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악마의 밤
높다란 가지에 걸터앉은 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던 오스발은 나무 아래를 향해 말했다.
"골디란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테리얼레이드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거기가 이 근처에서는 가장 가까운 도시일 겁니다. 원래 키 선장님의 계획도 그러했다고 하더군요. 공주님. 따라서 지금 가장 급한 것은 골디란 강을 찾는 것인데......"
"내 생각은 달라요, 오스발.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내 뱃속으로부터 울려퍼지는 본능의 외침에 응답하는 거라고요."
율리아나는 나무 아래에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보기 퍽 안쓰러운 모습이었지만 오스발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많이 시장하시죠? 그러길래 아침에 권해드렸을 때 드시지 그러셨습니까."
율리아나는 진저리를 쳤다. 그날 아침 오스발은 근처의 개울물에서 건져온 개구리알을 두 손바닥 가득히 담아서 그녀에게 권했다. 율리아나는 절대적인 거부 자세를 취했고 오스발이 그것을 먹는 모습조차도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눈앞에 개구리알이 나타난다면 또다시 거절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오스발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공주님의 본능에 부응할 수 있을 거 같군요."
잠시 후, 율리아나는 오스발이 나무 위의 구멍에서 발견하여 가지고 내려온 찌르레기 알을 보고서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이 간신히 굶어죽지 않은 것은 시절이 봄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새들의 산란기였기에 새알을 구하기 쉬웠고 햇나물과 버섯, 새순(새로 돋아나는 순) 등도 풍부했다. 율리아나는 예전의 그녀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을 태연하게 먹어치우는 자신을 가리켜 <환경 친화적 인간형>이라고 불렀고 오스발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저와 함꼐 카밀카르로 가요. 아바마마는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줄 거예요."
주린 배를 끌어안고 잠드는 밤, 공주는 배고픔을 잊기 위해 말했다. 오스발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하늘을 보다가 말했다.
"원하는 것...... 지금 당장은 두툼한 외투 한 벌만 있으면 좋겠군요. 몸을 씻고 옷을 입고 따스한 식사 한 끼만 한다면 세상이 끝장나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카밀카르의 공주 가격으로는 너무 싼 거 같지 않나요?"
오스발은 고개를 내려 율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나는 웃으며 애쓰며 말했다.
"아바마마는 저를 필마온에 보내서 남해의 제해권(평시나 전시를 막론하고 무력으로 바다를 지배하여 군사, 통상, 항해 따위에 관하여 해상에서 가지는 권력)을 획득하려고 했다고요. 대륙 최고의 보화와 상품이 오가는 남해 말이에요. 필마온 기사단과 카밀카르가 손을 잡으면 키 드레이번도 횡포를 부리기 어렵겠지요. 그렇잖아요?"
오스발은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공주를 바라보다가 그녀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럼, 키 선장님은 라오코네스에게 바칠 제물로서뿐만 아니라 카밀카르와 필마온의 제휴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에서도 당신을 죽였어야 되는 것이군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남해를 장악할 수 있는 세력이 탄생하면 키 선장님께는 껄끄러운 일이 될테니까."
"어, 예. 그런 의도도 분명히 있었을 거라고 봐요. 똑똑한 사람이죠?"
오스발은 아무 말 없이 율리아나 공주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대드래곤의 먹잇감으로 던져주려 했던 살마을 가리켜 똑똑하다고 말하는 저 모습은...... 오스발은 싱긋 웃었다. 저건 솔직한 것이다. 대범해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오스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군요. 아무래도 자유호로 돌아가기는 어렵게 되었군요."
"예? 돌아가다니?"
"당신을 테리얼레이드에 모셔드리고 나서 자유호로 돌아갈까 했습니다. 물론 선장님이 불같이 화를 내기는 하겠지만 어떻게 사죄드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그런데 공주님의 탈주는 제 예상보다도 훨씬 더 키 선장님을 화나게 만드는 것이었군요."
율리아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오스발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왜 돌아가고 싶은데요?"
"당신은 왜 카밀카르로 돌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곳은 내 고향이고 내 집이니까요."
"비슷합니다. 자유호는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노를 젓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노예잖아요!"
오스발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주제에 대해 꽤나 여러 번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노예면 어떻단 말입니까? 저는 죽도록 노를 저어야 되는 노예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야 되는 공주 중 누가 더 자유로운지 말할 수가...... 죄송합니다."
어느새 소리 없이 흐느끼는 율리아나를 바라보며 오스발은 난처한(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 처신하기 곤란하다) 기분을 느꼈다. 게다가 공주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기에 모습이 더욱 해괴했다.
"그건, 그건 책임이라고요. 와, 와, 왕족으로 태어났으니, 났으니 져야 하는 채, 채, 책임이니까, 그러니까."
"알겠습니다. 그만하세요. 눈에서 물 샙니다."
율리아나는 웃음을 터트렸고, 울다가 웃는 그녀를 보며 오스발은 망측스러운(이치에 맞지 아니하여 어이가 없거나 차마 보기가 어려운 데가 있다) 기분을 느껴야 했다.
"다만, 제게도 책임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해주시겠습니까?"
"예?"
"그 책임이라는 말씀, 근사하게 들리는군요. 가장은 가족에게 책임이 있고, 법황은 신도들에게 책임이 있고, 왕족은 국민에게 책임이 있죠. 그러면 저도 자유호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어, 하지만."
"바꿔 말할까요? 그러죠, 뭐. 가장은 가족의 노예고 법황은 신도의 노예고 왕족은 국민의 노예라고 해두죠. 그러면 저도 자유호의 노예라고 하겠습니다."
율리아나는 눈물이 그렁한 눈을 커다랗게 떠서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스발은 이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열심히 일해서 밥을 먹으며 생활을 영위하는 자유인과 열심히 노를 저어서 숙식을 제공받는 노잡이 노예의 차이를 모르겠습니다. 형이상학적인 반대급부(어떤 일에 대응하여 얻게 되는 이익)와 형이하학적인 반대급부의 차이일까요? 글쎄요.그 반대급부를 얻기 위해 제공하는 것이 둘 모두 노동으로 똑같잖습니까. 그럼 반대급부도 똑같은 것이어야 하겠죠. 둘 다 노예 아닐까요."
"그건 너무 극단적이에요. 모두가 노예라니."
율리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오스발은 그저 웃었을 뿐이었다.
"공주님은 애서가라고 들었습니다. 노예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인권이 없는 인간이죠."
"인권은 뭐죠."
"인격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권리죠."
"인격은 뭐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사람만의 고유하고 보편적인 성격이죠."
"어떤 것이 사람다운 것입니까. 아니,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대답하기 곤혹스러운 질문이겠군요. 공주님이 아시는 분 중에 가장 사람다운 사람을 한 명만 말씀해 보세요. 그럼 받아들이지요."
율리아나가 아무 대답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오스발은 피식 웃어야 했다. 게다가 그 대답이라는 것이 걸작이었다. 율리아나는 입술을 조금 내밀었다가 퉁명스럽게 말했던 것이다.
"오스발."
"관두지요. 빨리 주무세요."
태곳적부터 지금껏 밤이 소리를 낸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소리를 내는 밤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 시인들의 표현처럼, 밤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을 자정 무렵,
오스발은 눈을 떴다.
어두운 숲속에서 들려올 리가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스발은 어둠 속을 주시했다. 그때 조금 전 그를 깨웠던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오스발은 이 음향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고, 그래서 겁에 질렸다.
그것은 칼, 혹은 그에 준하는 무기들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오스발은 공주를 끌어안으며 생각했다. 뭘까. 산적이 여행객이라도 덮치는 것일까? 그렇다면 곤란하다. 두 명이 걸치고 있는 옷가지를 다 합쳐도 다섯손가락을 채우기 힘든 비참한 몰골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산적들의 구미를 끌어당길 만한 것이 있었다. 오스발은 자신의 품속에 지쳐 쓰러져 있는 율리아나를 내려다보았지만, 어둠 속인지라 그 아름다운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오스발은 율리아나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공주는 즉각 대답했다.
"저도 듣고 있어요. 그리고 무서워 죽을 지경이에요."
"잠귀가 밝으시군요. 나무를 탈 수 있겠습니까?"
"필요하다면 잊혀진 탑이라도 오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인걸요. 올라갈까요?"
오스발은 그들이 기대고 잠들었던 나무 위로 공주를 올려주었다. 헐떡거리며 나무 위로 올라간 율리아나는 아래로 손을 내밀었지만 오스발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
"그대로 있으십시오. 저는 어미 물떼새가 되겠습니다."
거의 속삭이는 어조였지만 율리아나는 오스발의 말을 알아듣고는 숨소리를 낮췄다. 만약 들키게 될 경우 오스발이 상대를 유인하겠다는 말이다. 율리아나는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오스발은 몸을 낮체 낮추며 덤불 속에 몸을 숨겼다. 오스발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더욱 겁을 집어먹은 율리아나는 나무를 꽉 끌어안았다.
율리아나는 사람처럼 생긴 나무껍질이라고 착각될 만큼 나무를 꽉 끌어안은 채 심심파적(심심풀이) 삼아 읽었던 소설들을 모조리 되새겨보았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소설들에서는 대개 악당들이 <그 위에 숨어 있는 것 다 알고 있다!> 등의 대사를 외치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리아나는 죽도록 겁에 질린 채 아스라히(아스라하다: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분명하지 않고 희미하다) 들려오는 칼 소리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칼 소리 이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공주의 머릿속으로 소설 수십 권이 파라라락 움직였고, 공주는 칼싸움을 벌이고 잇는 자들이 상당한 <고수>라고 제멋대로 생각했다. 고수는 쓸데없는 기합이나 함성을 지르지 않으니까....... 바로 그 순간 무시무시한 고함이 울려퍼졌다.
"으아아악!"
율리아나는 머릿속으로 불이 번쩍하는 것을 느꼈다. 나무를 와락 끌어안다가 단단한 옹이에 이마를 부딪힌 것이다. 가까스로 기절하지 않은 율리아나는 불쌍하게도 이마를 문지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었다.
잠시 후 몇 개의 고함이 더 들려왔다. 모두 비참한 비명이었다. 누가 죽은 것일까? 잠시 후 율리아나는 더 이상 칼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싸움이 끝난 것일까. 공주는 몇 번이나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은 얻지 못해 욕구 불만에 빠진 채로 한참 더 기다렸지만 들려오는 것은 가벼운 밤바람 소리였다. 공주는 조심스럽게 나무 아래를 향해 말했다.
"오스발......?"
대답은 없었다. 당연하지. 나도 들리지 않을 정도인걸. 하지만 율리아나는 큰 소리를 낼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율리아나는 울먹거리며 다시 낮게 속삭였다.
"오스바알?"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공주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나무 아래로 내려갈 자신도, 더 큰 소리를 낼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율리아나는 그대로 나무를 끌어안은 채 죽어도 내려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율리아나는 아침이 다가올 때까지라도 나무 위에 있겠지만 다행히도 잠시 후 오스발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려오십시오, 공주님."
물론 율리아나는 내려가지 않았다. 어쩌면 그 칼잡이들 중 누군가가 오스발의 목소리를 흉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걱정 때문이다. 하지만 오스발은 덤불 속에서 몸을 드러내어 어렴풋하게나마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공주는 허벅지가 다 까질 만큼 빠른 속도로 나무 아래로 내려와서는 비틀거리며 그를 향해 달려갔다. 그에게 와락 안기며 율리아나는 다급하게 질문했다.
"갔어요? 괜찮은 거예요?" 세상은 주님의 가호 아래 제대로 돌아가고 있어요? 내일 아침 메뉴는 뭐죠? 마지막 것은 그냥 한번 넣어본 질문이에요."
오스발은 대답을 잠시 보류한 채 싱긋 웃어야 했다.
"예. 굉장한 행운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들키지 않은 거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율리아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오스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율리아나의 손목을 잡고 조심스럽게 숲속으로 걸어갔다. 더럭 겁을 집어먹은 율리아나는 <드디어 이 노예가 산적들에게 나를 팔아넘기려고 하는구나> 등의 생각을 하면서도 무력한 모습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조금 후 율리아나는 더 무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숲 저편으로부터 구역질나는 지독한 냄새가 흘러왔다. 피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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