았다. 만약 아비드어로 된 마법서를 번역한다는 게 알려지면 무사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옆에서도 작지만 분명한 알드레의 탄식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난 어떻게든 얼버무려 보려 했지만 이미 레이즈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오... 『신과 종달새』를 번역하고 계십니까? 괜찮다면 좀 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알드레를 돌아봤다. 그는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낮은 한숨을 내쉰 후 느린 움직임으로 책상 서랍에 있던 종이 뭉치와 신과 종달새의 원본을 꺼냈다.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군요."

 그는 오랜지기라도 만난 표정을 지으며 닳아빠진 『신과 종달새』를 이리저리 훑어봤다. 그리고 그는 곧 책을 펼쳐 소설 읽듯 읽기 시작했다.

 "신은 위대한 딸꾹질쟁이다. 그 딸국질 소리는 크고 거룩해 보통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지만, 그걸 들을 수 있게된 인간들이 있으니 그것이 마법사이다. 마법사들은 그 소리를 흉내내려 하지만 그들의 힘만으로는 무리니, 여기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검은 종달새, 즉 악마들이다..."

 알드레는 이미 레이즈가 두 번째 문장까지 익은 시점에서 입을 다물 줄을 몰랐고 나는 세 번째 문장까지 들은 후에야 눈동자를 크게 뜨고 레이즈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알드레는 조심스레 책을 읽는 레이즈의 말을 끊고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크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면 내 두 귀가 크게 떨리고 있는 것이리라.

 "아비드어를... 할 줄 아십니까?"

 레이즈는 알드레의 질문에 별 감흥도 담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네, 그런데요?"



 나와 알드레는 체면 차릴 것도 없이 손님인 레이즈를 마구 부려먹기 시작했다. 즉석에서 『신과 종달새』의 번역을 도와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그는 흔쾌히 승낙했고 우린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아비드어에 대한 레이즈의 기억은 상당한 도움이 되었고, 덕분에 우리는 레이즈의 끝을 알 수 없는 이야기의 샘물을 간간이 마시면서도 지난 일주일간 한 것과 거의 같은 분량의 번역을 수 시간만에 해낼 수 있었다.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우리는 펜에서 손을 놓고 기지개를 켠 후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를 하면서 나는 정중히 레이즈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레이즈 님. 손님을 이렇게 혹사시키는 주인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레이즈는 두 손을 내밀어 부인했다.

 "아닙니다.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미래를 예측하고 기대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지만, 과거를 돌아보고 추억하는 것은 그 이상으로 가슴 떨리는 일이니까요."

내 편협한 지식으로는 분명한 출처를 알 수 없었지만, 저 구절 역시 어느 서사시나 소설의 한 구절일 것이었다. 그는 마치 온 몸에 지혜와 재치의 향수를 뿌린 듯 했다. 그가 말을 하거나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 향기가 풍겨 나와 우리의 코를 기분 좋게 마비시켜 가고 있었다.

 "저... 혹시 레이즈 님은 에프스도 만나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알드레가 조심스럽게 물었고 나 역시 대답을 기대하며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레이즈는 아쉽게도 고개를 가로 저었다.

 "유감스럽게도 연이 닿지 않아서... 하지만 그 제자분은 한 번 뵌 적이 있지요."

 "제자라면?"

 "에프스베스 님이라고 아십니까?"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나는 다시금 놀라고 말았다.

 "『꼬부라진 돼지 꼬리』를 쓰기 전의 그 분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죠. 예술이며 문학이며 모르는 게 없었습니다. 살아있는 백과사전이란 그 분을 위한 단어였죠."

 나와 알드레는 또 다시 저녁식사 내내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나눴던 에프스베스에 대한 이야기는 논란의 여지가 있기에 적지 않겠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레이즈가 백작 저택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자 우리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여러 미사여구를 덧붙여가며 나의 벅찬 심경을 표현하려 했지만 무리였다. 그저 손을 잡고 격한 악수를 나눌 뿐이었다. 그리고 알드레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말을 뱉어내지 못하고 그와 악수만 나누었다. 꼭 다시 한 번 만나기로 약속한 우리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가슴의 고동이 벅차게 타오르는 걸 느꼈다. 부활의 왼손이라 해서 신의 기적을 말하는 딱딱한 신관의 모습을 연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마치 부드럽고 달콤한 차를 마시고 난 듯, 입안 전체에 감미로운 감각이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어째서인지 내 머리 속에 전혀 당시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레드루의 시구가 문득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웃으며 넘어갔지만, 어쩌면 그것은 내 본능이 느낀 어떤 예감 같은 것이었을 지도 몰랐다.

 "악마가 씁쓸해서 악마인가. 설탕이 지나쳐서 악마일지니."(이런게 맘에 들어. 앞에서 쓴 문장을 다시 쓸수 있는 상황이 나타나며 암시적이라니)



 그 날 이후 나흘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번역의 항해는 레이즈라는 순풍을 만난 이후 끝없는 쾌속 전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레이즈가 적어준 어휘와 예문들의 양은 상당한 것으로 우리는 한결 손쉽게 번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혹시라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등장하면 우린 곧바로 그 구절을 적어 하녀에게 백작 저택의 레이즈 님께 전하라 명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친절하게 활용법에 예문까지 적혀있는 쪽지가 하녀를 통해 보내져 왔다. 번역을 하다 휴식을 취할 때면 우린 어김없이 레이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방대한 지식과 풍부한 경험에 대한 예찬은 아무리 나눠도 닳지 않는 화제였다.
 그 날, 레이즈를 만난 지 5일째가 되던 그 날 점심 식사 때 역시 우리는 레이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레이즈 님께 그걸 여쭤보지 못했군."

 알드레가 아쉬운 듯 말했다. 나는 샐러드를 목구멍으로 넘긴 후 입을 열었다.

 "뭐를?"

 "레드루를 만나 뵌 적이 있냐고 말이야."

 "하하, 과연... 시의 별, 레드루에 대한 이야기를 못 해봤군. 다음 번 하녀를 보낼 때 슬쩍 여쭤볼까?"

 "그게 좋겠군."

 하지만, 우리는 끝내 레이즈에게 레드루에 대해 물어보지 못한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알드레는 혼자서 산책을 하고 싶다 말했다. 나는 이번에는 레드루를 데려와 보라고 농을 쳤고 알드레는 노력해 보겠다, 고 말하며 산책을 나섰다. 그 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낮잠을 청했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참으로 오랜만에 『이 세계의 지배자』를 손에 들고 읽어 내려 가기 시작했다.
 주인공 식인 소녀는 여전히 끔찍한 여행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 밤에는 어두운 숲 속에서 잠을 잤으며, 낮 동안에는 지나가는 여행객을 노리기 위해 풀숲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보이면 재빨리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고 그 이후 갈비살과 내장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식사가 끝나면 그녀는 다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길을 따라 여행을 계속했다. 일직선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분명 북쪽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북쪽에는 또 다른 주인공인 중년 작가가 머무는 마을이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바람이 상쾌한 어느 오후, 산책을 나온 중년 작가는 수풀 속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두 개의 검은 빛을 발견하게 된다...
 책도 이제 거의 종반이었다. 책갈피를 그곳에 끼워 넣고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보니 벌써 저녁때가 다되어 있었다. 하녀에게 알드레의 귀환 여부를 물어보자 하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정말 레드루를 만난 것인가." 따위의 농담이 머리 속을 지배한 건 겨우 몇 초 정도였다. 나는 곧바로 하인들에게 알드레를 찾아보라고 명했다. 그리고 곧이어 한 하인이 숨이 턱에 찬 모습으로 나에게 보고해왔다.
 나는 하인을 재촉해 그곳으로 향했다. 허름한 농가의 앞에서 마을 사람들로 보이는 몇몇이 서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나는 그들을 밀치고 농가로 들어갔다. 침대 곁에 앉아있는 한 노인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돌아봤고, 원래 그 농부의 침대라 여겨지는 싸구려 침대에는 눈에 익은 청년 한 명이 고통스런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알드레였다.



 알드레를 습격한 것은 노인이 기르던 커다란 개였다. 쥐를 잡는다던가 도둑을 쫓는 등의 기특한 일을 해낼 재주도 없는 늙은 개였지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애교는 많아 홀로 사는 노인이 식구 삼아 기른 것 같았다. 노인의 말에 따르면 요 며칠간 그 온순한 개가 갑자기 불안한 듯 짖어대고 안정을 취하지 못했다한다. 사람들만 보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기에 노인조차 개에게 다가갈 수 없었고 그러던 것이 드디어 그날 산책 중이던 알드레를 본 순간 갑자기 폭발해 그에게 덤벼들었다는 것이다. 노인이 비명 소리와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놀라 나와봤을 때는 이미 알드레가 습격을 당한 뒤였다 한다. 노인은 서둘러 개를 알드레로부터 떨어트려 놓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윽고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몽둥이로 개를 흠씬 두들겨서 넝마로 만든 후에야 개는 알드레에게서 떨어졌다.
 이미 마을 의사가 응급 처치를 끝마친 상태였다. 몸 여기저기의 자잘한 상처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왼팔이었다. 개는 자신의 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알드레의 왼팔을 물고 늘어졌다 한다. 의사는 열악한 도구와 약재로 성의를 다해 치료했지만, 절단 외에는 방법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알드레는 왼팔을 잃고 말았다.
 의사는 환자를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다 했지만 그렇다고 허름한 농가에서 알드레를 재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하인들을 시켜 조심스럽게 알드레를 별장으로 옮겨왔다. 그를 옮기는 도중 알드레의 '왼팔이 있던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알드레를 그의 방 침대에 눕힌 후, 나는 그의 머리맡에 앉았다. 알드레는 아직도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악몽을 꾸는 듯 신음을 내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땀을 닦아주며 계속 말을 걸었다. 신음 소리는 작아서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들리는 것은 '루틴'이라는 이름이었다. 알드레가 존경한다는 왼손잡이 작가. 알드레는 그를 동경해서 왼손으로 글을 쓰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눈물을 흘렸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사항이 있다. 당시에 경황이 없어서 몰랐지만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알드레를 습격했던 그 개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그 때의 그 사건과 관련이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또 온순하던 개가 갑자기 흉포하게 변한 것이 레이즈와 관련이 있는지 역시 확실치 않다. 하지만 이 글을 쓰기로 했을 때, 미심쩍어 보이는 것은 모조리 적기로 마음먹었기에 일단 기록으로 남겨둔다.
 그 개는 왼쪽 앞다리를 절고 있었다한다.



 알드레가 의식을 회복한 것은 다음 날 점심 때였다.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던 나에게,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을 한 잔 부탁해도 될까, 엘버?"

 물 한 잔을 천천히 들이킨 후 알드레는 자신의 왼팔을 봤다.

 "...없어졌네."

 그는 웃으며 남은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뭐라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지만 내가 답을 내기도 전에 알드레가 먼저 말했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나는 올라오는 감정을 삼키려 애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 말을 해야하는데 입을 열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계속 시켜서 미안한데 먹을 걸 좀 갖다주지 않겠나? 배가 좀 고픈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에 나서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차라리 알드레가 내 앞에서 오열했다면 나는 침착하게 그를 다독여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알드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야 나는 음식을 알드레에게 가져갈 수 있었다. 알드레는 한쪽 팔로만 있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은 듯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자꾸 음식을 침대 시트 위에 흘렸다. 알드레는 그저 웃으며 미안하다고 했지만 그의 그 웃음은 내 심장을 사정없이 할퀴어 댔다. 알드레가 식사를 끝낸 후 나는 직접 빈 그릇들을 쟁반에 담아 주방으로 들고 갔다. 그리고 나서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별안간 별장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누구인지 확인만 하고 돌려보낼 생각으로 나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 성스러운 번개가 내 머리 위로 떨어진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불쑥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레이즈였다.



 기적이 곁에 있음에도 인간은 알아채질 못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나는 그 말뜻을 그 때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모든 상처를 치료한다는 기적의 치료사가 걸어서 몇 분이면 갈 수 있는 곳에 묵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감격에 찬 목소리로 레이즈를 알드레가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레이즈... 님?"

 침대에 누워있던 알드레는 갑작스런 레이즈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한 얼굴을 지었다. 레이즈는 그런 그에게 편안한 미소를 보였다.

 "사고를 당하셨다는 이야기를 오늘에서야 듣게 되었습니다. 늦게 찾아뵌 것을 용서하십시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레이즈 님. 이렇게 몸소 오실 필요는 없는데..."

 "별 말씀을. 그럼 잠시 실례를 해도 되겠습니까?"

 레이즈는 알드레에게 다가가 천천히 그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있었다. 그는 위아래로 그의 상처를 훑어본 후 시선을 알드레의 왼쪽으로 돌렸다.

 "왼팔을 잃으셨군요."

 마치 선언이라도 하는 듯한 어조로 레이즈가 말했다. 알드레는 그저 씁쓸한 웃음으로 거기에 답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레이즈는 드디어 그의 '부활의 왼손'을 펼쳤다. 그리고 알드레의 몸 여기저기의 상처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것은 놀라운 광경이었다. 레이즈의 왼손이 상처를 스칠 때마다 얼룩이 벗겨져 나가듯 알드레의 상처들이 점점 사그라져 가고 있었다. 거기서 알드레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어떠한 빛이나 소리도 나질 않았다. 그저 만질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알드레의 모든 상처가 사라져 버렸다. 단 하나, 잃어버린 왼팔을 제외하고는.

 "다 됐습니다."

 레이즈가 말하자 알드레는 고맙다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 깊숙한 곳의 씁쓸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나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나섰다.

 "저, 레이즈 님. 실례지만."

 "엘버."

 내가 뭔가 말하려 하자 알드레가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나의 친구를 바라봤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레이즈가 아무리 놀라운 치료사라 해도 결국 치료사일 뿐이다. 이미 없어진 팔다리를 다시 만들어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 때, 레이즈가 입을 열었다.

 "치료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그 목소리는 지금까지와 사뭇 다른, 뭔가가 담긴 목소리였다.

 "왼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만."



 레이즈는 알드레와 단 둘이 이야기해야 한다며 나에게 자리를 피해달라 부탁했다. 나는 튀어나오려는 호기심과 심장을 억누르고 방밖으로 나왔다.
 왼팔에 대한 이야기라면, 레이즈는 정말 왼팔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식당으로 향한 뒤 하녀에게 홍차를 타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나름대로 열정을 다해서 차를 탄 것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차의 뜨거움만이 입술을 적시고 있었다. 두 잔 째의 찻잔을 비운 후 나는 하녀에게 고맙다고 한 마디 건넨 후 알드레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 앞에 레이즈가 서있었다.

 "오셨군요."

 그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알드레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섰다. 나는 약간 실망했다. 알드레는 여전히 왼팔이 없는 그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드레가 다음 말을 하고 나서 나의 심장이 다시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레이즈 님께서 왼팔을 치료해 주신다고 하시는군."

 그는 작게 미소짓고 있었지만 나는 터질 듯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인가? 정말로?"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의 남겨진 오른손을 잡았다.

 "축하하네, 이 친구야! 정말로 축하하네!"

 나는 그의 오른손을 잡고 격렬히 흔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 뒤에서 레이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알드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꽤 오래 걸릴 지도 모르니 나가 있게나."

 나는 알았다고 말한 뒤 그의 손을 놓고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기 전 레이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레이즈 님.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할지..."

 내 말에 레이즈는 표정 없이 말했다.

 "감사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솟아오르는 게 있으면 가라앉는 것도 있게 마련이니까요."(raise :  떠올리게 하다.)

 무슨 뜻이냐고 물어볼 찰나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나올 때까지 누구도 방에 들여보내지 마십시오."

 조금 건조해진 그의 어조가 신경쓰였지만 그런 것은 이미 내 안중에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알드레의 웃는 얼굴을 확인한 후 방을 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점심떄가 지나고 저녁때가 다 되어서도 방문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굳건히 닫혀 있었다. 나는 복도를 서성이며 서둘러 레이즈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하녀 한 명이 다가와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렸고 나는 의아해하며 현관으로 가봤다. 거기에 있는 것은 놀랍게도 루비온 가의 둘째 딸, 티밀리아 루비온이었다.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티밀리아는 곧장 레이즈가 치료를 하고 있냐고 물어왔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레이즈가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당부했기에 밖에서 기다리는 중이라고 덧붙이자 그녀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 그녀도 그 나이 또래의 여자들이 가지는 주체못할 호기심을 가지고 이곳으로 찾아온 듯 했다. 어쨌뜬 그녀는 알드레의 상태와 사건 전위를 나에게 물었고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대로 모두 대답해 줬다. 마침 혼자서 서성거리는 것도 질린 참에 좋은 심심풀이인 셈이었다.

 "와... 그럼 그 개가 알드레 님의 왼팔을 물고 늘어진 거네요?"

 그녀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것 같더군요."

 "그것 참 아파겠다... 팔이 너덜너덜 해졌을 거야, 분명."

 나는 그녀의 말투가 너무 불손하다고 생각했지만 필경 나이 탓일 거라 여기고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레이즈 님이 잘린 팔도 다시 만들어 주신대요?"

 "네."

 "와아... 역시 레이즈 님은 대단하세요. 어떻게 잘려나간 팔을 원래대로 만들 수 있는 걸까요?"

 내게서 대답을 구할 수 없음을 알고도 그녀는 물어왔다. 나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녀는 아쉽다는 듯 입술을 내밀다 문득 뭔가가 생각났는지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참. 레이즈 님이 저한테 선물도 주셨어요. 제가 마음에 든다고 하시면서."

 "선물이요?"

 "네, 여기다 뒀는데... 어? 어디 있지?"

 그녀는 자신의 옷 여기저기를 손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남자인 내가 보기에 낯뜨거운 곳도 있어서 나는 고개를 도려 딴청을 피웠다. 그녀는 얼마간 자기 몸을 뒤지다 포기한 듯 말했다.

 "아... 아무래도 놓고 왔나봐요. 나도 정말 바보 같다니까..."

 "대체 어떤 선물인데 그러시죠?"

 "아, 네. 그러니까요..."

 그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와 티밀리아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레이즈가 있었다. 그 때 레이즈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지금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는 말했다.

 "끝났습니다."

 그 때 나는 문장의 주어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게 바보 같은 짓이라 생각하고 즉시 방으로 달려들어갔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 왜 그 문장의 주어를 물어보지 않았는지 후회가 된다. 그것은 치료가 끝났다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알드레!"

 나는 알드레의 이름을 부르며 방으로 들어섰다.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알드레의 모습이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평화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 드셨습니다."

 뒤에서 레이즈가 말했다.

 "아마 내일 아침까지는 일어나지 않으실 겁니다."

 레이즈의 말이 끝나자 나는 침대에 다가갔다. 이불이 알드레의 어깨에 걸쳐 덮여 있었기에 확인하기 어려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었다.
 거기에 있었다. 왼팔이.
굳이 묘사하지 않아도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 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레이즈 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레이즈의 손을 잡고 환희의 악수를 나눴다. 레이즈는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 그저 저의 할 일을 행했을 뿐입니다."

 나는 레이즈의 권유대로 알드레를 푹 쉬게 하기 위해 방을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레이즈와 티미리아가 백작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행했다. 그것은 은인이었던 레이즈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에게 조용히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였다.

 "저... 레이즈 님."

 밤길을 걸으며 눈치를 살피던 나는 드디어 결심하고 그를 불렀다. 레이즈는 무슨 일이냐는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시죠?"

 "저... 이런 질문이 실례되는 질문인 줄은 알지만... 알드레의... 그 왼팔에 관한 건데..."

 "네."

 "정말... 그전처럼 움직일 수 있는 건가요?"

 내 질문에 앞서가던 티밀리아 역시 호기심 찬 표정으로 레이즈의 대답을 주목했다. 레이즈는 예상했다는 듯 망설임 없이 말했다.

 "기에르 루틴을 아십니까?"

 며칠 전 알드레가 나에게 했던 질문과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어조와 알드레의 어조 사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질감이 있었다. 그것은 비단 상황에 따른 이질감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대답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만..."

 왼손잡이 작가, 기에르 루틴.

 "그도 사고로 왼손을 잃었었지요. 하지만 제가 만들어 드렸습니다."

 그가 어떤 말로 나를 위로하려 했어도 불안의 앙금이 약간은 가라앉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던진 그 말에 나는 내 마음 속의 불안이 모조리 용해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 세계의 지배자』의 수려한 필체는 결코 왼손을 제대로 못 다루는 사람의 글씨가 아니었다. 나는 진심으로 우러난 감탄의 신음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티밀리아가 나섰다.

 "정말 신기해요. 어떻게 잘려나간 팔다리를 새로 만드실 수 있는 거죠?"

 티밀리아의 질문에 레이즈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설령 레이즈라 해도 잘려나간 신체 부위를 복구하는 것은 무리지요."

 "네? 하지만 알드레 님은..."

 "단 하나, 예외가 있습니다."

 "예외요?"

 레이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왼팔만은, 왼팔만은 잘려나간 경우 새로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에? 왜 하필 왼팔만 그런 게 가능한 거죠?"

 나 역시 대답을 궁금해하며 귀를 기울였다.

 "글쎄요..."

 레이즈는 잠시 생각하다 이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부활의 '왼손'이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그 대답에 나와 티밀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약간 납득하기는 어려웠지만 애초에 부활의 왼손 존재 자체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장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다시 티밀리아가 입을 열었다.

 "참. 그러고 보니 저희 집 지하에서 기르는 개도 왼쪽 다리 하나가 없는데..."

 "호오, 그렇습니까?"

 "아주 영리한 개예요. 사람 말도 잘 알아듣고, 책을 읽어주면 좋아해요."

 "무척 영특한 개인가 보군요."

 "하지만 어머니는 싫어해요. 막 때리고 괴롭혀요. 불쌍하게..."

 "저런... 그럼 어디 제가 한 번 살펴보도록 하죠."

 "정말이요? 와아!"

 그녀는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것이었지만 그녀는 나이에 비해 정신 연령이 어린 듯 했다. 하긴 그게 그녀의 매력이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나는 그들과 백작 저택까지 같이 간 후 홀로 밤길을 걸어 별장으로 돌아갔다. 이제 가을도 완연한지 꽤나 날씨가 쌀쌀했다. 나는 잠들어 있는 알드레의 얼굴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내 방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머리맡에서 그의 상태를 지켜보고 싶었지만, 레이즈가 내가 옆에 있는 것보다 혼자 잠들게 하는 게 좋을 거라 말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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