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소설/습작

갑각나비 9. 연애 -1

하얀s 2010. 11. 22. 22:12

 

 나는 한 때 싸구려 도색서적을 써가며 생계를 유지했다. 실존하는 유명 귀족부인들의 이름을 약간씩 변형시킨 뒤, 그녀들로 하여금 여러 음란한 연애행위를 자행하게 만들었다. 그 시절 나는 나를 둘러싼 운명을 저주했고,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지 않으며 원하는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갈망했다.
 세월이 흐르고 어느 정도 살림이 안정되자, 나는 내가 쓰고 싶어했던 글들을 쓰려했다. 하지만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그 때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가 그 이유를 알아낸 것은 몇 년 뒤, 한 기괴한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한 직후였다.

                                                                   쟈크 페드로, 『어느 엉터리 번역가의 고백』중에서




 (역자 주(註): 이 이야기는 당대의 사학자였던 에이퍼 멤피스의 기록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다. 젊은 시절, 반란진압의 영웅으로 알려져 있던 루자 펜블렌의 과거를 조사하고 있던 에이퍼는, 펠 정신 치료원에서 카이츠 바슈랭 후작과 만나 루자의 과거와 관련된 믿을 수 없는 ‘세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에이퍼는 후작에게 들은 그 ‘세 가지 이야기’를 모두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또한 죽기 직전에는 아들을 불러 ‘루자에 관련된 기록을 모두 소각할 것’과, ‘절대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지 말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에이퍼의 아들인, 존 멤피스는 아버지의 유언을 절반만 수행했다. 존은 루자의 기록을 읽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그것을 소각했다. 그리고 그 기록을 나름의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해 소설로 구성한 뒤 출판해 버렸다. 그렇게 해서 나온 얇은 책이 『로반트의 식도락가』이다. 『로반트의 식도락가』는 출판되자마자 엄청난 사회적 파급을 불러일으켰고, 곧바로 불온서적으로 지정되어 모조리 불에 태워졌다. 존 멤피스는 재판을 받는 것까지는 면했으나, 엄청난 벌금을 지불하고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로반트의 식도락가』의 원본은 이렇게 모두 소각되었지만 몇 년 뒤 비슷한 내용과 등장인물의 모방작들, 이를테면 『식도락가들과 기괴한 요리들』이라든가 『살색 포도주』같은 이름의 책들이, 범람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들도 대부분 연기가 되어 사라졌지만, 몇몇은 운좋게 살아남아 현대까지도 세계각지에 다섯 권 정도가 남아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자는 그 책들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서너 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옛 비평가들의 서평으로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로반트의 식도락가』의 모방작 중 하나인 1172년 판 『살색 포도주』가, 익명의 투고자에 의해 나에게 보내졌다. 나는 며칠 밤을 베게대신 책과 함께 보내며, 세심하게 내용을 검토했다. 원본이 아닌 모작인 이유에서인지, 곳곳에 조악한 문체와 거친 비유들이 눈에 띄었다. 또한 내용 역시 대체역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수없이 드러났다.
 나는 문학사에 조예가 깊은 전문가들을 만나 『살색 포도주』의 진위여부에 대해 상담했다. 그들의 의견은 하나 같이 회의적이었다. 1172년에는 쓰이지 않았던 종이와 잉크가 사용되었다는 것과, 당시의 연대기나 소설작품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구성을 근거로 한 의견이었다. 내가 손에 넣은 『살색 포도주』는 위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책이 거짓말의 묶음이라는 것을 안 뒤에도, 나는 독서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렇게 번역본을 내놓기로 마음먹기에 이르렀다. 물론 내가 번역을 한다고 해도, 이 작품을 출판해줄 출판사는 한 군데도 없을 것이다. 읽어줄 사람도 없는 작품을 번역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나로서도 알 도리가 없다. 다만 단언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만약 이 작품이 위작이 아닌 진품이었다면, 나는 번역에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다.
 서두가 지나치게 길어져 버렸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둘 말이 있다. 아마도 존재할 리 없겠지만, 이 글을 읽게 될 독자들이 만약 생긴다면, 명심하길 바란다. 이 이야기는 거짓말로 가득 차 있다. 부디 믿지 말기를 바란다. 믿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