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래사장 위에 흰색의 뭔가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하얀 것을 향해 다가갔다. 그 하얀 것은, 놀랍게도, 흰옷을 입은 소녀였다. 소녀는 기절해 있었는데, 흠뻑 젖은 몸에서 짠 바닷물냄새가 풍겨 올라왔다. 아무래도 조난자인 모양이었다. 나는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가 응급처치를 취했다. 소녀의 가슴을 압박하고 등을 몇 차례 두드리자, 그녀의 입에서 한 모금의 바닷물이 기침과 함께 터져 나왔다.
'정신이 드십니까?'
내가 묻자 소녀는 잠시 멍한 눈을 짓다가 이내 입을 열어 몇 마디를 힘겹게 내뱉었다. 그녀의 말은 북부 도시국가의 언어와, 서쪽 섬 지방의 사투리가 군데군데 섞여 있어서 상당히 혼란스러웠지만, 어느 정도 뜻을 읽어낼 수는 있었다.
'여기는 어디인가? 순례자들의 도시인가? 그렇지 않으면 지옥인가?'
순례자들의 도시란 단어를 접한 순간, 소녀가 제국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순례자들의 도시란 메레교의 기원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라네메레 종파에서, 이상향을 지칭할 때 쓰는 단어였다. 하지만 현재 아라네메레는 이단으로 분류되고 있어서 제국 내에서는 순례자들의 도시란 단어를 쓰는 신자는 한 명도 없었다. 나도 종교서책을 읽던 중 스치듯 접해본 것이 전부였다.
'어느 쪽도 아닙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는 아직 메레의 부름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내 말에 소녀는 기뻐하기는커녕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시구를 읊었다.
'내 업보가 잠기기에는 이 바다는 너무나 얕구나.'
들어본 적이 있는 구절이었다. 분명 레드루의 『시간바다의 죄수선』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나는 재빨리 대구(對句)를 읊었다.
'그러나 나의 희망이 가라앉기에는 충분히 깊구나.'
소녀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로라와 닮았다.
'레드루의 『시간바다의 죄수선』을 읽어본 모양이로군, 젊은이... 내 이름은 엔쥬라고 하네. 본래의 이름은 그보다 훨씬 길지만 일단 그렇게 불러주게나.'
그 나이 또래의 소녀들과는 사뭇 다른, 고압적이면서도 고풍스러운 말투였다. 그 때문인지 나는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로 대답했다.
'제 이름은 퀴에르... 퀴에르 밀가스트라고 합니다.
소녀는 대꾸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말 대신 격한 기침을 내뱉은 뒤 다시 정신을 잃어버렸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저택으로 돌아가 사람을 불러올 수도 있었지만 그 때까지 이 소녀를 홀로 차가운 백사장에 놔둬야만 했다. 여동생과 닮은 이 소녀를...
나는 그녀를 들춰 업었다."
퀴에르의 저택은 해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밀가스트 가문은 과거 해군을 이끌고 레비지스크 황제를 도와 제국의 건립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레비지스크 황제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해안에 접해있는 이 사키마 지방을 영지로 하사했고, 이후 몇 백년간 사키마는 밀가스트 집안의 지배하에 있었다.
퀴에르의 부모는 몇 년 전 영지시찰을 하던 중, 마차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말들이 뭔가에 놀란 듯 날뛰었다는 게 목격자들의 증언이었다. 그 말들은 하나 같이 순하기로 소문이나있던 녀석들이었다. 대체 그 말들이 무엇을 보고 흥분한 것일까? 대답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그로 인해 퀴에르 밀가스트가 밀가스트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아직 18살이었다. 주위에서는 그의 어린 나이를 걱정하며 섭정을 들일 것을 권유했지만 퀴에르는 거절했다. 그리고 십대의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완을 보이며 가문을 이끌어나갔다. 그는 지식과 인덕을 두루 갖춘, 가장 완벽한 영주였다.
다만 그에게 유일한 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지나친 냉정함이었다. 그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았으며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어떤 기쁜 일이 일어나도 함부로 미소짓지 않았고, 어떤 불운이 닥쳐도 실망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란 것은 없었다. 아니, 한 가지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여동생 로라 밀가스트였다.
처음부터 퀴에르가 여동생을 아낀 것은 아니었다. 퀴에르에게 있어서는 가족 역시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부모와도 사무적이고, 합당한 예의를 갖춘 대화만을 지루하게 주고받았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로라는 달랐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퀴에르를 따랐다. 이 작은 천사는 틈만 나면 오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어리광을 부렸다. 처음에는 그것을 귀찮게 여기던 퀴에르도 차츰 변해갔다. 낮에는 그녀의 놀이에 동참했고 밤에는 그녀의 머리맡에서 동화를 읽어줬다. 그럴 때마다 로라는 오빠에게 투명한 미소를 지어줬다. 그것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퀴에르가 부모를 잃고 어린 나이에 당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로라의 역할이 컸다. 그녀는 불안감에 휩싸여있는 퀴에르를 다독이며, 웃어줬다. 만일 퀴에르가 가문을 몰락시켜버린다면, 그는 이제 그녀의 웃음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것은 당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잃는 것이었다. 퀴에르는 당주의 자리를 받아들였고, 필사적으로 가문을 운영해나갔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여동생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엔쥬라는 소녀를 등에 업은 채, 나는 잠시 옛 기억을 떠올렸다. 어렸을 때 유난히도 울음이 많았던 로라를 업고 달래던 일이 생각났다. 로라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도 나에게 업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의사는 전염의 위험이 있으므로 그녀와 접촉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충고했다. 나는 더듬거리는 말투로 여동생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로라는 조금 지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어째서 그 때 그녀를 업어주지 않았나? 그녀를 아낀다고 했던 것은 거짓말이었나?'
마음속의 뭔가가 나에게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느 작자가 그랬듯, '남겨진 자는 후회할 뿐'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사이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한 손으로 그녀의 몸을 받친 채 다른 한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인 마로우가 문을 열고 인사를 올리려 했다. 하지만 내 등에 한 소녀가 업혀있는 것을 보고는 흠칫 놀라 인사하는 것도 잊은 채 말했다.
'주인님... 이건 대체?'
'조난자인 모양일세, 마로우. 어서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준비해 주게나. 이 아가씨는 내가 객실로 옮길 테니.'
'주인님께서 수고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내 말 듣지 못했나? 서두르게!'
내가 호통을 치자 마로우는 고개를 숙인 뒤 빠른 걸음으로 2층에 향했다. 나는 등뒤의 소녀를 고쳐 업고 객실로 향했다. 그녀를 침대에 눕힐 즈음 마로우와 하녀 한 명이 다급한 걸음으로 옷가지와 수건을 가져왔다.
'이 아가씨 분께 맞을만한 옷이 없어서... 이것을 가져왔습니다만.'
마로우의 손에 들린 옷은 로라의 것이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하녀에게 옷을 갈아 입히라고 명한 뒤 방에서 나왔다. 잠시 문 앞을 서성이고 있자 하녀가 나왔다. 그녀가 뭐라고 보고하기도 전에 나는 객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맛봤다. 침대 위에 잠들어있는 것은 그야말로 로라였다. 나는 하녀와 집사에게 물러나라고 명한 뒤, 그녀의 침대 곁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누군가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눈을 뜨고 나를 흔드는 손의 주인을 향해 머리를 들었다.
'겨우 일어난 모양이로군.'
그녀였다. 엔쥬라는 이름의 여동생과 닮은 소녀.
'더 자게 내버려두고 싶었지만, 호흡이 약간 곤라해져서 말이야.'
꿈속에 잠겨 있던 사고가 급속히 현실로 돌아왔다. 이제 보니 내 머리가 그녀의 배 위에 올려져 있었다. 나는 황급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그만...'
내 사과에 그녀는 고개를 저어 보인 후 말했다.
'그것보다, 일어난 김에 몇 가지 대답해줄 수 있겠나? 여기는 대체 어딘가?'
'여기는 제 저택입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기절하시는 바람에 심중을 여쭙지도 못한 채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런가? 미안하게 되었군.'
그녀의 말을 마지막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좀처럼 목구멍 밖으로 넘어오지 못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엔쥬였다.
'묻지 않는군.'
나는 당황한 시선으로 엔쥬를 바라봤다. 엔쥬는 계속 말했다.
'내가 어째서 해변에 쓰러져 있었는지, 내가 대체 누구인지, 그리고 손윗사람인 그대에게 왜 거리낌없이 무례한 말투를 쓰는지... 묻지 않는군.'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녀의 정체가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일므은 아까도 말했다시피, 엔쥬라네. 본명은 로바나 엔쥴로스라고 하지. 그대는 레드루의 시들을 읽은 듯 하니 이 이름의 뜻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물론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은 레드루의 연작시집 『49마리』에 등장하는 괴물들중 한 마리를 일컫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49마리』라는 작품은 어지간한 수집광들도 이름을 알지 못하는 희귀한 책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책은 메레교단에서 가장 완벽하게 말소시킨 금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 수년 전, 쟈크 페드로라는 무명 번역가가 그 아비드어(語)서적을 번역해 출판했다. 물론 그 번역서 역시 금서로 낙인찍혀 불살라졌지만, 나는 거금을 들여 그 책을 어렵사리 손에 넣었다. 레드루의 시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여동생을 위해서였다.
'로바나 엔쥴로스라면... 이 세계의 지배자?'
'알고 있는가보군. 내가 살던 나라에서는 왕에게 로바나 엔쥴로스란 이름을 붙이곤 했지. 하지만 친한 이들은 나를 엔쥬라고 불렀네. 나도 그 쪽이 마음에 들고 말이야.'
'그 나라는 대체 어느 나라입니까? 게다가 왕이라니, 아가씨는 대체...'
내가 물으려하자 엔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 이상은 묻지 말아주게, 젊은이.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니까... 내가 그대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내가 로바나 엔쥴로스라는 것과, 나에게는 더 이상 돌아갈 나라가 없다는 것, 두 가지뿐이라네.'
엔쥬, 자칭 로바나 엔쥴로스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녀의 정체를 억지로 캐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자신의 신상을 자세히 들려줬다. 밀가스트 가문의 내력과 자신의 성장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결국에는 여동생에 관한 이야기까지 입에 올리고 말았다.
'유감이로군.'
로라의 죽음에 대해, 엔쥬는 짧지만 꾸미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후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엔쥬가 담담한 목소리로 놀랑누 말을 했다.
'그런데 동생의 기일이 11우러 15일이라고 했나? 그것 참 기묘한 우연이로군... 그 날은 내 생일이기도 한데 말이야.'"
"그 날의 대화는 엔쥬의 갑작스런 발목통증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나는 서둘러 주치의를 부른 뒤 그녀의 발목을 진찰하게 했다. 주치의는 낮은 목소리로, 발목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녀는 더 이상 걷지 못한다고 말했다. 엔쥬는 '조난사고로 발목을 다친 모양이로군.'이라고 한 마디 했을 뿐 그리 낙심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침울해진 것은 내 쪽이었다. 나는 엔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 뒤, 내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웠지만, 밤새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지난 며칠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객실의 엔쥬를 만나러 갔다. 엔쥬는 여전히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지만, 그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입을 열었다. 주된 화제는 시나 소설을 비롯한 문학작품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이름에 어울리게, 이야기를 좋아하는 듯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 저택에는 그녀의 이야기에 대한 욕구를 채우고도 남을만한 서책이 있었다. 대대로 독서광이 많았던 우리 밀가스트 가문이었기에 저택의 서재에는 대륙 내에서도 손꼽힐만한 양의 도서들이 구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독서를 게을리 하는 편이었는데, 엔쥬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서둘러 읽어두는 게 좋을 거야, 백작. 책이란 것은 참을성이 없어서 그대를 오래 기다려주지 않을 걸세.'
이후 나는 그 충고에 따라, 일부러 짬을 내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주로 객실에서 책을 읽었는데, 그때는 엔쥬 역시 침대에 앉은 채로 독서를 했다. 책을 읽다가 지루해지면 종이에서 눈을 들어 엔쥬를 바라봤다. 그녀는 독서를 하면서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로라도 가지고 있떤 버릇이었다. 이외에도 엔쥬와 로라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물론 위압적인 말투나 무표정한 얼굴은 전혀 닮지 않았찌만, 말버릇이나 좋아하는 음식 등의 사소한 것들이 무서울 정도로 흡사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내 착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비록 착각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 사소한 우연의 중복이 즐거웠다.
어느 날인가 엔쥬가 조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나 신세를 지기만 하는군, 백작. 내 발목만 성했더라면 당장이라도 떠날 텐데...'
그 말에 나는 펄쩍 뛰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엔쥬 님? 신세라니요. 제 집에 계셔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부디 오래도록 머물러 주십시오.'
'그대의 동정심에 몸을 기대야만 살아갈 수 있다니... 나란 것도 참으로 보잘것없군.'
'동정심 따위가 아닙니다!'
'그럼 뭔가?'
그녀가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던 엔쥬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장난이 지나쳤군. 식객 주제에 그대의 친절을 모욕하려 했네. 부디 용서해주게나.'
그리고는 살며시 웃어 보였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던, 그때의 그 미소였다.
날이 거듭될수록 내가 객실에 머무는 시간은 늘어만 갔다."
"주인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며칠 뒤, 객실에 가져갈 책을 고르고 있던 퀴에르에게, 집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퀴에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손님을 초대한 기억은 없는데? 나는 지금 바쁘니 다음에 찾아오시라고 전하게."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제게는 그 방문객께 거절의 말씀을 드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방문객의 이름을 말했다. 퀴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뭐라고?"라고 한마디 뱉고 말았다. 그는 책을 도로 책꽂이에 꽂은 뒤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로 향했다.
"그가 어째서 내 저택에 온단 말인가?"
"저로서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주인님."
주인의 뒤를 따르며 마로우는 한층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퀴에르는 응접실 문을 열기 전에 잠시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뒤 문을 열었다.
응접실에는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먼저 퀴에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였다. 눈이 가느다란 그 남자는 단정하면서 유행에 뒤지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고급향수를 썼는지 그의 주위에는 야릇한 향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남자의 뒤에는 날카로운 눈매의 여자가 서있었다. 키가 훤칠한 여자였는데, 퀴에르는 그녀의 생김새나 복장보다 그녀의 허리에 차여있는 칼에 눈길이 갔다. 이제 겨우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저런 장검을 쓰는 건가? 퀴에르는 소리 없이 물었지만 여자는 퀴에르에게 시선 한 번 옮기지 않았다.
"저 이름 높은 밀가스트 가문의 당주이시자, 이 지방 최고의 서재를 보유하고 계시다는 퀴에르 밀가스트 백작이십니까?"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연락도 없이 저택에 방문을 청하게 된 점,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껏 멋을 부린 인사였다. 퀴에르는 간결하게 답했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이렇게 누추한 곳에 찾아주시니 저희 가문이야말로 영광입니다, 클리드 공작."
'정신이 드십니까?'
내가 묻자 소녀는 잠시 멍한 눈을 짓다가 이내 입을 열어 몇 마디를 힘겹게 내뱉었다. 그녀의 말은 북부 도시국가의 언어와, 서쪽 섬 지방의 사투리가 군데군데 섞여 있어서 상당히 혼란스러웠지만, 어느 정도 뜻을 읽어낼 수는 있었다.
'여기는 어디인가? 순례자들의 도시인가? 그렇지 않으면 지옥인가?'
순례자들의 도시란 단어를 접한 순간, 소녀가 제국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순례자들의 도시란 메레교의 기원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라네메레 종파에서, 이상향을 지칭할 때 쓰는 단어였다. 하지만 현재 아라네메레는 이단으로 분류되고 있어서 제국 내에서는 순례자들의 도시란 단어를 쓰는 신자는 한 명도 없었다. 나도 종교서책을 읽던 중 스치듯 접해본 것이 전부였다.
'어느 쪽도 아닙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는 아직 메레의 부름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내 말에 소녀는 기뻐하기는커녕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시구를 읊었다.
'내 업보가 잠기기에는 이 바다는 너무나 얕구나.'
들어본 적이 있는 구절이었다. 분명 레드루의 『시간바다의 죄수선』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나는 재빨리 대구(對句)를 읊었다.
'그러나 나의 희망이 가라앉기에는 충분히 깊구나.'
소녀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로라와 닮았다.
'레드루의 『시간바다의 죄수선』을 읽어본 모양이로군, 젊은이... 내 이름은 엔쥬라고 하네. 본래의 이름은 그보다 훨씬 길지만 일단 그렇게 불러주게나.'
그 나이 또래의 소녀들과는 사뭇 다른, 고압적이면서도 고풍스러운 말투였다. 그 때문인지 나는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로 대답했다.
'제 이름은 퀴에르... 퀴에르 밀가스트라고 합니다.
소녀는 대꾸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말 대신 격한 기침을 내뱉은 뒤 다시 정신을 잃어버렸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저택으로 돌아가 사람을 불러올 수도 있었지만 그 때까지 이 소녀를 홀로 차가운 백사장에 놔둬야만 했다. 여동생과 닮은 이 소녀를...
나는 그녀를 들춰 업었다."
퀴에르의 저택은 해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밀가스트 가문은 과거 해군을 이끌고 레비지스크 황제를 도와 제국의 건립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레비지스크 황제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해안에 접해있는 이 사키마 지방을 영지로 하사했고, 이후 몇 백년간 사키마는 밀가스트 집안의 지배하에 있었다.
퀴에르의 부모는 몇 년 전 영지시찰을 하던 중, 마차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말들이 뭔가에 놀란 듯 날뛰었다는 게 목격자들의 증언이었다. 그 말들은 하나 같이 순하기로 소문이나있던 녀석들이었다. 대체 그 말들이 무엇을 보고 흥분한 것일까? 대답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그로 인해 퀴에르 밀가스트가 밀가스트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아직 18살이었다. 주위에서는 그의 어린 나이를 걱정하며 섭정을 들일 것을 권유했지만 퀴에르는 거절했다. 그리고 십대의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완을 보이며 가문을 이끌어나갔다. 그는 지식과 인덕을 두루 갖춘, 가장 완벽한 영주였다.
다만 그에게 유일한 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지나친 냉정함이었다. 그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았으며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어떤 기쁜 일이 일어나도 함부로 미소짓지 않았고, 어떤 불운이 닥쳐도 실망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란 것은 없었다. 아니, 한 가지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여동생 로라 밀가스트였다.
처음부터 퀴에르가 여동생을 아낀 것은 아니었다. 퀴에르에게 있어서는 가족 역시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부모와도 사무적이고, 합당한 예의를 갖춘 대화만을 지루하게 주고받았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로라는 달랐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퀴에르를 따랐다. 이 작은 천사는 틈만 나면 오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어리광을 부렸다. 처음에는 그것을 귀찮게 여기던 퀴에르도 차츰 변해갔다. 낮에는 그녀의 놀이에 동참했고 밤에는 그녀의 머리맡에서 동화를 읽어줬다. 그럴 때마다 로라는 오빠에게 투명한 미소를 지어줬다. 그것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퀴에르가 부모를 잃고 어린 나이에 당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로라의 역할이 컸다. 그녀는 불안감에 휩싸여있는 퀴에르를 다독이며, 웃어줬다. 만일 퀴에르가 가문을 몰락시켜버린다면, 그는 이제 그녀의 웃음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것은 당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잃는 것이었다. 퀴에르는 당주의 자리를 받아들였고, 필사적으로 가문을 운영해나갔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여동생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엔쥬라는 소녀를 등에 업은 채, 나는 잠시 옛 기억을 떠올렸다. 어렸을 때 유난히도 울음이 많았던 로라를 업고 달래던 일이 생각났다. 로라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도 나에게 업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의사는 전염의 위험이 있으므로 그녀와 접촉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충고했다. 나는 더듬거리는 말투로 여동생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로라는 조금 지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어째서 그 때 그녀를 업어주지 않았나? 그녀를 아낀다고 했던 것은 거짓말이었나?'
마음속의 뭔가가 나에게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느 작자가 그랬듯, '남겨진 자는 후회할 뿐'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사이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한 손으로 그녀의 몸을 받친 채 다른 한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인 마로우가 문을 열고 인사를 올리려 했다. 하지만 내 등에 한 소녀가 업혀있는 것을 보고는 흠칫 놀라 인사하는 것도 잊은 채 말했다.
'주인님... 이건 대체?'
'조난자인 모양일세, 마로우. 어서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준비해 주게나. 이 아가씨는 내가 객실로 옮길 테니.'
'주인님께서 수고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내 말 듣지 못했나? 서두르게!'
내가 호통을 치자 마로우는 고개를 숙인 뒤 빠른 걸음으로 2층에 향했다. 나는 등뒤의 소녀를 고쳐 업고 객실로 향했다. 그녀를 침대에 눕힐 즈음 마로우와 하녀 한 명이 다급한 걸음으로 옷가지와 수건을 가져왔다.
'이 아가씨 분께 맞을만한 옷이 없어서... 이것을 가져왔습니다만.'
마로우의 손에 들린 옷은 로라의 것이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하녀에게 옷을 갈아 입히라고 명한 뒤 방에서 나왔다. 잠시 문 앞을 서성이고 있자 하녀가 나왔다. 그녀가 뭐라고 보고하기도 전에 나는 객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맛봤다. 침대 위에 잠들어있는 것은 그야말로 로라였다. 나는 하녀와 집사에게 물러나라고 명한 뒤, 그녀의 침대 곁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누군가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눈을 뜨고 나를 흔드는 손의 주인을 향해 머리를 들었다.
'겨우 일어난 모양이로군.'
그녀였다. 엔쥬라는 이름의 여동생과 닮은 소녀.
'더 자게 내버려두고 싶었지만, 호흡이 약간 곤라해져서 말이야.'
꿈속에 잠겨 있던 사고가 급속히 현실로 돌아왔다. 이제 보니 내 머리가 그녀의 배 위에 올려져 있었다. 나는 황급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그만...'
내 사과에 그녀는 고개를 저어 보인 후 말했다.
'그것보다, 일어난 김에 몇 가지 대답해줄 수 있겠나? 여기는 대체 어딘가?'
'여기는 제 저택입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기절하시는 바람에 심중을 여쭙지도 못한 채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런가? 미안하게 되었군.'
그녀의 말을 마지막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좀처럼 목구멍 밖으로 넘어오지 못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엔쥬였다.
'묻지 않는군.'
나는 당황한 시선으로 엔쥬를 바라봤다. 엔쥬는 계속 말했다.
'내가 어째서 해변에 쓰러져 있었는지, 내가 대체 누구인지, 그리고 손윗사람인 그대에게 왜 거리낌없이 무례한 말투를 쓰는지... 묻지 않는군.'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녀의 정체가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일므은 아까도 말했다시피, 엔쥬라네. 본명은 로바나 엔쥴로스라고 하지. 그대는 레드루의 시들을 읽은 듯 하니 이 이름의 뜻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물론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은 레드루의 연작시집 『49마리』에 등장하는 괴물들중 한 마리를 일컫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49마리』라는 작품은 어지간한 수집광들도 이름을 알지 못하는 희귀한 책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책은 메레교단에서 가장 완벽하게 말소시킨 금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 수년 전, 쟈크 페드로라는 무명 번역가가 그 아비드어(語)서적을 번역해 출판했다. 물론 그 번역서 역시 금서로 낙인찍혀 불살라졌지만, 나는 거금을 들여 그 책을 어렵사리 손에 넣었다. 레드루의 시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여동생을 위해서였다.
'로바나 엔쥴로스라면... 이 세계의 지배자?'
'알고 있는가보군. 내가 살던 나라에서는 왕에게 로바나 엔쥴로스란 이름을 붙이곤 했지. 하지만 친한 이들은 나를 엔쥬라고 불렀네. 나도 그 쪽이 마음에 들고 말이야.'
'그 나라는 대체 어느 나라입니까? 게다가 왕이라니, 아가씨는 대체...'
내가 물으려하자 엔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 이상은 묻지 말아주게, 젊은이.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니까... 내가 그대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내가 로바나 엔쥴로스라는 것과, 나에게는 더 이상 돌아갈 나라가 없다는 것, 두 가지뿐이라네.'
엔쥬, 자칭 로바나 엔쥴로스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녀의 정체를 억지로 캐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자신의 신상을 자세히 들려줬다. 밀가스트 가문의 내력과 자신의 성장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결국에는 여동생에 관한 이야기까지 입에 올리고 말았다.
'유감이로군.'
로라의 죽음에 대해, 엔쥬는 짧지만 꾸미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후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엔쥬가 담담한 목소리로 놀랑누 말을 했다.
'그런데 동생의 기일이 11우러 15일이라고 했나? 그것 참 기묘한 우연이로군... 그 날은 내 생일이기도 한데 말이야.'"
"그 날의 대화는 엔쥬의 갑작스런 발목통증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나는 서둘러 주치의를 부른 뒤 그녀의 발목을 진찰하게 했다. 주치의는 낮은 목소리로, 발목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녀는 더 이상 걷지 못한다고 말했다. 엔쥬는 '조난사고로 발목을 다친 모양이로군.'이라고 한 마디 했을 뿐 그리 낙심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침울해진 것은 내 쪽이었다. 나는 엔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 뒤, 내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웠지만, 밤새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지난 며칠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객실의 엔쥬를 만나러 갔다. 엔쥬는 여전히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지만, 그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입을 열었다. 주된 화제는 시나 소설을 비롯한 문학작품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이름에 어울리게, 이야기를 좋아하는 듯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 저택에는 그녀의 이야기에 대한 욕구를 채우고도 남을만한 서책이 있었다. 대대로 독서광이 많았던 우리 밀가스트 가문이었기에 저택의 서재에는 대륙 내에서도 손꼽힐만한 양의 도서들이 구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독서를 게을리 하는 편이었는데, 엔쥬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서둘러 읽어두는 게 좋을 거야, 백작. 책이란 것은 참을성이 없어서 그대를 오래 기다려주지 않을 걸세.'
이후 나는 그 충고에 따라, 일부러 짬을 내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주로 객실에서 책을 읽었는데, 그때는 엔쥬 역시 침대에 앉은 채로 독서를 했다. 책을 읽다가 지루해지면 종이에서 눈을 들어 엔쥬를 바라봤다. 그녀는 독서를 하면서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로라도 가지고 있떤 버릇이었다. 이외에도 엔쥬와 로라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물론 위압적인 말투나 무표정한 얼굴은 전혀 닮지 않았찌만, 말버릇이나 좋아하는 음식 등의 사소한 것들이 무서울 정도로 흡사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내 착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비록 착각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 사소한 우연의 중복이 즐거웠다.
어느 날인가 엔쥬가 조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나 신세를 지기만 하는군, 백작. 내 발목만 성했더라면 당장이라도 떠날 텐데...'
그 말에 나는 펄쩍 뛰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엔쥬 님? 신세라니요. 제 집에 계셔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부디 오래도록 머물러 주십시오.'
'그대의 동정심에 몸을 기대야만 살아갈 수 있다니... 나란 것도 참으로 보잘것없군.'
'동정심 따위가 아닙니다!'
'그럼 뭔가?'
그녀가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던 엔쥬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장난이 지나쳤군. 식객 주제에 그대의 친절을 모욕하려 했네. 부디 용서해주게나.'
그리고는 살며시 웃어 보였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던, 그때의 그 미소였다.
날이 거듭될수록 내가 객실에 머무는 시간은 늘어만 갔다."
"주인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며칠 뒤, 객실에 가져갈 책을 고르고 있던 퀴에르에게, 집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퀴에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손님을 초대한 기억은 없는데? 나는 지금 바쁘니 다음에 찾아오시라고 전하게."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제게는 그 방문객께 거절의 말씀을 드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방문객의 이름을 말했다. 퀴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뭐라고?"라고 한마디 뱉고 말았다. 그는 책을 도로 책꽂이에 꽂은 뒤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로 향했다.
"그가 어째서 내 저택에 온단 말인가?"
"저로서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주인님."
주인의 뒤를 따르며 마로우는 한층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퀴에르는 응접실 문을 열기 전에 잠시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뒤 문을 열었다.
응접실에는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먼저 퀴에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였다. 눈이 가느다란 그 남자는 단정하면서 유행에 뒤지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고급향수를 썼는지 그의 주위에는 야릇한 향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남자의 뒤에는 날카로운 눈매의 여자가 서있었다. 키가 훤칠한 여자였는데, 퀴에르는 그녀의 생김새나 복장보다 그녀의 허리에 차여있는 칼에 눈길이 갔다. 이제 겨우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저런 장검을 쓰는 건가? 퀴에르는 소리 없이 물었지만 여자는 퀴에르에게 시선 한 번 옮기지 않았다.
"저 이름 높은 밀가스트 가문의 당주이시자, 이 지방 최고의 서재를 보유하고 계시다는 퀴에르 밀가스트 백작이십니까?"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연락도 없이 저택에 방문을 청하게 된 점,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껏 멋을 부린 인사였다. 퀴에르는 간결하게 답했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이렇게 누추한 곳에 찾아주시니 저희 가문이야말로 영광입니다, 클리드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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