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ovel소설/습작

폴라리스 랩소디 1 pp 22~35

 뒷갑판의 선교에 앉아 있던 엘리엇 선장은 튀어나올 듯한 눈으로 수평선 위로 떠오른 여덟 개의 돛을 바라보았다.
 "신이여!"
 갑판 위를 달리던 선원들이나 제자리에 굳어 부지런히 성호를 그어대던 선원들도 그 장면에는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해운국 카밀카르의 억세고 거친 선원들도 여덟 개의 돛대가 동시에 나타나는 장면에는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여덟 척이라는 숫자 때문은 아니다. 그 돛대가 동시에 수평선 위로 나타났다는 것은, 그 해적 함대의 선원들이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웬만한 실력을 가진 뱃사람들이라면 여덟 대의 배들로 하여금 뱃머리를 나란히 하여 항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게다가 그 함대는 제국의 공적 1호 노스윈드의 함대인 것이다.
 순식간에 배 위를 점거해 버린 공포의 기류는 레보스호의 선원들을 패닉 상태로 몰아갔다. 엘리엇 선장이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선원들 사이에서 고함이 튀어나왔고, "선수 돌려! 배 돌리라고!" 그 고함보다 먼저 공포에 질린 조타수가 타륜을 세차게 돌려버렸다.
 선체가 격심한 진동을 일으켰다. 배가 옆으로 크게 기울어지며 갑판 위의 선원들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뱃전 가까이 있던 선원 하나는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바다로 떨어져갔다. 엘리엇 선장은 무시무시한 욕지거리를 뱉어내었지만 그 역시 나동그라지지 않기 위해서는 선교의 난간을 부여자바야 했다. 난간에 매달린 채 엘리엇 선장은 조타수에게 죽일 듯한 시선을 쏘아보냈다.
 "네 이놈! 이 튀겨 죽일 놈! 타륜 제자리로 돌리지 못해!"
 넋이 나가버린 조타수는 선장의 명령에 화들짝 놀라면서 타륜을 부여잡았다. 선장은 다시 갑판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 질렀다.
 "네놈들이 누구냐! 네놈들이 누구냐!"
 선원들은 혼란에 빠져 있었기에 엘리엇 선장은 몇 번씩 고함을 질러야 했다. 선원들은 얼빠진 얼굴로 선교를 바라보았고 그런 선원들을 향해 엘리엇 선장의 추상같은 외침이 퍼부어졌다.
 "네놈들이 그러고도 카밀카르의 뱃놈들이냐! 이 찢어 죽일 놈들, 내 말을 들어라! 갑판장! 종범 모두 접는다. 종범 모두 접는다! 노예장! 노예장! 최고 전투 속도로 우회 기동, 우회 기동!"
 선원들은 그제서야 우르르 돛대를 향해 달려갔다. 갑판 아래의 노예장은 채찍을 집어들 겨를도 없이 주먹을 휘둘러 가며 노예 노잡이들을 다그쳤다. 레보스호의 우측 노들이 거대한 역진을 시작하며 동시에 좌측 노들이 어지럽게 수면을 가르자 레보스호는 제자리에서 빙글 돌기 시작했다.
 엘리엇 선장은 재빨리 다른 두 척의 배를 돌아보았지만 기함의 움직임을 본 다른 배들도 똑같은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세 척의 배는 이제 완전히 반 바퀴 선회하여 다가오는 해적 함대에게 함미를 보이게 되었다.
 "무기고 개방! 전투병은 전투 위치로! 포수장, 대포 모두 장전! 후방 대포는 장전되는 대로 겨냥할 필요 없이 모두 발사!"
 전투병들의 발소리가 갑판을 요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포수들은 재빨리 대포의 장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엘리엇 선장의 의도는 포수장에게 명쾌하게 이해되었기에 포수장은 모든 포수로 하여금 후방 대포에 우선적으로 달려들도록 명령했다. 경이적인 속도로 장전이 완료되자 포수장은 지체없이 발사를 명령했다.
 "발사!"
 쾅쾅쾅! 자욱하게 피어오른 포연 사이로 겨냥도 없이 발사된 포탄들은 모두 제멋대로 날아갔다. 삽시간에 거대한 물기둥들이 수면 위에 치솟아 올랐지만 해적선에 명중하는 폰탄은 하나도 없었다. 포격의 사정 거리가 아닌 것이다. 얼핏 보기엔 무모하고 쓸모없는 짓처럼 보이지만 여기엔 노련한 뱃사람들의 지혜가 그대로 담겨 있다. 후방으로 발사된 대포는 우선 물기둥과 파도로 적의 추격을 방해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 반작용으로 자함에 추진력을 더한다. 대포의 발사 반동이 그대로 배에 전달되는 것이다.
 다른 두 척의 배에서도 똑같은 의도 하에 발사가 시작되었기에 해상에는 거대한 카밀카르 갤리어스 세 척이 용틀임을 하며 연속 발사를 시도하는 일대 장관이 펼쳐졌다. 쾅쾅쾅쾅쾅! 잠시 동안 포성이 숨쉴 사이도 없이 울려퍼졌고 치솟아 오른 수십 개의 물기둥들은 수평선을 가려버렸다.


 배가 크게 기울어질 때 라스 카밀카르는 덱체어에서 나가떨어졌다. 아픈 무릎을 움켜쥐고 일어나기는 했지만 라스 법무대신은 졸도할 듯한 공포 외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갑판 위를 질타하는 비명과 연달아 울려퍼지는 포성은 늙은 법무대신의 청각을 무자비하게 유린하여 그의 정신을 온통 뒤흔들어놓았다. 그때 라스 법무대신의 눈에 승강구로부터 달려 나오는 호위대장 슈마허의 모습이 들어왔다.
 "서 슈마허!"
 손에 든 검집을 절렁거리며 달려온 슈마허를 향해 라스 법무대신은 거의 매달릴 듯한 동작으로 달려갔다. 그때 슈마허가 외쳤다.
 "로드 라스! 공주님께서는 어디에 있습니까?"
  슈마허의 질문을 받은 라스는 바야흐로 자신에 대한 냉혹한 평가를 내려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공주님? 오오, 이런 벼락 맞을 늙은이 같으니! 율리아나 공주님! 공주님!"
 라스는 비명을 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당황한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노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달리는 선원들과 떨어져내리는 돛, 그리고 치솟아 오르는 물기둥들과 장구히 피어오르는 포연뿐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라스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기사 슈마허는 그런 법무대신을 내버려두고 스스로 공주를 찾기 시작했다. 그의 첫번째 임무는 공주의 호위였다.
 "공주님! 공주님!"
 그때 누군가가 슈마허의 드을 두드리며 말했다.
 "같이 찾아드릴까요?"
 "예. 부탁드립니......공주님?"
 슈마허는 얼빠진 표정으로 율리아나 공주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나 공주는 슈마허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짓고는 치마를 툭툭 털어내렸다. 마치 포성과 연기, 그리고 물기둥과 선원의 광란은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말하는 듯한 태연한 모습이었다. 슈마허는 그런 율리아나 공주를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공주님! 어서 안으로 피하십시오. 로드 라스, 로드! 정신을 차리십시오!"
 그때 율리아나 공주는 다시 기사 슈마허를 놀라게 만들었다. 율리아나 공주는 라스 법무대신의 손목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승강계단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말보다 행동이라는 격언에 인용되면 아주 적절한 듯한 장면. 슈마허는 감탄한 표정으로 율리아나 공주에게 끌려가는 라스 법무대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에게 감탄을 위한 시간이 많이 허락되지는 않았다. 슈마허는 몸을 돌려 전투병들의 지휘를 위해 선수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무기고는 이미 개방되었고 전투병들은 석궁에 활을 걸고 있었다. 이물 쪽에 도열하는 전투병들을 바라보던 엘리엇 선장은 돛대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감시대, 감시대! 적선과의 거리는?"
 "1마일입니다!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엘리엇 선장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지거리를 간신히 삼켰다. 제기랄, 놈들이 우리를 몰아붙이고 있군! 고개를 돌려 노의 움직임을 본 엘리엇 선장은 뒤통수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레보스의 노는 마치 해파리의 다리처럼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노잡이 노예들도 그들을 추적하는 것이 노스윈드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공포에 빠진 모양이다. 노예장 녀석, 뭐하는 거야? 그때 그의 눈에 선교 쪽을 향해 달려오는 호위대장 슈마허의 모습이 들어왔다.
 엘리엇 선장은 슈마허가 선교에 올라서기도 전에 질문했다.
 "서 슈마허! 전투병들은 준비되었습니까?"
 "준비되었습니다. 그런데 추격을 뿌리칠 수 없습니까?"
 그 순간 엘리엇 선장은 상대방을 공주의 호위대장을 맡을 정도로 전도양양하고 우수한 자질을 갖춘 총명한 기사로 대우하기보다는 바다 위의 일은 도통 모르는 땅개로 대우하기로 결심했다. 즉, 얼간이 취급한 것이다.
 "추격은 시작되지도 않았소!"
 "예?"
 엘리엇 선장은 슈마허에게 설명하는 대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야 해. 바람이! 해적선은 바닥짐도 없고 화물도 없다. 쾌속 추적을 위해서 해적선에는 며칠 먹을 식량과 생필품 이외엔 아무것도 싣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가벼워진 배를 전속력으로 몰아서 불행한 희생자의 배에 가져다 붙이고는 지근 거리 사격 후 벌떼처럼 덤벼드는 것이 해적의 방식이다.
 선창이 미어터질 정도로 화물을 실은 카밀카르의 선단이 해적을 뿌리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당장 순풍이 불어주는 것이다. 해적들은 돛을 다루는 솜씨가 떨어지기 때문에 맹렬한 추격전이 벌어질 때는 대개 노만 사용한다. 노만 사용하는 방식은 돛을 병용하는 것보다 월등히 기동성이 높기에 전투에 적합한 추진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순풍이 불어준다면! 육지에서 멀미를 느낀다는 카밀카르의 뱃사람들은 어떤 바람이라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다. 엘리엇 선장은 모든 갈망을 담아 풍향과 풍속을 가늠했다.
 그러나 잠시 후 엘리엇 선장은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역풍이 불고 있었다. 게다가 오랜 경험으로 엘리엇 선장은 이 바람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거라는 점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엘리엇 선장의 눈이 사나워졌다.
 레보스호 갑판 아래의 노예장은 기어코 채찍을 찾아내었다. 하지만 노예장은 겨우 찾아낸 채찍을 미련 없이 걷어차 버리고는 대신 그 옆에 있던 북채를 집어들었다. 지금은 채찍을 휘두르는 것은 별 효과가 없다. 노예들 역시 그들을 추적하는 것이 저 노스윈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채찍을 휘두르면 노예들은 패닉 상태에 빠트릴 뿐 아무런 성과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노예장은 채찍을 휘두르는 대신 북채를 잔뜩 부여잡고는 있는 힘껏 고함 질렀다.
 "이 빌어먹을 놈들아! 힘내라! 노스윈드는 밥 먹이기 귀찮아서 노예 장사는 하지 않는다. 알겠냐! 우리 배가 나포되면 너희들도 모두 바다에 처넣어질 거란 말이다! 10데리우스도 나가지 않을 썩어문드러질 몸이지만, 네놈들에게는 귀한 몸이겠지? 이 개같은 놈들, 힘내라!"
 노예장은 다리 사이에 북을 끼우고는 그것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포성 때문에 북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폭언 속에 담긴 노예장의 마음을 잘 짐작할 수 있었던 노예들은 노예장의 손만 보면서도 노의 움직임을 정렬시킬 수 있었다. 카밀카르 갤리어스의 노는 모두 160개. 40개의 노가 2단으로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카밀카르 갤리어스는 다른 나라의 갤리어스보다 월등히 긴 노를 사용하며 그래서 노 하나에 노잡이 둘을 배치한다. 320명의 노잡이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땀만으로도 갑판 아래에는 안개가 서릴 지경이었다. 가지런히 정렬된 160개의 노는 해수면을 완강하게 할퀴기 시작했고, 선체 옆으로 포말이 튀어오르며 레보스호는 무서운 속도로 물마루를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오오, 이놈. 드디어 해내었구나!"
 엘리엇 선장은 노의 움직임을 보며 춤이라도 추고 싶어졌다. 정렬된 노들은 마치 하나의 노처럼 움직이며 레보스호를 앞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레보스호는 다른 두 배의 앞쪽으로 죽죽 나아갔다. 엘리엇 선장은 모자가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꽉 누르며 다시 고함을 질렀다.
 "기수! 기수! 다른 배에 신호를 보내라. 모두 산개한다!"
 마치 단검을 품에 안고 달리는 암살자 같았다. 기수는 두 개의 깃발을 품에 안고는 혼란스러운 갑판 위를 사슴처럼 달려서는 고물 위에 우뚝 섰다. 깃발이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다른 두 척의 배의 진로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세 척의 배는 이제 약 30도의 각을 이룬 채 세 방향으로 흩어져 나아갔다.
 엘리엇 선장은 비통한 마음으로 기원했다.
 '제발, 부탁이다. 가장 느린 배 하나를 따라가라. 이 배에는 카밀카르의 공주님가 타고 계시다.'
 그러나 그때 그의 눈이 슈마허 호위대장의 눈과 맞부딪쳤다.
 기사 슈마허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엘리엇 선장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슈마허는 말하고 싶었다. 다른 배를 미끼로 탈출하겠다는 겁니까? 그러나 슈마허는 엘리엇 선장의 결정이 합리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슈마허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서는 선교를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슈마허의 등을 바라보며 엘리엇 선장은 자신의 판단을 수정했다. 저 기사놈은 겉으로 보기만큼 얼간이는 아닌 모양이군. 엘리엇 선장은 앞으로 10년쯤 후 기사단장이 되어 있는 슈마허를 보더라도 크게 놀라지는 않기로 결심했다.
 10년 후까지 살아 있을 수 있다면 말이지.

 
 레보스호의 공포의 원인인 자유호의 선교에서는 한 사내가 조용하면서도 엄격한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주위의 다른 해적들이 추격자의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욕지거리를 내뱉고 사나운 고함을 질러대고 있는 것에 비해 볼 때 사내의 조용한 태도는 이질적으로까지 보였다. 하지만 사내는 다른 해적들의 난동을 말리지는 않았다. 해적들이 사납게 구는 이유는 다가올 전투를 대비하여 전투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의 뒤편으로 다른 사내가 다가서며 말했다.
 "이보세요, 식스. 놈들이 흩어지고 있는데요?"
 식스는 순간 울화통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하마터면 그의 주위를 감도는 엄격함이 깨질 뻔했지만 식스는 간신히 자신을 자제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식스는 노스윈드의 함대에서 그로 하여금 울화통을 터뜨리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내를 향해 말했다.
 "여러 번 말했지만, 다시 말하겠네. 1등 항해사님이라고 부르게. 라이온 갑판장."
 라이온 갑판장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적 함대는 산개하고 있습니다. 식스 1등 항해사님."
 식스는 거의 라이온의 멱살을 붙잡아 바다로 던질 뻔했다. 하지만 품위 없는 행동을 경멸하는 그의 뿌리 깊은 근성이 다시 한 번 라이온의 목숨을 구했다. 식스는 그 상황에서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미안하군. 다시 말하겠네. 직함만으로 충분하네."
 "아아, 그렇습니까? 잘 알겠습니다. 1등 항해사님."
 앞니가 몽땅 드러나는 큼직한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라이온을 향해 식스는 소리 없이 악담을 퍼부어대었다. 망할 놈. 누구는 여섯번째 아들로 태어나고 싶었는 줄 아냐? 줄줄이 다섯 명의 아들을 뽑아대다가 여섯번째의 아들을 낳게 되자 그만 이름을 지어내기 귀찮아진 우리 부모님이 그런 이름을 붙여 버린 것이 내 잘못이냐? 사십 평생을 그런 이름으로 불린 것으로 족하거늘 네놈까지 내 이름을 가지고 놀아?
 그러나 식스는 그런 자기 변명을 하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식스는 엄격한 어투로 라이온에게 명령했다.
 "중앙의 적선을 추격한다."
 라이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저 배가 가장 빠른데요?"
 "나는 지금 자네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 아니네. 명령하는 것이야. 복창, 전속력으로 중앙 적선을 추격한다!"
 "......가운데 배를 X빠지게 따라간다."
 라이온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복창하고는 분노에 미친 식스가 검을 휘둘러대기 전에 재빨리 앞갑판으로 도망쳤다.
 분명한 목표물이 정해지자, 여덟 척의 해적선은 이제 본격적인 전투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해전에 대비하여 돛은 모두 접혀지고 대포에는 포탄이 장전되었다. 그리고 자유호 갑판 아래의 노예장은 히스테릭한 기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자, 돌격이다! 우물쭈물거리는 놈은 살을 발라놓겠다!"
 최고로 격양된 자유호의 노예장은 레보스의 노예장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노예들을 격려했다. 공기를 가르는 파열음에 이어 가죽 채찍이 살에 감기는 그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퍼지자 노예들은 죽을힘을 다해 노를 끌어당겼다. 노예들의 발목에 매어진 쇠사슬들은 격심한 배의 움직임과 노예들의 몸놀림으로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절그렁거렸다. 예리한 채찍 소리와 둔중한 쇠사슬의 절그렁거림, 그리고 노를 끌어당기며 용을 쓰는 노예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들이 한데 뒤섞여 자유호의 갑판 아래쪽을 괴기스럽고 끔찍한 분위기로 물들였다.
 "당겨! 당겨! 이 빌어먹을 놈들, 덥냐? 더워? 좋아! 너희 인자한 노예장님의 특별 선물이다!"
 노예장은 채찍을 집어던지고는 옆에 놓아두었던 물통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바가지로 물을 퍼 노예들에게 뿌려대기 시작했다. 거대한 노를 당기느라 후끈 달아올랐던 근육과 피부 위로 느닷없이 찬물이 쏟아지자 노예들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을 느끼며 신음을 뿜어내었다. 하지만 감히 비명을 지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고통과 한기로 경련을 일으키면서도 노예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노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비명이 나오지 않는 이상 독려는 실패라고 생각하고 있던 노예장은 더욱 그악스럽게 물을 뿌려대고 고함을 질렀다.
 "당겨! 당겨!"
 노예들은 이제 몽환 상태에 빠진 채 기계적으로 노를 끌어당겼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한가지밖에 없었다. 상대방이 침몰하든 이 배가 침몰하든, 어서 이 추격이 끝났으면. 그래서 더 이상 노를 젓지 않아도 되게 된다면......
 그때 좌현에 앉아 있던 노예 하나가 노를 놓았다.
 갤리어스의 노는 전체가 하나가 되어 움직였을 때 최고의 성능을 발휘하지만, 최고 가속 상태에서 하나의 노라도 그 움직임이 흩어지면 상당히 치명적일 수도 있는 파급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노예가 놓아버린 노는 당장 앞으로 당겨지는 노에 부딪히고 뒤에서 다가오는 노에 걸리며 큰 소동을 일으켰다. 노예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고 노를 놓아버린 노예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노예는 겁먹은 표정으로 외쳤다.
 "오스발? 오스발! 무슨 짓이야?"
 그러나 오스발의 얼굴을 본 순간, 노예는 그가 노예장의 폭력에 맞서 단호한 이상주의에 입각한 만민평등의 구호를 몸으로 외치거나, 혹은 치명적 허무주의에 입각한 자살 충동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선창을 쿵쿵 울리며 다가온 노예장이 시뻘게진 얼굴을 한 채 채찍을 높이 들어올렸을 때 그 점이 명확해졌다.
 오스발의 상체가 앞으로 스르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풀썩. 오스발은 두 팔을 펼친 채 자신의 노 위에 쓰러졌다. 높이 들어 올려진 노예장의 채찍은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멈칫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노예는 온힘을 끌어모아 간신히 말했다.
 "노예장님. 오스발 이놈, 기절한 거 같은데요......"
 자유호의 선교 위에 우뚝 서 있던 1등 항해사 식스는 좌현에서 일어나는 노의 움직임을 보며 대로했다. 어찌나 대로했는지, 식스는 평소에 구사하지 않는 격한 언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나쁜 놈들!"
 식스가 자신이 구사한 언어의 폭력성에 질려 굳어 있는 동안, 라이온 갑판장은 보다 직접적인 행동을 선택했다. 라이온은 당장 갑판 위로 몸을 날려서는 승강구의 해치를 열어제치고 머리를 갑판 아래로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그 포악성이나 다채로움에 있어 식스가 구사한 폭언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 폭언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내었다. 식스는 그런 라이온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갑판 아래에 있던 노예장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라이온은 그렇게 우선 노예장에게 지옥 같은 욕설부터 한참 퍼붓고 난 후에야 이 사태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이 개놈의 자식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 저, 라이온 갑판장님. 노예 하나가 갑자기 기절해서......"
 "기절? 너 지금 기절이라고 했냐? 그게 어느 나라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말은 아냐! 나는 그 말 몰라! 이 자식, 네 놈이 대신 노를 잡아서라도 당장 원상복구햇! 그렇잖으면 이 해역의 상어들은 오늘 저녁 식사로 머저리 노예장을 포식하게 될 거다! 아, 그리고 난 상어놈들과의 오랜 근린 관계를 고려해서 그 노예장을 <요리>한 후 가져다 바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
 오스발은 기절한 상태대로 해체하기로 마음 먹고 있었던 노예장을 라이온의 다그침 때문에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노예장은 황급히 오스발의 쇠사슬을 풀고 그의 몸을 질질 끌어내었다. 그리고는 그 스스로 오스발을 대신하여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라이온은 그제서야 만족한 표정으로 머리를 들어올렸다. 콰앙! 라이온이 걷어찬 해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익숙하지 않은 노역 때문에 노예장은 당장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꽉 다문 그의 입술 사이로 해괴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보는 노예들의 눈에는 결코 동정심이라고는 볼 수 없는 흥미로운 눈빛이 반짝거렸다. 땀을 비오듯이 흘리면서, 노예장은 가물거리는 정신 속에서 결심했다. 으아아, 오스발 이놈! 깨어나기만 해봐라! 그러나 노예장의 그런 살기 어린 눈빛을 받으면서도 오스발은 묵묵히 맡은 바 기절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N]ovel소설 > 습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폴라리스 랩소디 1 pp 35~46  (0) 2010.03.07
공의 경계 上 pp 1~24.  (0) 2010.02.26
폴라리스 랩소디 1 pp 13~21  (0) 2010.02.25